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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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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48>

김기협 위원의 SF기획 - 보네거트 작/박웅희 옮김

배는 가라앉으면서 육류 냉동고 바닥에 있던 제임스 웨이트의 뼈다귀들도 함께 가져갔다. 그의 뼈는 그 냉동고 바닥에 오늘날도 존재하는 것과 같은 파충류며 조류의 뼈다귀와 뒤섞여 있었다. 오늘날 살과 가죽으로 덮여 있지 않은 종류의 뼈는 웨이트의 것뿐이었다.

그는 어떤 원숭이 종류의 수컷이었음이 분명하다. 직립해서 보행하고, 짐작컨대 정교한 관절로 이루어진 두 손을 제어하는 게 목적인, 두드러지게 커다란 뇌를 가진 원숭이 말이다. 그는 불을 다루고 연장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말도 몇 마디 사용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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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가라앉을 당시 선장은 섬에서 유일하게 수염을 기른 사람이었다. 1년 후 그의 아들 가미가제가 태어난다. 13년 후에는 그 섬에 두 번째 수염이 생긴다. 가미가제의 수염이었다.

만다락스 가라사대,

턱수염 기른 노인이 살았다.
그 노인이 말했다.
“내가 염려했던 대로야!
올빼미 둘에 암탉이 하나,
종다리 넷에 굴뚝새 하나,
다들 내 수염에다 둥지를 틀었잖아.”
― 에드워드 리어(1812∼1888)

섬에 들어와 산지 10년 후 배가 가라앉을 무렵에는 선장은 생각할 거리도 일할 거리도 별로 없는 아주 따분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많은 시간을 섬에 하나뿐인 샘 근처에서 보냈다. 화산 기슭에 있는 샘이었다. 사람들이 물을 길러 오면, 자기가 샘의 친절한 주인이나 관리인이나 수호자라도 되는 듯이 그들을 맞이하곤 했다. 자기 말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칸카보노들에게까지 그 날 샘의 컨디션이 어떤지 말해주었다. 바위틈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이런 식으로 판정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꽤 신경질인 걸.” “오늘은 기분이 썩 좋아.” “오늘은 아주 게으르군.”

사람들이 거기 오기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이 더 이상 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오늘날까지 물방울이 떨어지는 가락은 사실 아주 꾸준했다. 그 원리는 미 해군사관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분화구는 빗물을 받는 일종의 거대한 사발이고 두터운 화산암층 밑에 스며든 빗물은 햇볕으로 증발되지 않고 고여 있다. 그 사발에서 물이 조금씩 새나오는 틈새, 그것이 샘이었다.

시간이 남아도는 선장이었지만, 그 샘은 더 편리하게 고칠 여지가 없었다. 물은 화산암 바위틈에서 더할 나위 없이 잘 떨어지고 있었고 10센티미터 아래 천연의 대야에 고이고 있었다. 그 대야는 그때나 지금이나 대충 ꡐ펄럭이는 커튼ꡑ의 일등 객실에 딸린 화장실의 세면대쯤 되는 크기다. 대야를 깨끗이 비울 경우 선장이 재촉을 하거나 말거나 만다락스의 측정으로 24분 11초면 다시 가득 찬다.

선장의 만년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그가 적막한 절망감 속에 살았다고 말해야겠다. 하지만 그가 그런 절망감을 느낀 것이 산타 로살리아 같은 섬에 고립된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만다락스 가라사대,

대다수 사람들은 적막한 절망감 속에 살아간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

왜 한 절망이라는 병이 당시, 특히 남자들 사이에 그토록 만연했을까?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유일한 진짜 악당인 지나치게 큰 뇌를 다시 탓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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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적막한 절망의 삶을 살아가는 남자는 하나도 없다. 백만 년 전 많은 남자들이 적막한 절망에 빠진 것은 두개골 안에 든 그 악마 같은 컴퓨터가 절제와 여유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컴퓨터는 인생에서 실제로 제기되지 않는 힘든 문제들을 끊임없이 들이댔다.

이제 인류가 오늘날까지 기적적으로 살아남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고 생각되는 사건들과 상황들을 거의 다 설명했다. 그 사건들과 상황들은 완벽한 행복으로 통하는 여러 겹의 문을 여는 기묘한 모양의 열쇠들이었던 것 같다.

