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갈라파고스<51>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갈라파고스<51>

김기협 위원의 SF기획 - 보네거트 작/박웅희 옮김

*선장의 집 바깥의 모래톱은 분명 애처로운 역사의 현장이었다! 나는 그가 날마다 그 모래톱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 뜻밖이었다. 함께 내세로 통하는 푸른색 터널을 찾아 나선 *히사코 히로구치와 앞 못 보는 *셀레나 매킨토시가 손을 잡고 걸어 들어간 곳도 바로 그 모래톱이었다. *셀레나는 그때 마흔여덟으로 아직 가임기(可妊期)였다. *히사코는 쉰여섯, 배란이 끊긴 지 꽤 오래였다.

아키코는 아직도 그 모래톱을 보면 마음이 편치 못했다. 자기를 길러준 두 여인의 자살에 대해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만다락스는 두 사람의 죽음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보이는 *히사코의 극단적이고 치유 곤란한 우울증 탓이라고 확언했지만.

그러나 아키코를 끈질기게 괴롭힌 사실은 자신이 딴 살림을 차린 직후에 *히사코와 *셀레나가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아키코는 그때 스물둘이었다. 가미가제는 아직 어린애였으므로 아무 관련이 없었다. 아키코는 그냥 혼자 살았고, 그것이 무척 좋았다. 사람들이 대개 둥지를 떠나는 나이를 충분히 넘겼으므로 나는 아키코의 독립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아키코가 성숙하고 유능한 여인이 된 한참 후까지 *히사코와 *셀레나가 애 취급을 하는 것이 얼마나 그녀에게 고통스러웠는지도 봤다. 아키코는 정말로 오랫동안 잘 참아냈다. 자신이 무력했을 때 그들이 베풀어준 모든 것에 대해 정말로 고맙게 생각한 때문이었다.

곧이들릴지 모르겠지만, 아키코가 떠나던 날까지도 두 여인은 그녀에게 부비새 고기를 썰어주고 있었다. 그 후 한 달 동안 두 여인은 고기를 썰어 놓은 식탁에 아키코의 자리를 마련해 놓고 마치 아키코가 거기 앉아 있기라도 하듯 말을 걸기도 하고 놀리기도 하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삶이 진정 더 살 가치가 없게 된 날이 찾아온 것이었다.

ㆍ ㆍ ㆍ

임종 자리의 *선장을 찾아갈 당시 *메리 헵번은 갖가지 병에 시달리면서도 여전히 자기 앞을 가리며 살고 있었다.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구해 요리했고, 집안은 늘 깔끔하게 정돈했다. *메리가 이것을 자랑스럽게 여긴 것은 그럴 만한 일이었다. *선장은 공동체의 짐, 정확히 말해 아키코의 짐이었다. 그러나 *메리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종종, 행여 자신이 누군가의 짐이 될 것 같으면 히사코와 셀레나의 뒤를 따라 그 모래톱 아래로 내려가 바다 밑바닥에서 두 번째 남편과 상봉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메리의 발과 응석받이 *선장의 발은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겪어온 생활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선장의 발은 희고 부드러웠다. *메리의 발은 그녀가 지난날 과야킬에 가져왔던 암벽등반화만큼이나 튼튼해 보이는 흑갈색이었다.

20년 동안 말을 않고 지내던 남자에게 *메리가 말을 건넸다. “편찮으시다고 들었어요.”

사실 *선장의 훤한 풍채는 여전했다. 아키코가 매일 목욕도 시켜주고, 머리와 턱수염까지 빗질해준 덕분으로 깨끗하고 말쑥한 상태였다. 아키코가 사용한 비누는 곱게 빻은 뼛가루를 펭귄 기름에 섞어 칸카보노 여인들이 만든 것이었다.

*선장의 병에서 약오르는 사실은 몸 자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몸은 *메리의 몸보다 훨씬 튼튼했다. *선장으로 하여금 오랜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고, 제 몸을 더럽히고, 음식을 먹지 않는 따위의 행동을 시킨 것은 쇠약해진 그의 커다란 뇌였다.

그런 행태는 산타 로살리아 섬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본토에서도 수많은 노인들이 아기들처럼 무력해져서 아키코처럼 인정 많은 젊은이들이 돌봐주어야 했다. 오늘날엔 백상어와 범고래 덕분에 노화와 관련된 걱정거리는 전혀 없다.

ㆍ ㆍ ㆍ

“이 할망군 누구지?” *선장이 아키코에게 물었다. “난 못생긴 여잔 질색이야. 이렇게 못생긴 여잔 처음 보는구나.”

“*메리 헵번 할머니세요. 플레밍 여사 말예요, *메리 할머니를 모르시겠어요?” 아키코가 대답했다. 그녀의 털북숭이 뺨 위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생전 처음 보는 여자야. 나가라고 해. 눈 감고 있을께. 다시 뜰 때 저 여자 없어야 돼.” 선장은 눈을 감고 나직이 수를 세기 시작했다.

아키코는 *메리의 여윈 오른팔을 잡으며 말했다. “아, 할머니! 할아버지가 이렇게 되실 줄 몰랐어요.”

