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충암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온라인으로 담임교사를 선택하게 한 것이 화제다. 이런 시도에 대해 일각에서는 "학생들의 교육 선택권을 보장하는 의미있는 시도"라며 치켜세웠다. 다른 한 편에서는 "학교가 쇼핑몰이냐"라며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담임 교사와 학생의 만남이 시장에서 물건 고르듯 이뤄져서는 안 된다는 반발이다. (☞관련기사: '학생이 담임교사를 선택한다고?' (기사보기))
전자의 호응은 기존 공교육에 대한 불신과 반감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후자의 반발은 교육의 공공성을 위협하는 시장만능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교육의 공공성을 옹호하면서 기존 공교육에 대해서는 불만을 갖고 있는 이들이 설 자리가 없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이 논쟁을 벌이면서 생겨난 맹점이다.
그래서 조금 다른 방향의 질문을 준비했다. "학급 담임 교사를 학생이 선택하게 한 것이 옳은 일이냐"를 묻기 전에 현행 '학급 담임' 제도 자체의 필요성에 대해 질문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서다.
잘 알려져 있듯 OECD 국가 중 상당수는 중고등학교에 '학급 담임' 제도가 없다. 그 대신 교과 담임 제도가 있고, 학생들이 각 교실을 옮겨다니며 수업을 듣는다. 학생들의 '선택권'을 보장하면서, 교사들의 '교과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다.
서울 서문여중 김대유 교사는 오래 전부터 '학급 담임' 제도를 없애고, 외국과 같은 '교과 담임' 제도를 도입할 것을 주장해 왔다.
학급 담임 제도는 일제 강점기에 학교를 군사조직처럼 재편하기 위해 도입된 장치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학급 담임, 학년부장, 학교장 등으로 이어진 종적인 질서가 소대, 중대, 연대 등으로 올라가는 군대조직과 닮았다는 지적은 종종 제기돼 왔다. 물론 김 교사가 "군대조직과 닮았다"거나 "일제 잔재다"라는 이유만으로 학급 담임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학급교실에 아이들을 붙박이처럼 앉아 있도록 하는 현 제도가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담임교사, 학교장 등이 중심에 놓인 종적 질서에 갇힌 채 자란 아이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민주적이고 자율적으로 풀어갈 능력을 기르기 어렵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생각은 앞서 <프레시안>이 '교육과정 개편 논란'에 부쳐 제안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경직된 문과-이과 구분처럼 외국에서는 낯선 제도가 한국의 학교에서 유지돼 온 배경에는 학생들이 한 교실에 종일 묶여 있게 하는 학급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학급 담임제도 없이 학생들이 교실을 옮겨다니며 수업을 듣는 방식에서라면 이런 경직된 구분이 존재하기 어렵다.
(☞관련기사: "경직된 문과-이과 구분이 '황우석 사태'낳았다" (기사보기),
"문과-이과의 차이는 제도가 만든 허상에 불과"(기사보기),
'하얀 거탑' 속에는 무엇이 있나? (기사보기),
'핀란드 교육'이 부럽다고요?(기사보기))
최근 충암고 사례를 놓고 벌어진 논란을 지켜본 김 교사가 '학급 담임' 제도에 대한 평소 생각을 담은 글을 보내왔다. 김 교사는 과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정책연구국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김 교사의 생각은 전교조의 공식입장과 다소 엇갈렸다.
하지만 김 교사가 가진 생각의 초점은 '전교조 비판'이라기 보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유지돼 온 공교육의 틀을 바꿔야 한다는 데 맞춰져 있다. 다음은 김 교사의 글 전문이다. <편집자>
'담임선택제', 인기몰이식 교사평가일 뿐인가?
명절 증후군처럼 학부모들 사이에 새학기 '담임 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 학교 민주화가 꽤 진행되었지만 아직 학교의 문턱은 높다. 그리고 많은 학부모, 학생들에게 담임교사는 여전히 어려운 존재다.
새 학기가 다가올 때면 교회나 사찰의 찾는 학부모 신자들의 기도제목 중 하나가 좋은 담임을 만나게 해달라는 것이다. 특히 엄마들 사이에서는 담임교사를 둘러싼 소문은 천리를 간다.
