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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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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42>

김기협 위원의 SF기획 - 보네거트 작/박웅희 옮김

그들 바이아 데 다윈 호에 탄 사람들은 아직은 배고픔을 심하게 느끼지 않았다. *카자크까지 포함해서 모두의 내장에는 여전히 어제 오후에 먹은 것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소화할 수 있는 마지막 분자들을 쥐어짜내고들 있었다. 갈라파고스 거북의 생존 전략처럼 제 몸을 소모하고 있는 사람은 아직은 아무도 없었다. 칸카보노 소녀들은 배고픔이란 것이 뭔지 이미 알고다.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발견이 될 것이었다.

기력을 유지한 채 계속 깨어 있어야 하는 사람은 메리 헵번과 선장 두 사람뿐이었다. 칸카보노 소녀들은 바이아 데 다윈 호나 그 항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며, 칸카보노 이외의 말은 누가 뭐라든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히사코는 긴장병(緊張病)에 시달렸고, 셀레나는 장님이었으며, *웨이트는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니 배를 조종하고 *웨이트를 간호할 사람은 그 두 사람뿐이었던 것이다.

항해 첫날 밤, 선장은 낮에는 그녀에게 타륜을 넘기기로 합의했다. 낮이라면 방향을 알 수 있었다. 태양이 떠오르는 쪽이 분명 그들이 떠나온 동쪽일 터였고, 태양이 지는 쪽은 평화와 풍요의 땅 발트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서쪽임에 틀림없었다. 밤에는 선장이 별들을 보며 배를 몰 것이었다.

타륜을 잡지 않은 사람은 *웨이트와 함께 있어 줘야 했다. 그러는 가운데 조금은 눈을 붙일 수 있을 것이었다. 불침번치고는 확실히 너무 길었지만, 한편 그것은 조금만 참으면 곧 끝날 시련이기도 했다. 선장의 계산대로라면, 발트라는 과야킬에서 대략 40시간밖에 걸리지 않을 터였으니까.

실제와는 달리 배가 정말로 발트라에 당도했더라면, 그들은 항공 우편으로 배달된 또 하나의 대고나이트 소포가 그곳을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인간들은 워낙 번식력이 높았다. 따라서 그 정도의 재래식 폭발로는 장기적인 생물학적 영향은 거의 받지 않았다. 심지어 오랜 전쟁이 끝났을 때도, 생존자가 너무 많아 보일 지경이었다. 아이들이 늘 넘쳐나다 보니 폭력적 수단을 통해 인구를 줄여 보려는 진지한 시도는 실패가 예정되어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핵 공격을 제외하면 그런 수단은 인류에게 영구적 손상을 입히지 못했다. 바이아 데 다윈 호가 아무리 바다를 가르고 휘저어도 바다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재생산을 통해 재빨리 원상회복하는 인류의 능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폭격을 그저 쇼 비즈니스쯤으로, 대단히 극적인 자기표현 방식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산타 로살리아 섬에 표류하게 되는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이제 곧 모든 인류가 자기 치유력을 잃게 된다. 이후로는 인류가 입은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여, 고성능 폭약은 이제 더는 쇼 비즈니스의 일부일 수 없었다.

만약 인류가 스스로 낸 상처들을 성교를 통해 계속 치유했더라면, 참으로 사태가 그렇게 진행되었더라면, 산타 로살리아 정착지에 표류한 그들에 대해 내가 할 이야기는 무능한 허풍쟁이 선장을 주인공으로 하는 희비극이 되었을 것이다. 이야기가 다루는 시기도 백만 년이 아니라 몇 개월에 그쳤을 것이다. 그들은 결코 거기에 정착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들은 얼마간의 고립 생활을 한 끝에 발견되어 구조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경우 선장은 그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준 유일한 장본인으로 호된 망신을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장은 그 어리벙벙한 하룻밤이 지나자 모든 것이 다 괜찮다고 믿었다. 곧 메리 헵번이 타륜을 잡고서 자신을 쉬게 해 줄 것이었다. 그러면 그는 그녀에게 이런 지시를 내릴 생각이었다.

“오전엔 계속 해를 고물에 두고, 오후엔 계속 이물에 두시오.”

선장은 자신의 가장 화급한 과제는 승객들로부터 존경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승객들은 그의 최악의 모습을 보아 버렸다. 그는 배가 발트라의 부두에 닿을 때쯤엔 그들이 자신의 만취한 모습을 잊고서 누구에게나 자기를 생명의 은인으로 소개하기를 바랐다.

당시의 사람들은 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더 이상 할 수 없는 일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결코 일어나지 않을 사건을 공상 속에서 즐기는 일이었다. 내 어머니는 그걸 잘 하셨다. 언젠가는 남편이 SF를 그만 쓰고 대신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싶어하는 것을 쓰리라. 그리하여 우리는 아름다운 도시의 새 집에서 멋들어진 옷을 입고 살게 되리라. 나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은 대체 왜 힘들여 현실을 창조하셨을까 하고 의아하게 여기곤 했다.