*메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옛날에 이 꼴보다 좋았던 적 있었더냐?”

*선장은 계속 수를 세고 있었다.

5백 미터쯤 떨어진 샘 쪽에서 득의에 찬 사내의 외침과 여인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내의 외침소리는 이 섬에서 귀에 익은 것이었다. 그 외침은 가미가제가 누군가 여자 하나를 붙잡았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곧 그들이 섹스를 시작할 것임을 모두에게 알리는 습관이었다. 당년 열아홉으로 아직 섹스의 황금기를 벗어나지 않은 가미가제는 경쟁자가 아무도 없는 섬 안에서 아무 때나, 아무하고나, 아니 아무 것하고나 거리낌없이 붙어먹었다. 자기 짝의 드러낸 부정(不貞), 그것은 아키코가 견뎌야 했던 또 하나의 고통이었다. 그녀는 진정 성녀 같은 여성이었다.

가미가제가 샘가에서 붙잡은 여자는 숙모뻘인 미르노로, 가임연령을 지난 여자였다. 그래도 섹스를 하는 데는 상관없었다. 전에는 강치나 물개하고도 섹스를 했다. 아키코가 자기를 위해 제발 그 짓만은 그만둬 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가미가제의 애를 밴 강치나 물개는 없었는데, 그것은 어느 면에서 애석한 일이었다. 만약 그쪽에 수태가 되었더라면 인간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진화하는 데 백만 년까지 걸리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하면, 사실 서두를 필요가 뭐 있었겠는가?

ㆍ ㆍ ㆍ

*선장이 눈을 뜨고 *메리에게 말했다. “왜 안 갔지?”

“아, 제게 신경쓰지 마세요. 전 10년 동안 함께 살았던 여자일 뿐이에요.”

그때 저만큼에서 칸카보노 여인 리라가 칸카보노 말로 아키코에게 아키코의 네 살배기 아들 오얼론의 팔이 부러졌다고, 그러니 얼른 집에 가보라고 소리쳤다. 리라는 *선장 집에는 그 이상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았다. 아주 나쁜 마법에 걸린 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키코는 되도록 빨리 돌아오겠다고 다짐하며 자기가 집에 다녀올 때까지 *선장을 좀 봐달라고 *메리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선장에게 말했다. “얌전히 구셔야 해요. 약속하죠?”

그가 약속했다. 아주 못마땅한 목소리로.

ㆍ ㆍ ㆍ

*메리는 *선장이 어제 낮부터 밤까지 몇 차례나 혼수상태에 빠진 원인이 무엇인지 진단해 달라는 아키코의 부탁으로 *만다락스를 가져왔었다.

그런데 *메리가 그 기계를 꺼내자 *선장은 한 마디 질문도 꺼내기 전에 실로 놀라운 행동을 보여주었다. 기계를 낚아채더니 언제 아팠냐는 듯이 벌떡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이 빌어먹을 것! 세상에서 제일 보기싫은 물건이야!” 그리고는 비틀비틀 바닷가로 내려가 무릎까지 잠기는 물을 헤치고 모래톱으로 향했다.

가엾은 *메리가 뒤쫓았으나, 그녀의 몸 상태로 그렇게 큰 사내를 제지하기란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가 모래톱 바깥 수심 3미터쯤 되는 곳에 *만다락스를 던져 넣는 걸 하릴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모래톱의 경사가 바다이구아나의 등처럼 가파른 곳이었다.

*메리의 눈에 물 속의 *만다락스가 보였다. 죽을 때 아키코에게 물려주겠다고 약속한 그 귀중한 물건이 물 속에 잠겨 있었다. 씩씩한 노부인은 지체 없이 물에 뛰어들었다. 한 손이 만다락스에 닿았다. 그 순간 커다란 백상어가 그녀와 *만다락스를 한꺼번에 삼켜버렸다.

ㆍ ㆍ ㆍ

*선장은 기억장애 탓에 핏물이 왜 퍼지고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새들이 자기에게 달려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종기에서 피를 빨아먹으려고 달려들 뿐, 위험이 전혀 없는 흡혈 핀치로, 그 섬에 흔한 새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낯설고 무서운 존재로 보였다.

*선장은 새들을 손바닥으로 쳐대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점점 더 많은 핀치들이 날아들었고, 그는 새들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확신한 나머지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백상어가 그를 잡아먹었다. 백상어의 눈은 대롱 끝에 달려 있는데, 몇백, 몇천만 년 전에 ‘자연선택의 법칙’에 따라 완성된 작품이다. 우주의 구조 속에 완전무결한 작품의 하나인 이 바다동물에게는 수정이 필요한 결점이 없었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더 큰 뇌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백상어에게 뇌가 더 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베토벤 9번 교향곡이라도 작곡하겠단 말인가? 이런 글줄이라도 써야겠단 말인가?

온 세상은 하나의 무대,
모든 인간은 그 위의 배우일 뿐.
등장할 때가 있고 퇴장할 때가 있는데,
한 사람이 여러 역을 맡을 수가 있으리?
―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