산타 로살리아 섬에 연장이 없었다는 사실도 분명 그런 열쇠의 하나였다. 그곳에 연장이라곤 뼈다귀며 나뭇가지며 돌이며 물고기와 새의 내장 따위가 고작이었다. 만약 선장이 쇠지레든 곡괭이든 삽이든, 뭐든 하나라도 쓸만한 연장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과학과 진보의 이름으로 그 샘을 틀어막거나, 며칠 동안에 분화구의 모든 내용물을 다 쏟아내게 하는 방도를 찾아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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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로살리아 섬의 사람들이 인구와 식량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재주보다는 행운 덕분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이 선심을 쓰기로 작정했고, 그래서 먹을 것이 충분했던 것이다. 다른 섬의 새들이 번성하고 있었으므로 과밀 서식지로부터 산타 로살리아 섬으로 끊임없이 건너오는 새들이 사람들에게 잡아먹힌 자기네 동료들의 둥지를 넘겨받았다. 바다이구아나에게는 그런 자연적 보충체계가 없었다. 장거리 수영을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험악한 파충류의 겉모습과 내장 속의 내용물이 주는 혐오감 탓에, 사람들은 다른 식량이 다 바닥나 연명이 힘들어질 때가 아니면 바다이구아나를 자양분으로 이용할 생각을 먹지 않았다.

가장 입에 맞는 음식은 새알이라는 데 모든 사람이 동의했다. 새알은 널찍한 바위에서 몇 시간 동안 햇볕에 익혀 먹었다. 산타 로살리아 섬에는 불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은 새에게서 훔친 물고기였다. 그리고 그 다음은 새 자신이었다. 맨 마지막이 바다이구아나의 뱃속에서 나오는 걸쭉한 해초 수프였다.

자연은 사실 무척이나 후해서, 정착자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거들떠볼 필요가 없는 식량이 섬에 널려 있었다. 그 가운데는 곳곳에 퍼질러 누워 지나는 인간에게 무심한 눈길을 던지는 온갖 나이의 물개와 강치도 있었다. 녀석들은 짝짓기 철의 수컷을 제외하면 인간에게 낯을 가리거나 사납게 굴지 않았다. 그들도 사실 기막힌 먹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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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섬에 내리자마자 육지이구아나들을 죄 죽여버린 것은 치명적인 과실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재앙이라고까지 할 만한 사태로 귀결되지는 않았다. 아주 중대한 실수였으나, 순전히 운이 좋아서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이었다. 산타 로살리아 섬에 육지거북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있었더라면 사람들은 필경 그 짐승까지 절멸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그리 문제될 것은 없었을 것이다.

한편, 세계의 다른 지역,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사람들이 수백만 명씩 죽어가고 있었다. 여러 해 동안 계속 비가 오지 않은 탓이었다. 그곳은 원래 비가 많았던 곳인데, 비라는 현상이 없어져 버린 것 같았다. 아프리카인들은 재생산을 중단했다. 그것 자체는 괜찮은 일이었다. 인구가 늘어나지 않는 덕분에 없는 식량이지만 더 많이 나눠먹을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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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은 첫 출산이 있기 한 달 전까지도 모든 칸카보노 처녀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맨 먼저 임신한 칸카보노 처녀는 그 섬의 첫 토박이가 되는 아이를 낳았는데 사내아이였다. 털북숭이 아키코는 그 아이가 사내아이라는 것을 기뻐해서 ꡐ가미가제ꡑ라는 별명을 지어줘 그 이름으로 통하게 된다. 일본어로ꡐ신의 바람ꡑ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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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정착자들은 한 가족으로 함께 생활하지 않았다. 그러나 첫 세대의 마지막 사람까지 죽은 후의 다음 세대는 모두 한 가족이 된다. 그들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신앙을 공유했고, 함께 즐기는 우스개며 노래며 춤 등도 있었다. 그리고 노인이 된 가미가제는 선장이 되어보지 못한 것, 즉 경애하는 족장이 되었다. 아키코는 경애하는 족장부인이 되었다.

이 과정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마구 골라잡은 유전물질로부터 더없이 응집력이 강한 한 인간 가족이 형성된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 모습이 썩 좋았다. 그 때문에 난 그때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좋아할 뻔까지 했다. 커다란 뇌가 그냥 붙어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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