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다락스 가라사대,
맹세는 그저 말일 뿐이고, 말은 그저 바람일 뿐이다.
― 새뮤얼 버틀러(1612∼1680)
산타 로살리아 섬에서 메리 헵번은 만다락스를 통해 이 구절을 포함해 수백 개의 명언을 기억하게 된다. 하지만 세월이 감에 따라 그녀는 '윌러드 플레밍'과 결혼한 사실을 점점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 두 번째 남편은 선장이 성혼을 선언한 지 2분쯤 뒤에 미소를 머금은 채 죽었는데도 말이다. 그녀는 허리가 굽고 이가 다 빠진 노파가 되었을 때 털북숭이 아키코에게 곧잘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좋은 남편을 두 사람이나 보내주신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단다."
로이와 '윌러드 플레밍'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는 선장이 탐탁지 않다는 그녀 나름의 표현이기도 했는데, 선장은 그때 백발 노인으로, 아키코를 제외한 그 섬 모든 젊은이의 아버지거나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아키코는 떠나온 옛 세계의 삶에 얽힌 이야기, 특히 사랑 이야기를 들으려 하는 새 정착지의 유일한 젊은 사람이었다. 메리는 일인칭의 사랑 이야기를 할 만한 게 거의 없어서 아키코에게 미안해 하곤 했다. 그녀는 자기 부모가 정녕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고 말해주었고, 두 사람이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를 끌어안고 입맞추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아키코는 넋을 잃고 들었다.
메리는 또 자신과 폐교 직전의 일리엄 고등학교 영어과장이던 로버트 워이씨호위츠라는 홀아비 사이의 연애담 같지도 않은 연애담을 들려주어 아키코를 웃기기도 했다. 그는 로이와 '윌러드 플레밍'말고 그녀에게 청혼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저 이런 일이었다. 로이가 땅에 묻힌 지 겨우 두 주 정도 지났을 때 워이씨호위츠가 메리에게 전화를 걸어 데이트를 청했다. 그녀는 거절한 다음,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시작하기는 너무 빠르다고 설명해주었다.
메리는 그의 의욕을 꺾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어느 날 오후, 그는 그녀가 정말이지 혼자 있고 싶다고 통사정을 했는데도 기어이 그녀를 집으로 찾아왔다. 메리가 잔디를 깎고 있는데 그의 차가 들이닥쳤다. 메리에게 잔디 깎는 기계를 끄게 하고는 대뜸 청혼을 하는 것이었다.
메리는 아키코가 자동차라곤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몰고 온 차의 모양을 설명해서 웃겨주었다. 로버트 워이씨호위츠는 재규어를 몰고 다녔는데, 한때는 아주 멋진 차였지만 이젠 온통 긁히고 운전석 옆이 찌그러져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 차는 아내가 죽으면서 선물한 것이었다. 아내의 이름은 *도리스였는데, 아키코는 단지 메리의 이야기에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이름을 자신의 털북숭이 딸 하나에게 붙여주었다.
유산이 좀 있었던 *도리스는 평생 좋은 남편 노릇을 해준 보답으로 로버트에게 그 차를 사준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조지프라는 다 큰 아들이 있었는데, 이 얼뜨기 녀석이 어머니가 아직 세상을 떠나기도 전에 그 아름다운 재규어를 어디다 처박아버렸다. 조지프는 음주운전으로 1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여기서도 뇌의 크기를 줄여주는 예의 그 술이 문제였다.
로버트가 청혼한 장소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다듬어진 잔디밭이었다. 다른 집 마당들은 야생(野生)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주인이 모두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로버트가 청혼하는 동안 커다란 황금빛 리트리버 사냥개가 계속 그들에게 짖어대며 겁주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생의 마지막 몇 달 동안 로이에게 큰 위안이 되어주었던 도널드였다. 당시에는 개에게도 이름이 있었다. 도널드는 개였고, 로버트는 사람이었다. 도널드는 순한 개였다. 누굴 문 적도 없었다. 녀석이 원하는 것은 오직 누군가가 막대를 던지면 물어다 주고, 또 던지면 또 물어다 주고 하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도널드는 아무리 잘 봐줘도 영리한 편은 못 되었다.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작곡할 재목은 못 되었다. 도널드는 자다가 끙얼대며 뒷다리를 떠는 때가 많았다. 막대를 쫓아다니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었다.
