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가 처음 관객들 앞에서 상영된 순간의 의미를 타르코프스키는 '인간이 처음으로 직접적으로 시간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된 순간'이라고 설명하였다. 기존의 조형예술과는 달리 운동의 실제적 포착을 가능하게 만든 영화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시간의 문제를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초기에 영화적 시간에 대한 관심은 영화의 모사적 기능에 초점이 맞추어졌으나 기술적, 미학적 발전과 더불어 시간성에 대한 관심은 좀더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단 하나의 쇼트로 이루어진 영화는 영화적 시간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진 감독들에게는 일종의 이상형과도 같은 것으로 인식되게 된다. 영화사를 살펴보면 알프레드 히치콕이나 앤디 워홀처럼 편집이 완전히 배제된 독특한 형식의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들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테오 앙겔로풀루스, 차이 밍량, 허우 샤오시엔의 작품들처럼 길게는 10분 가량 이어지는 플랑-세캉스 (하나의 쇼트를 시퀀스만큼이나 길게 촬영하는 기법) 기법이 사용된 영화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비교적 최근 작품들 중에서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2002)나 송일곤의 <마법사들>(2005)은 영사시간과 촬영시간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다시 말해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카메라를 멈추지 않고 촬영한 형식적 파격성으로 인해 주목을 끄는 작품이다.
. 하나의 쇼트로 완성된 영화 <마법사들>과 <러시아 방주> 2005년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3인 3색 프로젝트'에서 출발한 송일곤의 <마법사들>은 자살한 기타리스트 자은을 추모하기 위해 다시 모인 '마법사' 밴드의 이야기를 하나의 쇼트로 완성한 영화다. 어두운 숲 속. 어지럽게 얽힌 나뭇가지 사이로 멀리 한 여인이 나타난다. 숲을 가로질러 걸어 온 그녀가 마술처럼 하늘로 날아오르면서 <마법사들>은 시작된다. 오늘은 록 밴드 '마법사'의 기타리스트인 자은이 자살한 지 3주년이 된 날. 살아남은 밴드의 멤버들이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재성의 카페로 모인다. 연인이었던 자은의 자살 이후 외딴 산골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살아가는 재성,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날 결심을 한 명수, 자은의 자살 이후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된 하영, 그리고 혼백이 되어 다시 옛멤버들을 찾아 온 자은. 죽은 자나 살아남은 자나 모두 상처투성이의 영혼을 가진 그들은 깊은 산 속에서 지나간 시간을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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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 <광대들의 꿈>(1996)과 장편영화 <꽃섬> (2001), <거미숲>(2004), <깃>(2004) 등을 통해 연극성과 시간성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드러내곤했던 송일곤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연극적 구성과 4차원적 시간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어둠과 빛의 강렬한 대비, 허구적 공간과 현실적 공간의 충돌, 실재하는 인물과 혼백으로 남은 인물의 만남 등을 통해 송일곤 감독은 마술같은 90분을 창조한다. 4차원적인 시간성을 2차원적 평면 위에 펼쳐놓으려는 송일곤 감독의 시도는 이보다 조금 앞서 알렉산더 소쿠로프 감독에 의해서도 시도된 바 있다. 2002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이었던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는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무대로 화려했던 귀족사회의 예술 세계에 대한 향수를 그린 영화로 역시 하나의 쇼트만으로 완성된 영화다. 장편 데뷔작인 <외로운 인간의 목소리>(1979)와 <일식>(1988), <속삭이는 이야기>(1993), <어머니와 아들>(1997), <몰로흐>(1999) 등의 장편 극영화들과 <대령의 고백>, <마리아>(1988) 등의 다큐멘타리 영화에서 독창적인 영화세계를 선보였던 소쿠로프의 영화는 수차례의 옵티컬 작업을 거쳐 얻어지는 회화적 색채감과 삼차원적 공간감 대신 평면성을 강조한 독특한 화면구성, 한없이 긴 침묵과 부동의 플랑-세캉스로 특징지을 수 있다. 특히 윤곽선이 거의 지워진 인물들이 뒤틀린 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그의 극영화는 독일 낭만주의 화가 프리드리히의 작품을 보는 것처럼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 그의 독특한 시간관은 <러시아 방주>에서도 잘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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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 ⓒ프레시안무비 |