"누구에게 걸리면 1년 내내 고생한다." "아무개는 이번 학기에 승진해야 할 교사라서 아이들에게 신경 쓰기보다는 점수 따러 다닐 것이다." 온갖 풍문이 꼬리를 물며 담임교사 청문회가 벌어지기 일쑤다. 그만큼 담임교사라는 존재는 애물단지가 됐다. 그런데 그 담임을 학생들이 뽑자는 담임 선택제가 지금 일파만파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서울 충암고등학교는 올해 신입생을 대상으로 원하는 담임교사를 직접 선택하는 제도를 채택했다. 1학년 담임 예비 교사의 명단과 학급운영 방침 등을 학교 홈페이지에 게재해 학생이 원하는 담임을 선택하도록 하는 '담임선택제'를 시행한 결과 신입생 739명 가운데 651명이 담임을 선택해 88%의 등록률을 보였고, 예비 담임교사 20명 가운데 8명은 미달된 것으로 나타났다. 충암고는 교육 수요자의 선택권을 넓힌다는 취지로 시행하였다며, 학생과 교사들의 반응을 지켜본 뒤 2·3학년으로 확대할 지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한 반응은 우선 부정적이다. 교총은 전인교육을 포기한 행위라고 비난했고, 전교조 역시 심각한 부작용을 우려하며 반대의 뜻을 내비쳤다. 일선 학교의 교사들 사이에도 찬반이 엇갈리며 갈등이 불거질 조짐이다. 이들은 왜 반발할까?
반대의 이유를 들여다보면 이해는 간다. 인기몰이식 교사평가라는 지적이 있고, 학부모 이기주의에 의해 국어, 영어, 수학 등 주요교과 담당교사들이 선택될 것이라는 비판도 있으며, 말썽장이 아이들이 패거리를 지어 3년간 몰려다닐 것이라는 생활지도 문제도 거론된다.
그러나 이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담임선택제에 대해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인다. 왜 그런 것일까.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유지돼 온 묵언의 동의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나는 현행 담임제도에 대한 불안과 불신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이들의 선택권에 대한 믿음이다. 처음에는 학부모의 이기주의나 인기몰이식 선택의 부작용이 따르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교한 판단력이 생기고 올바른 평가에 바탕한 선택이 자리 잡게 될 것이라는 신뢰가 그것이다.
결국 반대한 이들이 지적한 사항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개선해야 할 문제이고, 다만 그 때문에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찬성과 반대의 분기점을 형성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시각이다. 문제가 많아도 건드리면 부작용이 있으니까 이대로 살자는 사람들은 미래보다는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고, 부작용이 있어도 극복하면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이들은 미래를 열어가자는 것이다.
추억의 학급 문화, 그 속의 한계에 주목할 때
하지만 충암고의 실험은 명백한 한계가 있다. 현행 학급 제도에 대한 반성이 없어서다. 우리에게 학급과 담임교사는 무엇일까? 사실 학교 학급담임제는 일제시대 전시 준비행정의 일환인 군사적 개념의 '반(班)', 즉 학급으로 편성되어 지금에까지 이르게 된 것으로 진작 바뀌었어야 할 개혁의 대상이었다.
그 반(班)의 편제를 그대로 둔 채 담임교사만을 선택하게 하는 것은 진정한 개혁이랄 수 없다. 그러나 공교육체계에서 일제의 잔재인 학급편제가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충암고가 '담임선택제'를 도입한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학급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적지 않은 것을 가르쳤다. 고통과 고독이 만나 그리움으로 승화되는 교실은 때로 깊은 '우물' 같았다.
양은 도시락과 조개탄 난로, 나머지 공부와 걸레청소, 붉은머리파 같은 학교폭력이 기생하는 학급….
담임교사에 대한 추억도 손에 잡힐듯하다. 해가 기웃할 때까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담임의 잔소리, 억지로 일류대를 넣으려고 원하는 학과에 원서를 써주지 않고 버티던 미운 담임, 촌지를 은근히 강요하며 엄마만 들먹이던 선생님, 한번 찍히면 1년간 줄초상이 난다고 소문 난 담임에게 배정된 아이들이 통곡하던 일, 아픈 혜영이를 들쳐업고 병원으로 뛰던 그 감동의 총각 선생님, 모둠 활동에 신명이 나던 학급….
애증어린 학급과 담임의 이미지는 내내 안마당을 지켜 온 집안의 우물 같았고, 집마다 우물 맛이 다르듯이 담임의 초상도 제각각이었다.
부모 같은 담임교사?
학급담임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 사회는 횡적 질서보다 종적 질서가 중시되는 사회다. 잦은 외세의 침입과 관료주의가 자리잡아 온 억압의 세월 속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핏줄이고 가족뿐이었다.
단지 역사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OECD국가 중 최하위 수준인 의료복지와 교육환경이 그 객관적 배경을 이룬다. 복지국가는 횡적인 시민네트워크의 공유와 복지안전망의 구축을 통해 이뤄지는데, 한국은 개인의 봉급 봉투를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개인을 책임지는 것은 자신과 가족뿐이다. 우리 사회는 전적으로 '종적 사회'이다. 믿을 것은 부모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종적 질서는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학교폭력이 발생하여 추적 60분팀이 학교를 급습하면 목소리 쨍쨍하던 교장이며 교감은 다 사라진다. 마지막 허허벌판에 남는 것은 피해자 아이와 담임뿐이다.
