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진보정치는 커다란 위기에 처해 있다. 시장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보수 정부가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들어섰고, 이제 국회마저 완전히 장악할 태세다. '고소영', '강부자'로 대표되는 1% 상위 계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명박 정부는 독점 대재벌의 직접 통치를 의미한다.
이미 생계형 자살이 속출할 정도로 힘들어진 서민 대중의 삶은 가히 도탄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수의 고액 월급 소득자를 제외한 대다수 노동자계급, 특히 비정규 노동자들의 고통도 더욱 늘어날 것이다.
이명박 정부 등장과 민주노동당 분열의 뒤에는 '진보의 실착'
서민, 노동자들이 재벌 정치 세력에 표를 던져 사회 양극화, 불평등을 더 심화하는 이 역설적인 정치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국민들의 낮은 정치의식, 보수적인 사회 환경을 탓하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상수이기 때문이다.
변수는 진보세력이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참담한 실패가 이명박 정부의 승리로 귀결된 데는 '진보의 실착'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것이 바로 지난 몇 달 동안 민주노동당이 분열하고 진보신당이 출현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이었다. 또 그것은 2004년 이후 불거져 온 노동운동의 구조적 위기를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무기력하게 방치해온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면 낡은 진보와 새로운 진보의 차이는 무엇인가? 진보신당은 지난 주말 '사회연대전략 3대 방안'을 총선 핵심 공약으로 발표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국가와 기업, 고소득 노동자의 공동 부담을 통한 저소득층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 △고용보험기금의 일정한 지원을 통한 최저임금의 인상(평균임금의 50%, 5년 후 165만 원) △연 2,000시간 노동시간 상한제를 통한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창출을 사회연대의 핵심 장치로 제시하였다.
얼핏 보아 민주노동당 시절의 정책들과 차별성이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사회연대전략 방안에는 낡은 진보와 기존의 민주노조운동을 넘어서야 한다는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문제의식이 숨어있다.
낡은 진보와 새로운 진보를 가르는 출발점-사회연대전략
세 가지 연대 방안을 가로지르는 핵심적인 문제제기는 '무늬만 연대', '기자회견 연대'를 넘어서는 '진정한 연대를 재구축하자'는 호소다. 그 연대는 이중적으로 구성된다.
먼저 '노동자계급 내부의 연대'다. 주지하듯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고소득 노동자와 저소득 노동자, 취업 노동자와 실업 노동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한다. 강 양안에서 외치고 종이비행기를 날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 강을 건널 튼실한 다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럼 누가 손을 먼저 내밀어야 하겠는가? 정규, 고소득, 취업 노동자가 먼저 연대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저소득층에 대한 연금 보험료 지원, 고용보험을 통한 최저임금의 인상, 잔업 축소-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 방안은 모두 그 재정의 일부를 고소득 정규직 노동자가 부담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단기적, 경제적 이익을 연대 기금으로 내놓고 중장기적으로 더 큰 경제적 실익을 확보하자는 고도의 정치 전략인 것이다.
노동계급 내부의 이런 실질적 연대는 양극화의 주요 수혜층인 고수익 대기업과 불로소득자, 부유층의 재정 기여를 강제하는 첩경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는 연대의 두 번째 수준 즉 '사회적 수준의 연대'를 구성할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하지 못한 기존 민주노동운동, 낡은 진보정당
진보신당의 문제제기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동시에 도발적인 것이다. 기존의 민주노조운동, 그리고 낡은 진보정당 체제에서 이 문제는 금기의 영역에 속했다. 정책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2006년 말 민주노동당이 이른바 '저소득층 보험료 지원 사업'을 '사회연대전략'으로 제출하였으나 당과 민주노총 내 일각의 반대로 무산된 것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렇게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이 문제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해온 '낡은 진보', '무늬만 진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또한 진보신당의 연대전략은 민주노조운동의 구조적 위기를 주체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중요한 한 걸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민주노조운동은 김대중 정부 이래 '철 밥그릇', '노동귀족'으로 매도 당한 바 있다.
이것은 새로운 질의 연대 틀을 건설하지 못하면 해소하기 힘든 구조적 장벽이다. 비정규 노동자들이 10년째 죽음으로 항거하고 있으나 조직노동자는 '말로만 총파업', '기자회견 연대'로 일관하였기 때문이다. 기업별 조직체제와 관행 속에서 민주노총으로서도 역부족이었던 측면이 있으나, 노조 지도부의 잘못된 전략 방침이 사태를 더 악화시켜온 것도 사실이다.
한편 이런 주체적 조건 속에서 진보정당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고 절실하였다. 진보정당의 임무는 당연히 조직노동자들의 대중적 구심인 총연맹을 설득하고 압박하는 것이었다. '경제주의'에 매몰된 대사업장 노조를 견제하고 비판해야 했다. 그리고 '잔업 확보', '장시간 노동'의 마술에 빠진 조합원 대중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교육과 실천을 주요 사업으로 배치해야 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대중조직을 추수하고 담합하여 자신의 역할을 방기하는 데 급급하였다. 그 결과가 '민주노총당'이라는 질타로 나타난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진보신당의 사회연대전략은 '진보의 재구성'의 한 출발점
진보신당의 결성은 민주노조운동 20년의 한계이자 성과, 그 가능성을 표현하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이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단계의 사회운동으로 발전하자면 새로운 정치적 실천이 절실히 필요하다. 진보신당의 사회연대전략 3대 방안은 그 길을 위한 첫 발걸음이다.
이번 총선에서 진보신당이 해야 할 것은 표를 얻고 의석을 확보하는 일만은 아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함께 살 수 있는 연대를 우리 노동계급 내부에서 실천하기 위한 끊임없는 도전과 시도가 더 중요하다. 그것을 진보신당이 시작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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