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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작가들의 꿈, 그 특별한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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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작가들의 꿈, 그 특별한 욕망

[김이석의 올드 & 뉴] 김대우의 <음란서생>과 프랑수아 오종의 <스위밍풀>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는 '알바트로스'라는 시에서 시인을 '천상의 왕이자 지상의 불구자'로 정의하였다. 일상에서는 금치산자 선고를 받았던 최고 시인의 마지막 자존심을 엿볼 수 있는 이 시구에는 시인, 넓은 의미에서는 작가를 일반인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였던 당대의 사고가 담겨있다. '천재'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쏟았던 낭만주의 시대에 두드러지게 발전된 이런 작가 개념은 영화에서도 '작가주의'나 '예술영화' 등의 표현 속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작가의 죽음이 화두가 되고 있는 오늘날 낭만주의적 정서에 근거한 작가 개념은 지난날에 비해 상당히 퇴색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의 사람이 가진 일종의 특별함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임에 분명하다. 김대우의 <음란서생>과 프랑수아 오종의 <스위밍 풀>은 창작과 관련된 작가들의 특별한 욕망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다. . 은밀한 욕망에 사로잡힌 작가들 김대우 감독의 <음란서생>은 사대부 출신의 한 관원이 음란소설의 작가가 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룬 코믹 추리물이다. 사헌부 소속 관원이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기도 한 윤서(한석규)는 왕실에서 유출된 그림의 행방을 추적하던 중 우연히 한 권의 음란소설을 접하게 된다. 남녀간의 은밀한 행위를 묘사한 그 소설을 접한 윤서는 그 책의 난잡함에 크게 충격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알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흔들리던 윤서를 더욱 혼돈에 빠뜨린 것은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 정빈(김민정)이었다. 금지된 욕망의 대상인 정빈의 등장으로 인해 더욱 격렬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 윤서는 끝내 자신과 정빈과의 관계를 소재로 한 음란소설을 발표하게 된다. 금기에 대한 욕망의 해소로서 시작된 글쓰기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윤서는 점점 작가로서의 욕망에 충실하게 된다. 이제 사대부의 체통이나 은밀한 연애의 달콤함 따위는 '진맛'이 살아있는 최고의 음란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망 앞에서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만다.
프랑수아 오종의 <스위밍 풀>(2003) 역시 은밀한 욕망에 사로잡힌 작가의 모습을 그린 영화다. 범죄소설 작가인 영국인 사라 모튼은 새로운 작품의 구상을 위해 출판사 편집장의 별장을 찾는다. 남불의 쾌적한 기후와 별장의 아늑한 분위기는 슬럼프에 빠진 그녀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듯하다. 그러나 이 평온함은 어느 날 갑자기 별장에 나타난 편집장의 딸 줄리로 인해 깨지고 만다. 젊은 프랑스 여성 특유의 활력을 가진 줄리는 사라의 존재는 아랑곳없이 매일밤 남자를 갈아치우며 하루하루를 즐기며 산다. 한편 사라는 평온한 일상을 깨뜨린 줄리에게 맹렬한 분노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의 존재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줄리와 자신의 관계를 소재로 한 소설에 착수하게 된다. 음란소설의 세계에 빠져든 사대부 윤서와 자유분방한 프랑스식 여인의 삶에 이끌린 영국인 사라는 자신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이질적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이전까지 자신들을 지탱해왔던 것들을 송두리째 포기하는 자들이다. '꿈꾸는 것 같은 것, 꿈에서 본 것 같은 것, 꿈에서라도 맛보고 싶은 것'을 글로써 표현하기 위해 윤서는 자신의 정적(政敵)인 의금부도사 광헌(이범수)을 끌어들이고, 목숨을 건 정빈의 연정마저도 작품을 위해 희생시킨다. 젊은 여인의 생기에 사로잡힌 고상한 영국인 소설가 사라 역시 줄리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그녀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마침내는 그녀의 공간과 그녀의 삶의 방식을 흉내내기까지 한다. 자신만의 '진맛'을 표현하기 위한 윤서와 사라의 선택은 대단히 치명적이다. 비록 피곤에 절은 왕의 결정 덕분에 윤서는 목숨을 건지게 되지만 죄값을 대신 치룬 조내관의 죽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음란한 사대부의 선택은 자기 목숨뿐만 아니라 삼족의 운명을 건 모험이었다. 줄리의 이질적인 삶에 개입한 사라의 선택 역시 그녀가 은근히 마음을 두었던 남자를 죽음으로 내몬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되돌아보는 일 없이 자신들의 욕망을 완전하게 구현하는 일에 몰두한다. 사라는 줄리와 함께 프랭크의 시체를 묻을 구덩이를 파고 윤서는 귀향지에서 새로운 음란소설을 구상한다. . 창작의 즐거움, 카타르시스 윤서와 사라의 제어할 수 없는 창작욕은 위험한 것이면서 동시에 해방과 정화의 도구이기도 하다. 소심한 선비 윤서는 음란소설을 쓰는 과정을 통해 강하고 의지적인 남자로 새롭게 태어나며, 고리타분한 중년의 소설가는 창작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새로운 인간으로 변모한다. 왕 앞에서 담담하게 최후의 변을 진술하는 윤서의 모습, 위선적인 편집장 앞에 자신의 새 작품을 내놓은 후의 사라의 편안한 얼굴은 그들이 창작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났음을 말해주는 장면들이다. 창작욕과 관련해서 이 두 편의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은 작가의 조력자를 자처하는 존재들이다.
<음란서생>의 의금부도사 광헌과 <스위밍 풀>의 줄리는 처음에는 작가들과 대척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작가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작품에 개입하게 된다. 음란한 삽화를 그려달라는 윤서의 제안을 받은 직후 불같이 화를 내던 광헌은 결국 윤서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위해 정빈을 농락하는 모략에 동참하게 될 뿐만 아니라 윤서가 죽음의 위기에 내몰리게 되자 목숨을 걸고 결투를 벌이기도 한다. <스위밍 풀>의 줄리 역시 고리타분한 영국인 소설가의 존재에 거부감을 보이지만, 나중에는 사라의 소설을 위해 프랭크를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등 적극적인 조력자로 돌변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광헌은 화가로서 자기 욕망을 실현하게 되고, 줄리는 소설가를 꿈꾸던 친모의 대리자로서 그 욕망을 실현시키게 된다. <스위밍 풀>에서 줄리는 사라에게 '작가들이란 온갖 추접한 것들을 다 써놓으면서 겉으로는 고상한 척 하는 사람들'이라고 독설을 퍼붓는다. 사실이다. 그런데 이 두 편의 영화에서 간접 배설의 과정은 인간들이 자신의 일그러진 욕망을 해소하는 중요한 방법이며, 자기파괴적인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통로이기도 하다. 윤서와 사라뿐만 아니라 엘렉트라 콤플렉스에 사로잡혀있던 줄리, 초자아의 권위에 억압받던 광헌 모두 창작의 과정에 개입함으로써 치유되고 정화된다. 그들은 모차르트나 보들레르와 같은 '천상의 왕자'의 자리에 오르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평범한 살리에리들은 창작을 통해 생의 평온함을 회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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