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색깔과 모양, 길이, 속도와 주변환경이 다 다르다고 해도,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만을 담은 영상 43개를 연속으로 보는 것은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처음 몇 개는 지루함에 몸을 뒤척이다가 깜빡 졸 수도 있다. 하지만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문 바로 옆자리이자 통로쪽 좌석에 앉는 행운이 뒤따르지 않는 한, 어두운 곳에 앉아 한 방향만을 쳐다보면서 러닝타임 동안 꼼짝없이 갇혀있어야 하는 매우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처음엔 짜증과 지루함 때문에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 눈앞에 펼쳐진 영화의 화면은 관객에게 사색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이런 영화는 혹자에게는 마지막까지도 고문이 될 수도 있지만, 혹자에게는 화면에 보이는 기차의 모습이 전달해주는 소소하지만 꽤 많은 양의 정보를 정리하거나 '철도' 내지 '기차'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지식들을 화면과 연관시키면서, 혹은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이동하는 기차의 움직임과 이를 고정된 화면 안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매체 자체를 인식하게 되면서 뜻밖의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제임스 베닝 감독의 영화 〈RR>이 바로 그런 영화다. 4일과 5일 양일간 영화 상영 뒤에 마련된 감독과의 특별대담 자리는 이 영화의 모호한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파헤칠 수 있는 자리였다. 제임스 베닝 감독은 이 자리에서 이 영화의 제작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소개했으며, 이후 관객들과 다양한 질문과 답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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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베닝 감독이 특별히 열차를 선택한 것은 비행기나 다른 운송수단과 달리 열차는 제한된 시야와 높이 안에서만 지나다닐 수 있는 교통수단이며, 앞에 장애물이 있을 경우 우회하거나 터널을 통과하는 등의 방식을 거쳐야 하는, 운동 방향에 있어 매우 한정된 한계를 지닌 운송수단이다. 그는 마치 미끼를 매단 낚시를 드리우고 고기가 미끼를 물기만을 기다리듯, 캘리포니아와 유타, 네바다 주 등을 떠돌면서 철로 가까이에서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 때로 3, 4시간을, 때로는 꼬박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기다려 기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해서 기차가 지나가는 장면을 6시간 분량 가량 찍은 후 이를 약 2시간 분량으로 편집해 만든 영화가 바로 〈RR>이다. '레일로드(Rail Road)', 즉 철길을 뜻하는 제목답게 이 영화는 깎아지른 벼랑 옆, 사막 한 가운데, 혹은 숲 한쪽에 나 있거나 마을 중앙을 통과하는 다양한 철로 곁에서 다양한 모습과 길이의 기차가 각기 다른 속도로 지나가는 기차들을 찍은 43개의 숏으로 구성된다. 이 화면을 나름의 원칙과 리듬감에 따라 재배열한 후, 거기에 때때로 그레고리 펙이 요한계시록을 낭독하는 목소리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연설, 우디 거스리의 음악 등을 입혔다. 43개의 숏 중 승객을 태운 열차의 숏은 단 2개뿐. 이것은 제임스 베닝 감독이 촬영한 지역에서 실제로 전체 운행하는 열차 의 수 중 승객 수송 열차가 차지하는 수의 비율을 맞춘 것이다. 이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제임스 베닝 감독이 깨달은 것은 이 열차들이 하루에만 해도 얼마나 많은 양의 상품들을 실어 나르는지, 미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얼마나 과도한 소비를 남발하고 있는 사회인지와 같은 사실들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단지 화면에 나타나는 영상 외에 훨씬 더 많은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땅덩이의 국가의 '신경'을 구성하고 있는 철로와 이 위를 다니는 기차들은, 제임스 베닝의 견해에 따르면 필요 이상으로 낭만으로 채색된 신화화된 운송 수단이기도 하다. 이것은 대륙 횡단/종단 열차들이 생겨나면서 미국의 초기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철도'라는 것이 미국인에게 주는 특별한 감정이다. 이 기차들의 풍경이 바로 미국의 풍경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보다 낯선' 섹션에서 제임스 베닝 감독의 영화들과 함께 상영된 영화 중 <이곳으로>를 연출한 존 조스트 감독은 이 영화의 상영 및 특별대담 자리에 관객 중 하나로 참석해 "움직이는 기차의 이미지를 연속적으로 보다보니, 이후 정지해 있는 물체마저도 마치 기차가 그랬듯 이동하는 듯한 착시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면서 '움직이는 그림'이라는 영화의 속성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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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베닝 감독(사진 왼쪽) ⓒ프레시안무비 |
영화의 마지막 숏은 100개도 넘는 화물칸의 긴 열차가 지나가는 매우 긴 숏으로, 이 열차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다가 결국은 멈춰서게 된다. 이 마지막 숏은 지루함과는 다른 종류의 '매우 답답하고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감정을 안겨주는데, 이젠 정말 못 참겠다 싶은 순간에 제임스 베닝 감독의 이름의 약자인 JB만이 화면에 커다랗게 박힌 숏으로 전환된 후 영화가 끝난다. 이런 괴로운 영화가 새삼 일깨워주는 것은 바로 우리가 영화라는 매체를 보는 시각 그 자체,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지닌 속성에 대한 탐구이다. 영화제 티켓 카탈로그에서 이 영화를 '풍경영화의 걸작'이라 소개한 것은 어느 정도 사기성이 짙은 멘트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경험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매우 특별한 경험'인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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