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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50>

김기협 위원의 SF기획 - 보네거트 작/박웅희 옮김

바다이구아나 침 얘기가 있은 이상 메리와 선장의 관계는 예전과 같을 수 없게 되었다. 백만 년 전에는 인간의 짝이 헤어지는 걸 막는 방법에 대해 커다란 뇌들이 내놓은 수많은 이론이 있었다. 메리가 진정으로 선장과 계속 동거하기를 원했다면 당분간이라도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이 적어도 한 가지는 있었다. 칸카보노 여자들이 강치며 물개들과 섹스를 했다고 둘러대면 될 일이었다. 선장은 곧이들었을 것이다. 그 여자들의 도덕수준을 깔보는 데다가, 인공수정 같은 것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공수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 과정이 아이들 장난처럼 쉬운 일로 확인되었지만.

만다락스 가라사대,

벽을 좋아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

거기에 내가 덧붙인다.

그렇지만 점막을 흠모하는 무엇인가도 존재한다.
― 레온 트로츠키 트라우트(1946∼1001986)

그렇게 둘러댔더라면 선장과의 관계는 계속할 수 있었을 테지만, 가미가제의 푸른 눈에 대해 해명할 필요가 남았을 것이다. 오늘날 열두 명 중 한 명은 선장처럼 푸른 눈에 고수머리 금발이다. 그런 녀석을 만나면 나는 장난삼아 이렇게 말을 걸곤 한다. “구텐 모르겐, 헤어 폰 클라이스트?”“비 게츠 에스 이넨, 프로일라인 폰 클라이스트?” 내가 아는 독일어는 그 정도가 고작이다. 사실 오늘날은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ㆍ ㆍ ㆍ

메리 헵번이 거짓말을 해서라도 선장과의 관계를 지켰어야 했을까? 그 문제는 지금까지도 미결로 남아 있다. 그들은 이상적인 한 쌍은 결코 아니었다. 셀레나와 히사코가 짝을 이루어 아키코를 기르고, 칸카보노 여자애들이 분화구 건너편으로 옮겨가 자기네 신앙과 관습을 지키며 살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이 함께 지내게 되었을 뿐이었다.

칸카보노에게는 동족 외의 사람에게는 이름을 비밀로 하는 관습이 있었다. 나야 물론 누구의 비밀에 대해서나 마찬가지로 그들의 비밀도 알고 있었는데, 이젠 밝혀도 아무 문제 없을 듯하다. 맨 먼저 선장의 아이를 가진 여자애는 신카, 두 번째는 로르, 세 번째는 리라, 네 번째는 미르노, 다섯 번째는 난노, 그리고 맨 마지막이 케엘이었다.

ㆍ ㆍ ㆍ

선장을 떠나 움막을 따로 짓고 깃털 침대도 따로 만든 후, 메리는 선장과 함께 살던 때보다 더 외로워지지 않았다고 아키코에게 말한다. 메리는 선장에게 뚜렷한 불만이 몇 가지 있었다고 말했는데, 관계를 유지하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선장에게 있다면 모두 쉽게 고칠 수 있는 결점들이라고 했다.

메리는 아키코에게 이렇게 훈계했다. “두 사람이 잘 지내려면 함께 노력해야 되는 거야. 한 쪽만이 노력해서는 될 수가 없지. 소용없는 짓이야.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남는 것은 공연히 바보짓을 했구나 하는 후회 뿐이야. 난 한 차례 정말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고, 윌러드가 그렇게 허망하게 가지 않았더라면 또 한 차례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을 거야. 그래서 난 어떻게 하는 건지 알지.”

메리는 선장이 마음만 고쳐먹으면 고칠 수 있었는데도 끝내 고치려 하지 않은 중요한 결점 네 가지를 들었다.

1. 구조될 경우의 계획을 말할 때 메리를 고려하지 않았다.

2. 윌러드 플레밍을 비웃었다. 얼마나 메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인지 알면서다. 그는 윌러드가 교향곡 두 편을 작곡했다는 것, 풍차에 일가견이 있었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스키를 탈 줄 알았다는 사실까지도 의심했다.

3. 메리가 만다락스를 만질 때마다 이런저런 버튼을 누를 때 나는 삑삑대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아주 작은 소리였고, 지성을 가꾸고 명언을 암기하며 새로운 말을 배우는 것이 메리에게 얼마나 보람있는 일이었는지 그도 뻔히 알고 있지 않았는가?