로버트는 개를 무서워했다. 다섯 살 때 어머니와 함께 커다란 도베르만한테 공격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주변에 개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있을 땐 로버트도 괜찮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 없이 개와 단둘이 마주치면 개가 크든 작든 진땀이 흐르고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고 늘 조심을 기울였다.
메리 헵번은 그의 청혼에 너무 놀라 눈물을 터뜨렸다. 오늘날엔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 그녀는 너무나 당혹스러워 쩔쩔매다가 떠듬떠듬 양해를 구하는 말을 던지고는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로이 아닌 누구와도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로이가 비록 죽었어도 로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로버트는 앞뜰 잔디밭에 도널드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로버트의 큰 뇌가 어지간만 했어도 점잖게 도널드를 “짖지 마! 저리 가!” 꾸짖으며 자기 차로 돌아가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큰 뇌는 그로 하여금 꽁무니에 도날드를 매달고 달아나도록 만들었다. 얼마나 신통찮은 뇌였던지, 도널드에게 쫓긴 그를 차마저 지나쳐 어떤 집 앞뜰의 사과나무에 올라가게 했다. 식구들이 모두 알래스카로 떠나버린 빈 집이었다.
도널드는 나무 아래서 그를 올려다보며 계속 짖어댔다. 로버트는 한참이 지나 지루하게 짖어대는 개소리 때문에 메리가 나와 구해줄 때까지 나무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엇다.
나무에서 내려온 로버트는 공포심과 자기혐오감이 겹쳐져 메스꺼움을 느꼈다. 그는 진짜로 토했다. 그 바람에 구두와 바지를 망치고는 시근덕거리며 말했다.
ꡒ난 사내가 아니오. 도저히 사내가 아니오. 다신 당신에게 추근대지 않겠소. 다신 어떤 여자에게도 추근대지 않겠소.ꡓ
이 대목에서 메리의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돌프 폰 클라이스트 선장 역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닷새동안 거품을 일으키며 대양을 헤집고 돌아다니고도 섬이라곤 그림자 하나 찾지 못하자 똑같은 식으로 자기를 비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북쪽으로 너무 멀리, 정말 너무 멀리 와 있었다. 따라서 우리 모두도 북쪽으로 너무 멀리, 정말 너무 멀리 와 있었다. 나는 물론 배가 고플 리 없었고 저 밑 주방의 고깃간에 꽁꽁 얼어 있던 제임스 웨이트도 마찬가지였다. 주방은 비록 전구가 달아나고 현창(舷窓)도 없는 공간이었지만 전기 오븐과 스토브의 전열선으로 괴기한 조명이나마 조명이 가능했다.
수도관도 아직 멀쩡했다. 곳곳에 설치된 수도꼭지에서는 온수건 냉수건 물이 철철 나왔다. 그래서 아무도 목은 마르지 않았지만, 분명 모두가 굶주렸다. 셀레나의 개 카자크가 실종되었는데, 내가 여기서 그 개 이름 앞에 별표를 달지 않는 것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셀레나가 자는 동안 칸카보노 여자애들이 그 개를 훔쳐다가 맨손으로 목졸라 죽이고 오로지 이빨과 손톱만으로 가죽을 벗기고 창자를 긁어냈다. 그리고는 오븐에 구워 먹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일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개는 제 속살을 거의 다 소진한 상태라 소녀들이 죽였을 때는 이미 가죽과 뼈다귀뿐이었다.
그 개가 산타 로살리아 섬에 살아서 도착했다 해도, 그리고 어떤 기적으로 그곳에서 수캐를 만났다 하더라도, 그리 대단한 미래를 열어나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카자크는 거세된 개였던 것이다. 카자크가 자기 일생을 넘어 그곳에 남길 수 있는 것이라곤 곧 태어날 털북숭이 아키코에게 유년기 추억을 만들어주는 것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상황을 만났다 해도 카자크는 그 섬에 태어날 다른 아이들이 예뻐해 주고 꼬리치는 동작 따위를 보아줄 때까지는 살지 못했을 터였다. 더욱이 그 애들이 카자크의 짖는 소리를 기억해줄 수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카자크는 짖지 못하는 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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