아이들의 유일한 보루는 담임뿐이다. 그럴수록 담임과 아이들은 학급이라는 종적 개념에 집착하게 된다. 가족에 집착하는 문화와 닮았다. 교사들에게 어쩌면 운명같은 것이기도 하다.
월간 <우리교육>에서 학생 생활지도를 잘 하는 교사들에게 "당신에게 학급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당시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하나의 작은 사회로서 사회적 공간의 의미를 지닌다."(충남 대건중 조한일 교사)
"문화백화점, 학원과는 차별화된 공간이다."(광주 서광중 박춘애 교사)
"민주사회의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는 (마지막) 교육장소이다."(서울 고척중 김미경 교사)
"행정편의를 위해 구성되었지만 담임이 재구성할 수 있다."(경기 군자공고 박현숙 교사)
"담임으로서 아이들을 지키는 공간이다."(경기 광동종고 송승훈 교사)
"학급은 행정단위의 기본이다. 그러나 동시에 교육적인 공간이다."(한양공고 임정근 교사)
"학급은 교사운동의 진정성을 실현시켜 나가는 필요조건이다."(이상헌, 광주기계공고)
그렇다. 학급은 '사회적 공간'이다. 그것은 담임이 어떤 시선으로 학급을 바라보든 상관없이 처음부터 구획되어진 것이다.
어떤 담임을 만나든 뛰어난 아이는 개별적으로 청출어람(靑出於藍)할 수 있지만, 어떤 학급이든지 '학급의 아이들'은 결코 담임을 뛰어넘기가 힘들다. 학급이 종적인 사회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담임 교사는 학급 마름?…'담임 없는 학교', '학급 없는 교실'은 어떤가
불행하게도 한국의 모든 교사들은 '학급이 없는 교실', '담임이 없는 교육'을 경험하지 못 했다. 그 사회적 경험이 학급의 정의를 규정한다. 학급의 의미를 묻는 물음에 아무도 제대로 답할 수 없는 까닭이다. 학급은 한국 교육의 원형이 담긴 DNA인 셈이다.
그렇다면 학급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 '담임교사의 영혼이 묻어나는 감동의 마당'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개의 교사들에게 학급은 권리보다는 의무가 먼저 존재하는 곳이다.
학교는 학급과 비(非)학급으로 나뉜다. 비학급 영역으로 분류되는 교장과 교감, 교과담임, 행정실, 급식업자, 수위 아저씨, 매점 아저씨는 온갖 경로를 통하여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담임과 학급에게 요구한다. 이런 과정에서 수평적인 횡적 개념은 설 자리가 없다. 오직 종적인 요구와 대응이 있을 뿐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주인공의 역할처럼(영화의 주인공 키팅 선생님은 학급담임 교사가 아니다. 그래서 횡적개념이다) 감동적인 가르침조차 학급이라는 종적 공간에서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종적 가르침'으로 귀결된다. 물론 종적 개념이라서 훌륭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학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청소, 잡무, 각종 비용 거출(우유값 등) 등이 지금처럼 획일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을까? 지금처럼 학생자치가 학급이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혀 제자리 뛰기만을 반복하는 한계가 되풀이되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현재 학급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설문조사 결과(청소, 수업준비, 교사업무 보조 등이 포함된 복수 응답 설문)도 흥미롭다. 이에 대해 중학교 2학년 4개 학급 145명의 아이들 중 145명 전원은 학급의 역할이 '청소'에 있다고 응답했다. 어리석은 설문조사를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질의서를 놓고 아이들과 토론을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학급의 역할은 청소보다 교과 수업준비를 돕는 역할로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이 높게 나타났다. 여전히 학생들이 생각하는 학급의 역할은 학교의 3D업무를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담임 교사 역시 아침 일찍 와서 조회를 하고, 종일 가르치다가 가장 늦게까지 남아 문단속을 한다. 그러다 무슨 사고라도 나면 교장 대신 책임을 뒤집어쓰는 희생양이 된다. 또 학교에서 짐을 나를 일이 있으면 담임교사와 학급학생 모두가 단체로 동원된다. 그래서 담임교사와 학급은 늘 고달프다.
그런데 고달픈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대상은 아닌 모양이다. 능력 있고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들은 담임을 면제받는 것을 보면 말이다.
교감은 물론이고 부장급 이상 학교의 간부교사들 역시 담임교사 면제의 특혜를 누린다. 담임은 평교사들의 것이다. 그래서인지 담임은 시어머니 앞에 선 며느리처럼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다.
이제 그 천덕꾸러기 담임제도가 어떤 식으로건 개혁의 대상으로 오르내리게 된 것은 놀랍고 반가운 일이다. 이런 논의를 담임제도 폐지까지 확대해야 한다.