송일곤의 <마법사들>과 마찬가지로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4차원의 시간 구조를 가진 이 영화에서 감독은 러시아 제국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에르미타쥬 박물관을 순례하는 화자의 눈과 목소리를 빌어 박제가 되어버린 18세기 귀족문화에 대한 향수와 물상화된 사회 속에 내던져진 길잃은 예술가의 고통을 비감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일상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떨어져나온 화자와 안내자가 육중한 박물관의 문을 하나하나 열어젖히면서 펼쳐지는 낯선 시간여행 속에서 관객들은 박제화된 과거의 존재들이 눈앞에서 되살아나는 놀라운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 원 쇼트 영화를 가능케한 주인공은 디지털 장비 송일곤과 소쿠로프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을 찾는다면 바로 디지털 장비일 것이다. 실제 시간과 촬영시간이 일치하는 플랑-세캉스 기법의 원형은 발생기의 영화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의 발명가로 알려진 뤼미에르 형제와 에디슨이 만든 대부분의 영화들이 거의 쇼트 구분 없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편집 없는 영화를 만들고자했던 히치콕과 워홀의 시도는 일종의 영화적 원형의 복원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어떤 감독도 소쿠로프나 송일곤과 같이 완벽하게 하나의 쇼트로 구성된 영화를 완성하지는 못했다. 알프레도 히치콕은 50여년 전에 하나의 쇼트로 이루어진 영화 <로프>(1948)를 만들었지만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애초의 의도를 완전히 구현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1시간 반 분량의 영화를 연속적으로 찍을 수 있는 필름이 존재하지 않았다. (히치콕은 이 영화를 18일 동안 촬영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조명과 촬영장비의 문제점 때문에 영화의 공간을 연극 무대처럼 한 공간으로 한정할 수밖에 없었다. 디지털 장비의 등장은 히치콕이 누리지 못한 자유를 송일곤과 소쿠로프에게 허락해주었다. 디지털 카메라와 디지털 저장매체는 원하는 길이만큼 충분히 촬영을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으며, 스태디캠 장비와 밝은 렌즈 덕분에 공간적인 제약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구석구석 누비고 다니는 소쿠로프의 영화와 세트 안팎을 자유롭게 오가는 송일곤의 영화는 디지털 장비의 도움이 없었다면 구현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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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방주 ⓒ프레시안무비 |
일찍이 앙드레 바쟁은 현실적 시간의 흐름을 존중하는 플랑-세캉스가 리얼리티를 구현함에 있어서 탁월한 형식임을 지적한 바 있다. 바쟁이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네오-리얼리스트들의 영화 속에서 플랑-세캉스 기법은 현실의 이면과 표면을 골고루 비추는 투시경과 반사경의 역할을 담당했다. 송일곤과 소쿠로프의 영화는 전통적인 플랑-세캉스의 의미를 확장시킨다. 다양한 시간의 차원들을 하나의 평면 위에 펼쳐놓는 그들의 영화 속에서 플랑-세캉스는 현실성의 총체적인 재현을 가능하게 하는 기법일 뿐 아니라 영화가 도달가능한 형식미의 이상적 형태로 제시된다. 완전한 시간의 지배를 꿈꾸는 그들의 영화는 기술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극단의 지점을 향하고 있다. 이 극단적인 실험성이야말로 그들의 영화가 아름다운 이유일 것이다.
. 덧붙임 안타깝게도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영화는 국내에서 개봉되지도 않았으며 DVD로 출시되지도 않았다. 현재까지 국내에서 그의 영화를 합법적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국제영화제를 이용하는 방법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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