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핵사고의 위험에서 한국은 결코 예외가 아니다. 환경운동연합 에너지기후본부 양이원영 부장이 체르노빌 22주기를 맞아 <프레시안>에 글을 보내왔다. 그는 "체르노빌 사고의 정황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그 원인이 구소련 당국의 '비밀주의적 행태'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며 "이런 비밀주의는 여전히 한국 핵산업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편집자>
에너지 정책 변화의 첫 번째 방향은 재생가능에너지가 아니다. 효율향상을 통해 에너지 소비 절대량을 줄여야 하고 실제로 줄일 수 있다. 그래서 GDP가 증가해도 에너지 소비는 오히려 감소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경제가 성장하면서 기술이 발전하고 정책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난 2005년,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는 효율성 향상만으로 유럽에 가동 중인 140여개의 핵발전소를 2050년까지 폐쇄할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일찍부터 에너지 효율화 프로그램을 적용해 에너지 소비를 줄여 가고 있는 유럽이지만 여전히 효율 향상을 통한 에너지 감축 잠재량은 풍부하다고 밝혔다. 그리고 재생가능에너지를 통해 기존의 화석연료를 에너지 시장에서 퇴출하고 이산화탄소를 80%까지 줄일 수 있는 에너지 수급 시나리오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에너지 소비가 세계 10위에 달하는 한국정부는 에너지 정책에 대한 비판에 산업구조 탓만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그동안 효율향상에 인색했기 때문에 그 잠재력은 유럽보다 크다. 그동안 효율향상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진행되어 온 것을 보면 화력과 핵발전과 같은 기저부하 발전소의 이익을 보장하는 부하관리 사업에만 전체 수요관리 재정의 60%를 쏟아부어온 것이 실상이다.
2013년부터 기후변화협약 의무감축대상이 될 것이 뻔 한 한국이 효율 증대와 재생가능에너지 확대를 통해 장기적으로 저탄소, 탈핵 국가로 가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동시에, 가동 중인 핵발전소와 건설 중인 핵폐기장의 안전성 확보가 무엇보다 시급하다. 체르노빌 22주기를 맞아 체르노빌 사고의 정황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그 원인이 구소련 당국의 '비밀주의적 행태'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자리잡아가고 있는 21세기에 이런 비밀주의는 여전히 한국 핵산업계를 지배하고 있다.
체르노빌의 교훈 - 비밀주의의 참담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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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2년이 지난 일이다. 1986년 새벽 1시 24분에 구소련 첨단과학의 상징이던 체르노빌핵발전소가 폭발했다. 핵분열 연쇄반응이 제어되지 못해 수증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1차 폭발로 1000톤에 달하는 원자로 지붕이 날아갔다. 연이은 폭발로 쏟아져 나온 50여 톤 가량의 핵물질이 1㎞ 상공까지 치솟고 핵연료봉은 2000℃가 넘는 온도로 녹아내렸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무기의 핵물질이 45㎏에 불과한 것에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이 핵물질들은 반경 30㎞ 지역을 집중 오염시켜 지금도 이 지역은 출입금지 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또 이것은 대기를 타고 북반구 전체로 퍼져나가 일본에서도 검출됐다.
정전 시에도 안전시설이 가동 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비상디젤발전기와 비상냉각장치, 비상신호체계도 끄고 제어봉 개수도 줄이면서 무리하게 실험을 강행하다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판단착오에서 폭발로 이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56초에 불과했다.
각종 보고서에 의하면 전 유럽의 40%가 당시 방사능 낙진에 의해 오염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아직도 높은 수준의 방사성물질에 의해 오염되어 있는 야생동식물이 발견되고 있다. 당시에 피폭되었거나 오염된 음식물을 섭취한 이들은 물론 그 아이들에게서 갑상선암, 백혈병 증가가 보고되고 있으며 20년 이상의 긴 잠복기를 가지고 있는 유방암과 같은 고형암의 피해보고도 이제 시작되고 있다. 사고가 발생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수 십 만 명이 여전히 고통 받고 있으며 그 숫자는 세월이 지날수록 늘어나고 있다.
