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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에 대한 두 개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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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에 대한 두 개의 그림

[김이석의 올드 & 뉴] 제임스 맥티그의 〈브이 포 벤데타〉와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7)에서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시리즈 (1999-2003)에 이르기까지 영화인들은 기계문명과 미래 사회에 대한 근심을 표현해왔다. 특히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는 인간 사회가 매트릭스가 만들어 낸 환영이며, 인간들은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통제된 삶을 살아가는 예속적인 존재라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는다. 매트릭스에 맞서 싸우는 게릴라 집단의 우두머리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매트릭스의 실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매트릭스는 사방에 있어. 지금 바로 이 방에도 있고, 창밖을 내다봐도 있고, TV를 켤 때도 있지. 출근할 때도, 교회에 갈 때도, 세금을 낼 때도 그게 느껴지지. 그것은 바로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자네의 눈을 가리고 있는 세계일세." 모든 것이 통제되는 파시즘적 사회에 대한 근심과 공포는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조연출을 담당하였던 제임스 맥티그 감독의 <브이 포 벤데타>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2040년, 제 3차 세계대전으로 몰락한 미국의 뒤를 이어 영국이 세계의 패권국으로 등장한다. 절대권력을 손에 넣은 파시스트 셔틀러는 감시와 처벌을 통해 국민들을 통제한다. 미디어를 통한 감시와 세뇌작업이 일상화되고 소수자들은 아우슈비츠를 닮은 수형소로 끌려간다. 철저하게 통제된 삶을 살면서도 사람들은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매트릭스가 만들어 낸 환영과 다를 바 없는 이 도시에 한 이단자가 나타난다. V라는 이름과 가이 포크스의 가면으로 자신을 위장한 이 남자는 초인적인 힘과 지략으로 지배세력에 맞선다. 법원을 폭파하고 방송국을 점거하는 게릴라식 투쟁을 통해 V는 자신의 동조세력을 규합해나간다. 방송국 말단 직원인 이비(나탈리 포트만)는 우연한 기회에 V를 알게 된 이후 그의 투쟁에 동참하게 된다. V의 투쟁은 무력한 인간들을 각성시키고, 견고한 셔틀러의 제국에 혁명의 기운이 감돌게 된다. 조지 오웰류의 폐쇄사회에 맞서는 초인의 영웅담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에서 제임스 맥티그는 그의 영화적 스승인 워쇼스키 형제의 전략을 그대로 차용한다. 만화적 상상력과 풍성한 시각 효과 그리고 디스토피아적 비전 등은 이 영화와 <매트릭스>와의 친족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이런 비전과 상상력이 워쇼스키 사단의 전유물은 아닐 터이다.
브이 포 벤데타 ⓒ프레시안무비
영화사는 또 한 편의 이질적이고 기이한 영화 한 편을 기록해놓고 있다. 바로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1985, 국내출시명 <여인의 음모>)이다. 어느 가까운 미래. 이곳 역시 모든 것이 통제되고 감시받는 조지 오웰류의 사회다. 정보국 말단 직원으로 일하는 샘은 언젠가부터 한 여인의 꿈을 반복해서 꾸게 된다. 어느 날 꿈속의 여인을 실제로 만나게 된 샘은 그녀에게 애정을 느낀다. 하지만 그 환상의 여인은 꿈속에서와는 달리 반정부주의 운동을 하는 트럭운전사이다. 그녀가 위험에 처해있음을 알아차린 샘은 그녀를 위해 국가의 정보를 조작한다. 그럼으로써 소심한 성격의 말단 공무원 샘은 자연스럽게 반정부주의 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
이 두 편의 영화는 모두 폐쇄적인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 인류의 투쟁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상당히 대조적인 양상을 보인다. 두 영화 모두 만화적인 상상력에 기반한 프로덕션 디자인을 배경으로 반체제적 주인공을 등장시키고 있지만 제임스 맥티그의 <브이 포 벤데타>의 V와 이비가 영웅적 캐릭터인 반면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의 주인공, 샘과 질 그리고 터틀(로버트 드 니로)은 철저하게 반영웅적인 캐릭터들이다. 초인적인 힘과 지혜 그리고 카리스마를 갖춘 V나 그의 세계를 이어받은 이비가 반군의 지도자로서 요구되는 덕목을 고루 갖춘 이상적인 영웅이라면 소심한 공무원 샘과 어설픈 테러리스트 터틀과 그의 반군집단은 실소를 자아내게 만드는 평균 이하의 인물들이다. <매트릭스>의 복제아인 <브이 포 벤데타>가 메시아적인 절대존재를 앞세운 성전을 장엄한 스펙타클로 마무리하는 반면 <브라질>의 투쟁은 별볼일없는 인간들의 몸부림으로 마무리된다. 워쇼스키 사단의 영화적 매력이 놀라운 시각적 경험에 있다면 테리 길리엄 감독의 영화적 매력은 종횡무진으로 치닫는 기발한 상상력에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테리 길리엄 감독은 특유의 무정부주의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체제에 맞서는 반정부세력마저도 무차별적으로 풍자하고 희화화하는 테리 길리엄의 영화는 워쇼스키 사단 특유의 수많은 인용구들마저도 지루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독특한 힘을 가지고 있다.
브라질 ⓒ프레시안무비
끝을 헤아리기 어려운 테리 길리엄의 유희정신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잘 드러난다. 초기의 <몬티 파이튼>시리즈로부터 <브라질>, <피셔 킹>, <12 몽키스>,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 그리고 최근의 <그림 형제>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적 행보는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운 양상을 보인다. 전설, 이데올로기, 장르의 법칙 등 모든 것이 유희의 대상이 되는 그의 영화세계는 때때로 자기 분열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이기도 하다. 이처럼 어지럽게 펼쳐진 그의 영화세계를 일관할 수 있는 하나의 특징을 찾는다면 무정부성일 것이다. 모든 것들이 한판의 놀이 혹은 하룻밤의 꿈으로 해석될 수 있는 <브라질>은 그의 끝없는 유희정신과 극단적인 무정부성의 실체를 확인시켜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여전히 짜릿한 감각적 쾌감을 안겨주는 워쇼스키 사단의 <브이 포 벤데타>에 비해 20년 전에 만들어진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이 더 참신하게 느껴지는 것은 테리 길리엄의 끝없는 유희정신이 조작된 가치들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그것들을 지속적으로 탈신화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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