만다락스 가라사대:

상상은 여러 번의 항해 여행과 맞먹는다.
게다가 또 얼마나 저렴한가!
― 조지 윌리엄 커티스(1824∼92)

하여, 선장은 브리지에서 반벌거숭이로 있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자신의 재산과 친구들이 널려 있는 맨해튼 섬에 가 있었다. 그는 발트라에 닿으면 어떻게든 거길 빠져 나와 파크 가(街)에다 멋진 아파트를 살 예정이었다. 그리고 에콰도르 같은 것이야 까마득히 잊을 작정이었다.

그때 현실이 비집고 들어왔다. 태양이 무척이나 실감나게 떠오르고 있었다. 한데, 그 태양과 관련해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선장은 간밤 내내 바이아 데 다윈 호가 똑바로 서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해는 정확히 고물 쪽에서 떠야 옳았다. 하지만 오늘 해는 고물 쪽에서 뜨긴 했으나 우현으로 많이 치우쳐 있었다. 그는 해가 응당 있어야 할 위치에 올 때까지 배를 좌현으로 틀었다. 그의 과실을 바로잡게 한 그의 커다란 뇌는 그의 영혼에게, 그 실수는 사소한 것이고 바로 전에 빚어진 것이며 여명으로 별빛이 흐려진 탓이라고 치부하게 만들었다. 그의 커다란 뇌는 그가 승객들의 존경을 얻고 싶어하는 만큼이나 그의 영혼의 존경을 얻고 싶어했다. 그의 뇌에게는 저만의 삶이 있었으며, 선장은 나중에 자기를 잘못 인도한 죄를 물어 뇌를 해고하게 된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아직 닷새가 남아 있었다.

‘윌러드 플레밍’이 어떤지 알아보고 메리가 계획대로 고급 선원실 통로의 그늘로 그를 옮기는 걸 도우러 선미 쪽으로 갔을 때만 해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뇌를 신뢰했다. 나는 ‘윌러드 플레밍’이라는 이름 앞에는 별표를 달지 않는다. 그런 인간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죽을 일도 없으니까.

선장은 메리 헵번에게 별 관심이 없었으므로 그녀의 성(姓)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성이 카플란이려니 생각했다. 지금 *웨이트가 베개 대용으로 베고 있는 전투복의 호주머니 위에 붙은 이름이 카플란이었다.

*웨이트도 그녀가 몇 번이나 정정해 주었는데도 그녀의 성을 한사코 카플란이라 믿었다.
간밤에 그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네 유대인들은 대단한 생존자들이오.”

“당신도 생존자예요, 윌러드.”

“글쎄요, 카플란 여사. 전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요.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다 생존자겠죠.”

“자, 자,” 하며 그녀가 말했다. “우리 재미있는 이야기나 해요. 발트라를 생각하자구요.”

하지만 *웨이트가 아직 멀쩡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때 그의 뇌에 대한 혈액 공급은 믿을 만했다. 그는 메마른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생존이 뭐 그리 대수라고, 자기들이 대단한 생존자라고 자랑하는 사람들 천집니다. 그렇지 않은 인간은 시체뿐이죠.”

“자, 자, 이제 그만요.”

해가 뜬 후 선장이 두 사람 앞에 나타났을 때, 메리는 이제 막 *웨이트의 청혼을 받아들인 참이었다. 하도 끈질기게 졸라대니 그만 두 손을 들고 만 것이었다. 밤새 물을 달라고 보채는 아이에게 하는 수 없이 물 한 모금 주었다고나 할까. 그가 만약 약혼식을 올리자고 졸라댔다면, 그리고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약혼식뿐이었다면, 그녀는 그 부탁도 들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서약을 곧바로 이행해야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어쩌면 그럴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가 좋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지난 밤 그녀가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아주 좋아한다고 밝히자, 그는 자기는 온 세상이 백설로 덮인 가운데 고요한 숲 속의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스키를 타던 때보다 더 행복한 때는 없었노라고 다정하게 화답했다. 그는 평생 스키를 타 본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한때 뉴햄프셔의 화이트 산맥에 있는 한 스키장 주인의 미망인과 결혼했다가 그녀를 파멸시킨 적은 있었다. 그는 봄날 그녀를 유혹해서는, 푸른 잎이 단풍이 들어 다 떨어지지도 전에 그녀를 거렁뱅이로 만들어 놓고 떠났다.

메리가 결혼을 약속한 상대는 이런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모조품이었다.

어떤 사람과 결혼 약속을 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그녀의 큰 뇌가 그녀에게 말했다. 발트라에 도착하기까지는 그들이 결혼하지 않을 것이 확실했고, ‘윌러드 플레밍’은 그때까지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 즉시 치료부터 받아야 할 것이었다. 약속을 철회할 시간은 넉넉한 셈이었다.

때문에 *웨이트가 선장에게 “기가 막힌 소식이 있습니다. 카플란 여사가 나와 결혼합니다.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예요.” 하고 말했을 때도, 그녀는 특별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운명은 지금 말뫼의 조선소에서 내 머리가 잘려 나가던 때와 비슷한 정도로 빠르고도 솜씨 좋게 메리를 속이고 있었다.

“운이 좋으시군요.”

선장이 말했다.

“공해상에 있는 이 배의 선장으로서, 나는 성혼을 선언할 수 있는 합법적 권한이 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여기 하느님 앞에 모여……”로 시작된 그의 주례사는 2분 뒤 ‘메리 카플란’과 ‘윌러드 플레밍’을 남편과 아내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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