체르노빌 사고는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발생했던 크고 작은 핵시설 관련 사고의 연장선상에서였다. 1957년 첼라빈스끄의 고준위폐기물 저장고 폭발 사고, 1980년 꾸르스끄 핵발전소 사고 등이 발생했지만 구소련 당국은 사고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이전 사고의 원인과 피해가 공개되어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고, 안전에 대한 일상적 감시를 통해 사회적 긴장감이 유지되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에 의해 정보가 통제되던 구소련은 소수의 관료와 과학자들이 스스로 건 '안전신화의 집단최면'으로 결국 그들조차도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재앙을 일으킨 것이다. 시민에 의한 적절한 통제기능이 상실된 비밀주의 사회에서는 어떤 첨단 기술로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철저한 비밀주의에 갇힌 한국의 핵산업계
한국핵산업계의 비밀주의도 극에 달하고 있다. 1984년과 1988년에 월성 1호기 냉각수 누출 사고가 '88년 국정감사 때까지 감춰졌다. 1995년 월성 1호기 방사성물질 누출도 1년 뒤에 보도되었고 1996년 영광 2호기 냉각재가 누출도 몇 주 후 주변 환경을 오염시킨 뒤에야 알려졌다. 2002년 울진 4호기 증기발생기의 관 절단으로 인한 냉각수 누출사고도 단순 누설사고로 축소 은폐했다. 2004년 영광 5호기 방사성물질 누출이 감지되었으나 재가동을 강행했고 일주일간 방치했다. 지난해는 핵물질 3㎏이 들어있는 우라늄 시료박스가 소각장으로 유출된 사건이 3개월이나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졌지만 분실된 우라늄은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핵산업계의 대처는 전형적인 비밀주의 행태를 보여준다. 정부는 사고 초기에는 '은폐'하다가, 더 이상의 은폐가 힘들어지면 사고를 인정하되 방사성물질 누출이나 심각성을 부정하거나 미미한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핵시설 안전성 검증을 위한 기본 자료도 공개하지 않는다. 2003년 부안을 핵폐기장 적합지역으로 선정할 때도 선정 후 한 달 동안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후보부지 예비조사보고서'를 공개하고 있지 않다가 TV 공개토론회에서 지적당하자 다음날로 공개했는데 그 내용이 형편없어서 지질전문가들의 비판을 받았었다. 그런데 경주를 핵폐기장으로 지정해서 지난해 말 착공했는데도 지금까지 본보고서 뿐만 아니라 예비조사 보고서조차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고리 1호기 역시 지난해 말에 수명연장 허가를 얻어 재가동되고 있음에도 수명연장에 필요한 안전조사 보고서 일체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아직 세계적으로 한 기도 수명연장이 추진되지 않았던 캔두형 원자로인 월성 1호기도 마찬가지로 진행되고 있다.
절대적 위험이 내재된 핵산업은 무엇보다 투명성이 보장되고 사회적 견제를 통한 긴장감이 유지되어야 안전을 위한 토대가 마련된다. 미국과 같이 독립적인 규제기관도 없는 한국의 현실에서 핵발전 기술을 진흥하는 교육과학기술부가 관리감독도 병행하다 보니 규제기능은 사라지고 핵산업계의 들러리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다. 한국민은 핵사고 안전 예방을 위한 정부의 기본적인 역할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최악의 핵사고를 불러일으킬 한국 핵산업계의 비밀주의에 경고한다
공익적 목적에 사용하도록 전기요금의 일부를 적립한 전력산업기반기금에서 매년 100억 원이 넘는 돈이 원자력문화재단의 홍보 사업에 쓰이고 있다. 2006년에는 129억 원의 돈을 핵에너지의 안전성과 친환경성을 광고하는 데 사용했다. 기본을 지키지 않고 겉만 치장하는 기만적인 방식으로는 속만 썩어 들어가게 만든다. 한국의 핵산업계는 어두컴컴한 비밀주의에 쌓여 핵사고의 위험을 높이고 있다.
20개의 핵발전소 중에 8기가 대도시인 부산, 울산, 경주 인근에서 가동되고 있고 여기에 6기가 건설 또는 계획 중이다. 좁은 땅에 인구밀도도 높은 한국에서 지금 핵산업계와 정부는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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