4. “사랑한다”는 말을 하느니 차라리 목매달아 죽을 사람이었다.

“이 네 가지는 맛보기일 뿐이야.” 메리가 선장에게 바다이구아나 침 이야기를 한 것은 이렇게 쌓인 응어리 때문이었다.

ㆍ ㆍ ㆍ

나는 두 사람의 결별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 부양할 아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둘 다 혼자 사는 걸 그리 못 견뎌하지 않았으니까. 아키코가 두 사람을 꼬박꼬박 찾아주었고, 가미가제의 턱수염이 난 후로는 털북숭이 아이들도 데리고 왔다.

ㆍ ㆍ ㆍ

메리는 칸카보노 여자들에게 아이를 갖게 해주고도 그들에게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지 못했다. 그들은 메리가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커다란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메리를 선장만큼이나 두려워했다. 뒷날 그들의 아이들도 그랬다.

그렇게 스무 해가 더 지나갔다. 히사코와 셀레나가 물에 빠져 자살한 지 8년이 되었다. 아키코는 서른아홉의 원숙한 여인으로, 가미가제의 털북숭이 사내아이 둘과 털북숭이 여자아이 다섯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만다락스의 도움 없이도 영어, 일어, 칸카보노어, 세 가지 언어를 유창하게 했다. 그녀의 아이들은 영어 낱말 둘, ‘그랜파’와 ‘그랜마’를 제외하고는 칸카보노 말밖에 몰랐다. 아키코가 선장과 메리 헵번을 그렇게 부르도록 가르친 것이었다. 아키코 자신도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

ㆍ ㆍ ㆍ

어느 날 아침, *만다락스에 따르면 2016년 5월 9일 오전 7시 30분, 아키코가 새벽같이 *메리를 깨우더니 *선장을 찾아가 화해하라고 권했다. *선장의 병이 깊어서 어쩌면 그 날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전날 밤 *선장을 찾아갔던 아키코는 아이들을 집으로 보내놓고 밤새 그를 보살폈다. 실제로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아키코의 권유에 못 이겨 *메리는 *선장을 찾아갔다. 그녀 자신도 이젠 한물 간 나이였다. 여든이었으니. 이도 다 빠지고 없었다. 그녀의 척추도 물음표 모양으로 휘어 있었는데, *만다락스에 따르면 골다공증 증세였다. 사실 *만다락스에게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메리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뼈도 골다공증 때문에 마른 갈대잎처럼 바삭바삭해졌었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또 한 가지 유전적 결함이었다.

*선장의 증세를 놓고 *만다락스는 알츠하이머병이라는 유식한 진단을 내렸다. 멍청한 노인은 제 한 몸 건사할 능력도 없고, 자기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아키코가 날마다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조금이나마 삼키도록 도와주지 않았던들 필시 굶어죽었을 것이었다. 그의 나이 여든여섯이었다.

*만다락스 가라사대,

이 파란만장한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기다리고 기다렸던 마지막 장면은
이빨도 시력도 입맛도, 모두가 사라져버린
제2의 유아기, 순수한 망각이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

*메리는 허리가 잔뜩 굽은 몸으로 한때 자기 집이기도 했던 *선장의 움막 속으로 발을 질질 끌며 들어갔다. 20년 만이었다. 깃털로 만든 지붕은 *메리가 떠난 후 여러 번 바뀌었다. 지붕을 떠받치는 망그로브 기둥과 서까래, 그리고 깃털 침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얼개는 똑같아서, 살아 있는 망그로브 나무들 사이로 바다가 그대로 내려다보였고, 아주 오래 전 ‘펄럭이는 커튼’이 얹혔던 모래톱이 액자의 그림처럼 시야에 걸려 있었다.

그 모래톱에서 ‘펄럭이는 커튼’을 마침내 끌어내린 것은 고물에 고인 빗물과 바닷물이었다. 바닷물은 스크루 축의 틈새를 통해 새어든 것이었다. 배가 미끄러져 내려간 것은 밤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펄럭이는 커튼’이 3천 미터 밑 해신(海神)의 창고를 향해 ‘세기의 자연 유람’ 마지막 여정에 오르는 것을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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