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손 웰즈의 1957년 작 <컨피덴셜 리포트 Confidential Report>(<미스터 아카딘 Mr. Arkadin>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졌다)는 다음과 같은 일화로 시작한다.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 시인에게 묻는다. "내가 가진 것 중에서 무엇을 너에게 줄까?" 지혜로운 시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무 것이나 좋습니다. 당신의 비밀만 제외하고..." 베넷 밀러의 <카포티 Capote>(2005)와 오손 웰즈의 <컨피덴셜 리포트>의 주인공들은 불행히도 이 시인만큼 지혜롭지는 못했다. 그들은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일인지 알지 못한 채 상대의 비밀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블레이크의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의 원작자이기도 한 트루만 카포티는 캔자스 주의 한 농장에서 벌어진 일가족 살인사건에 흥미를 느낀다. 놀라운 기억력과 뛰어난 문장력, 화려한 언변과 냉소적 기질을 갖춘 트루만 카포티는 자신이야말로 이 충격적인 사건의 이면을 파헤칠 적임자라고 확신한다. 과연 그는 뉴욕의 지식인들을 쩔쩔매게 만들곤 했던 그 솜씨로 연쇄살인범의 호감을 얻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자신이 캐내기를 원했던 비밀의 원천을 향해 서서히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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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드러나는 것은 엽기적인 사건의 진상이 아니라 무너져버린 카포티의 영혼의 풍경이다. 이 냉소적인 작가의 영혼에 심각한 상흔을 남긴 것은 다름 아닌 연쇄살인범 페리다. 카포티는 이 심약하면서 불안정한 정신을 가진 연쇄살인범에게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한 집에서 자라서 뒷문으로 나간 자와 앞문으로 나간 자'라는 카포티 자신의 표현이 말해주듯 카포티가 밝혀낸 비밀은 그와 페리가 일종의 '지킬과 하이드' 혹은 '도리언 그레이와 헨리 워튼'과 같은 관계라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페리의 고통은 카포티의 고통이 된다. 무너져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카포티는 페리의 사형이 속히 집행되기를 바란다. 페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카포티에 대한 기대를 간직하지만 카포티는 그가 내민 손길을 거부한다. 마침내 페리는 카포티의 바람대로 사형대에 오른다. 하지만 카포티는 끝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킬이나 도리언 그레이와는 달리 카포티는 그의 분신이 죽은 이후에도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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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포티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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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이라는 주제를 즐겨 다룬 감독으로는 오손 웰즈를 들 수 있다. <시민 케인>(1941)을 비롯하여 <이방인>(1946), <상하이에서 온 여인>(1948), <컨피덴셜 리포트>(1957), <악의 손길>(1958) 등과 같은 그의 대표작들은 모두 비밀, 거짓말, 권력, 몰락, 기억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컨피덴셜 리포트>는 웰즈의 유럽 망명 시절 대표작 중 하나로 <맥베드>(1948)와 <오델로>(1952) 등 셰익스피어 작품의 영화화에 몰두하던 오손 웰즈가 오랜만에 자신의 전통적인 테마로 복귀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당시 웰즈는 매카시즘의 광풍에 휩싸인 미국을 떠나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컨피덴셜 리포트> 역시 프랑스와 독일, 영국, 스페인 등 유럽 자본으로 제작되었다. 가이 스트라텐은 죽어가는 탈옥수를 도와준 대가로 아카딘이라는 이름을 듣게 된다. 그레고리 아카딘이 스페인에 살고 있는 수수께끼의 갑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스트라텐은 막연한 기대에 부풀어 이 인물에게 접근한다. 그런데 자신의 비밀을 캐내려고 접근한 스트라텐에게 아카딘은 도리어 기억상실증에 걸린 자신의 과거를 밝혀달라고 부탁한다. 아카딘의 갑작스런 제안에 당혹해하던 스트라텐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프랑스, 네덜란드, 멕시코 등을 돌며 아카딘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스트라텐이 만난 사람들이 하나씩 살해되면서 스트라텐은 자신이 함정에 빠져들었음을 깨닫게 된다. 아카딘은 스트라텐을 이용해서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지워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스트라텐은 아카딘을 목표로 삼고 그에게 접근했지만 도리어 그가 아카딘의 사냥감이 되어버린 것이다. 스트라텐은 사력을 다해 아카딘의 총부리를 벗어나는 데 성공하지만 이 사냥게임을 재역전시키지는 못한다. 사냥감을 놓쳐버린 아카딘은 그의 생존에 대한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남겨놓은 채 사라져버린다. <컨피덴셜 리포트>는 여러 면에서 웰즈의 데뷔작인 <시민 케인>을 연상하게 만드는 영화다. 비밀을 간직한 권력자는 바벨탑을 연상시키는 그들의 거대한 저택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간다. 누군가 이 권력자의 수수께끼를 풀어보려 도전하지만 오히려 더 커다란 수수께끼 혹은 더 커다란 위험에 직면할 뿐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웰즈는 그의 인물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유보시킴으로써 그의 영화를 일종의 모호함 그 자체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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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피덴셜 리포트 ⓒ프레시안무비 |
<카포티>와 <컨피덴셜 리포트>에 대해 말하면서 이 영화의 주연을 맡은 두 배우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언급된 트루만 카포티 역의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출중한 연기와 <시민 케인>에서부터 증명된 바 있는 아카딘 역의 오손 웰즈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에 대해서는 이들의 존재야말로 이 영화 전체라고 짧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고 생각한다. 특히 <카포티>에서 동료의 출판 발표회에 참석한 트루만 카포티가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의 존엄성을 잃지 않으려고 힘겹게 미소 짓는 장면의 비장함과 수수께끼의 인물 아카딘이 어둠 가운데서 마왕 같은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장면의 장중함은 영화가 구현할 수 있는 최상의 아름다움을 확인시켜주는 명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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