일제 이후 변함 없는 담임 제도…한국 교육의 자화상
일제 치하에서 도입돼 해방 후 반 세기가 넘도록 존재해 온 담임제가 만약 폐지된다면 아마 학교장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학교의 3D 업무는 누가 할 것이며, 담임교사가 존재함으로써 한결 빛나 보이던 질서정연한 계급적 업무 체계는 다른 무엇으로 대체해야 할 것인가.
사실 담임은 현재의 열악한 학교 현실에 적합한 측면이 없지 않다. 선진국의 학교에는 청소를 전담하는 인력이 있다. 그리고 한국과 달리 학생들이 교실 관리 부담을 지지 않는다. 학생들은 교과교실을 순회하며 수업을 한다. 이런 구조 속에서 교사들도 상당한 여유를 누리며 수업 준비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다. 담임반을 정해놓고 학생을 교실에 붙박이처럼 고정시켜서 수업을 받게 한다. 그 밖에도 넓디넓은 학교 구석구석을 학급에 할당해서 매일매일 허덕이며 쓸고 닦도록 한다. 담임교사와 학급이 없으면 그런 일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힘들것이다.
담임제가 교육적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차치해 두자. 하긴 그렇게 교육적이면 대학에서는 왜 담임제를 안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원래 군사 용어에서 비롯된 학급제도가 지금의 우리 학교체제에는 그런 대로 어울리는 제도이기도 한 모양이다. 그러니 담임제도의 존폐를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교육에 관한 여러 가지 화두를 풀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질의에 동의한다면 담임제도의 존치에 대해 찬성하는 셈이다.
"청소는 교육적이고 아이들이 꼭 해야 한다. 그리고 청소를 지도하는 것은 교사의 중요한 역할이다."
"'고정된 교실'을 책임지는 학급담임은 반드시 필요하다. "
"수업시간 종료 후에는 평교사 중에 누군가가 반드시 남아 학교를 책임져야 한다."
얼핏 단순해 보이는 질문이지만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교실 청소가 교육적인가 하는 질문 역시 오랫동안 논란이 됐다. 이런 질문이 전제돼 있는 담임제도는 그래서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물론 폐지한다고 해서 큰 일이 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한다고 해서 학교가 발전할 일도 아니지만 담임제도 하나에는 이처럼 복잡한 학교체제의 자화상이 담겨 있다.
학급담임 없이 교과담임제를 운영하는 나라의 경험을 참고하자
일부 교원단체에서 지적한대로 담임선택제는 국영수 등 주요과목 교사가 담임으로 선호되는 등 도입단계에서 부작용이 예상된다. 우려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곧 면밀하게 보완되어야 할 성격이다. 필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의 선택 능력이 신장되고, 이는 곧 학생들의 성숙한 자치능력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리고 소위 '전인교육'은 이런 학생의 자기계발 능력에 대한 존중과 신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논란의 여지는 있다.
미국 등 서구 OECD국가들의 중고등학교 과정에서는 한국과 같이 학생들을 엄격하게 행정적으로 통제하는 학급담임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학생들을 하루 종일 담임 학급 교실에 붙박이로 묶어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학생들은 '교과담임'이 기다리고 있는 교과 교실을 순회하며 자유롭게 공부하고, 학급활동은 지도교사의 조력으로 주1,2회 정도의 학급회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 운영된다. 소위 HR(Home Room)시간이 그런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를 보면, 학급은 일종의 '자치회의' 개념이다. 교과교실을 순회하는 학생들의 생활주기(Life Cycle)를 반영하여 자신들이 학교에서 겪는 문제를 정기적으로 모여 토의하는 것이 학급운영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겨진다.
이런 외국의 사례를 보면 최근 등장한 담임선택제 논의가 반갑다. 이런 논의를 교과담임제, 더 나아가 학교자치를 도입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현재의 학급담임제를 지도교사제로 바꾸고, 학급의 개념을 폐지하여 교과담임제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학생들이 교과교실을 순회하며 적성과 특기에 맞는 교과활동을 마음껏 택하도록 해야 한다.
담임선택제 논란을 학교자치의 계기로 삼자
이것은 단지 학생의 선택권 문제만이 아니다. 학교장에게 권력이 집중돼 있고, 담임 교사들은 교장의 지시를 따를 수 밖에 없는 현행 학교 체제를 민주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학급 제도의 개혁은 학교 자치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현재 학생회 학부모회 교사회 법제화와 교장 공모제 등 학교자치 관련 입법발의(최순영, 이주호, 조배숙, 구논회의원 등)가 국회에 계류 중이다. 하지만 정부는,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런 입법안에 대해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학교 민주화, 학교 자치의 중요성에 대해 우리 사회가 아직 충분히 공감하고 있지 않아서일 게다. 하지만 '담임선택제'를 둘러싼 논란이 학교 자치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 알려지면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이 '담임선택제'를 놓고 최근 벌어지는 논란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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