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에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람이 몇 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박찬욱 감독이다. 이제 그는 세계적인 감독이다. 그의 말 하나, 행동 하나, 만드는 영화 한 편마다가 사람들의 관심을 모은다. 새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도 마찬가지다. 가수 '비(정지훈)'와 임수경 등 청춘 스타를 캐스팅해 만든 이 영화는 가장 박찬욱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가장 박찬욱스럽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 있다. 영화는 아직 그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는 벌써부터 사람들의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영화를 보기도 전에 박찬욱 감독을 찾아간 것은 그때문이다.
- 사랑영화를 찍었는데 흰 머리가 많이 늘었다. "집안 대대로 머리가 일찍 세는 게 유전이다. 당신은 안 그렇군. 안 그런 것이 당신 집안의 유전인가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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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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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어떤 영화인가? 당신의 영화인가, 아닌가? "무슨 말인가?"
- 작가는 무릇, 단절돼 있는 듯이 보이지만 전작과 비교할 때 내용적으로 연속적인 작품을 만든다. "난 그 반대다. 늘 새로운 영화를 찍으려고 했다. 사람들이 흔히들 복수 3부작, 복수 3부작 했지만 그 영화 세 편은 각각 다른 방식, 다른 스타일의 영화였다."
- '단절'이란 표현은 잘못 썼다. 물론 당신 말대로 작가의 영화 하나하나는 독립된 세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주제의식 면에서는 일관된 무엇이 있다. 복수 3부작도 그런 맥락에서 사람들이 묶은 것이다.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있는가, 지금 세상은 구원 받을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뤘으니까. "뭐 그렇게 본다면 그럴 수 있겠다. 하지만 난 그렇게 인위적으로 내 영화를 묶고 싶지 않다."
- 이 영화는 어떻게 '새로운' 영화인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실험적인 영화를 찍고 싶은 욕심에 시작하게 된 영화다. 적은 예산으로 상업적 부담에서 벗어나서 큰 돈 안 벌어도 좋으니까 하고 싶은 데로 찍자고 생각했다. 그러면 상업영화 감독으로는 좀처럼 하기 힘든 대담한 얘기를 할 수 있을테니까. 한 마디로 아방가르드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할까?"
- 그런데? "애초에는 그렇게 기획했지만 결국에는 다 틀어져 버렸다. 하다보니 임수정과 정지훈 같은 스타 배우들이 캐스팅 됐다. 또 이왕지사 그렇게 되다 보니 스타 배우들을 기용해 실험적인 영화를 만든다는 게 어떻게 보면 굉장히 속물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역설적으로 말이지? "그렇지. 그게 오히려 속물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차라리 처음의 기획을 바꾸자고 생각했다. 오락적으로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상업영화를 만들자는 쪽으로 방향이 수정됐다. 또 한편으로는 내리 몇 편을 상업영화를 만들다 보니 나 스스로 아방가르드한 감성보다는 상업영화적 분위기에 익숙해진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 박찬욱이 아방가르드한 게 낯설어졌다고? "(웃음) 뭐 그거야... 물론 이 영화가 실험적인지 대중적인지 하는 건 보는 사람들이 판단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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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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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욱이 가수 '비'를 캐스팅한 건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하다. "부정적인 건 왜?"
- 글쎄? 너무 상업적이니까. 캐스팅 면에서 감독 스스로가 갖는 파워를 지나치게 활용하니까. "나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풋풋한 청춘영화라고 생각했고 그런 면에서 기교와 기량이 높은 단련된 배우들보다 덜 세련되고 덜 다듬어졌어도 오히려 그래서 진심 어린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가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은 물론 있다. 조승우라든가 박해일이라든가 류승범 같은, 일종의 접신을 한 배우들. 그보다는 그 반대가 이 영화와 더 신선한 조합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잘 차려진 정찬보다는 깨끗한 샐러드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나 할까?"
- 조금 더 '변명'해 봐라. "나는 엄연히 상업영화 감독이다. 때문에 언제나 상업영화의 범주 안에서 상업성이 큰 스타들을 기용해 영화를 만들어 왔다. 그게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그들의 이름이 아닌 능력을 보고 캐스팅했다'거나 '캐스팅해보니 스타더라' 같은 솔직하지 못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난 스타들이 대중들에게 남긴 인상이나 이미지를 어떻게 오려 붙여 새롭게 변형해 볼까 하는 식으로 궁리하는 걸 좋아한다. 넓은 의미에서 스타의 능력에는 그들의 명성과 인기가 포함된다. 그런 요소를 활용하는 데 대해서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 이번 영화는 경계선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아방가르드하면서도 그렇지 않고, 흥행력이 없으면서도 있을 것 같고. 어쨌든 당신의 이전 영화와는 대중적 평가가 다를 것으로 보인다. "인사이더들, 영화를 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편집본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 대체로 '종 잡을 수 없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들 하더라. 그런 면에서 보면 두 배우가 갖고 있는 스타성, 대중적으로 친숙한 이미지가 이 영화에 확실한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낯선 영화에 낯선 얼굴까지 더해지면 정말 생경한 영화가 됐을 거다. 이제 후반 작업을 거쳐서 컴퓨터 그래픽도 입히고, 음악도 깔고, 음향효과도 넣고 해서 훨씬 더 익숙한 영화가 됐다."
- 낯선 영화라지만 현재까지 나온 얘기는 사랑 얘기다. "일단 두 남녀 사이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이 오가지 않는다. 한 마디로 사랑영화에서 주로 보여주는 낯 간지러운 장면들이 별로 없다는 얘기다. 키스 신이 딱 한 번 등장하는데 유머러스하게 처리해서 그다지 낯 간지럽지 않게, 견딜 만한 장면이 됐다. 또 두 사람은 끝까지 정신분열증이 치료되지 않는 것으로 나온다. 의사들은 그들을 치료하려고 들지만 두 사람은 오히려 서로를 치료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밥이나 먹자고 한다. 근데 난 그게 진짜 사랑이고 진짜 러브 스토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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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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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다. 그게 진짜 사랑이다. "이 영화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사랑을 말로 하기보다 몸으로 직접 행동해 보여준다. 남자가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는 여자에게 밥을 먹이려고 노력하는 거다. 여자는 자신을 사이보그라고 생각해서 밥을 먹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뜬 구름 잡는 사랑 이야기라면 남자는 여자의 생각을 고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진짜 사랑 얘기는 여자가 어떻게 생각하건 남자는 오로지 밥을 먹이려고 노력할 것이다. 난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
- 그래서, '싸이보그지만 괜찮다'고 하는 거군. "맞다. 사이보그지만 괜찮다는 거고, 당신이 정신병자여도 괜찮다는 거고.."
- 당신은 점점 더 세상에 대해 희망적이 돼 간다. 구원을 믿는 것 같다. "그렇다. 그렇게 돼 가는 것 같다. 전에는 일도 잘 안 풀리고 너무 힘이 드는 상황이라 불만이 참 많았다. (웃음) 그러나 나이도 먹고, 좀 살 만 해지니까 생각이 좀 달라진 것 같다."
- 여유가 생기니 너그러워진다?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세상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에는 일단 모든 것을 파괴하고 해체한 다음에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들, 성공한 게 별로 없었다는 자각이 들었다. 현실을 개선하는 건 방법이 보다 현실적일 때 가능한 일이다. 난 요즘 그걸 깨달았다."
인터뷰 오동진 편집장
사진 김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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