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천민민주주의'라고? '천민자본주의자'가 문제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천민민주주의'라고? '천민자본주의자'가 문제

[기고]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의 '천박한' 견해에 대해

주성영 의원의 '거침없는(?)' 발언이 연일 뜨거운 의제로 등장합니다. 주 의원의 이런 식의 문제제기야말로 근본적 논쟁, 근본적 성찰이 필요한 주제일 것 같습니다만 문제제기 그 자체나 이에 대한 대응이 지나치게 가볍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정치적 측면에서 여야 현역의원끼리 논쟁이 계속 된다면 흥미롭기도 하고 생산적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관점에서 저는 이제 더 이상 열외자인 형편이라서 법률가적 관점에서 두어 가지만 적어두고자 합니다.
  
  주 의원의 역사인식, 권리인식 자체에 근본적 결함이 있다는 것이 제 기본입장입니다.
  
  어느 경우에도 주권자는 대통령이 아닌 시민입니다. 헌법이 곧 시민이고, 시민이 곧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시민은 스스로의 정치적 결단으로 나라를 구성합니다. '천민민주주의'라는 용어는 그렇게 흔한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그 자체가 '절대선'이자 '목적'인 헌법질서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체제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반대할 수 있겠죠. 하지만 민주주의 자체에 수식어를 붙여 비판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 사례를 찾아보기도 어렵겠고요. 백보를 양보하여 주 의원이 실패한 정부를 구성한 시민의 책임을 두고 천민민주주의를 얘기했다면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부여받을 수 있었겠죠.
  
  하지만 이도저도 없이 그저 정부정책에 대해 비판하고 주권자로서의 자기결단을 표현했다는 이유만으로 천민민주주의라 비판했다면 이는 주권자의 뜻에 따라 입법의 임무를 부여받은 의회주의자의 자기부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 의원의 글을 몇 차례 읽다보니, 재판에서 공방을 하듯 한 줄 한 줄 따져가며 반박하고 싶은 엄청난 충동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미 언론과 네티즌에 의해 충분히 해석된 바 있어, 자제하고 또 자제하며 제 관점에서 몇 가지만 짚어봅니다.
  
  주 의원은 최초의 과학적 역사학자 투키디데스가 아테네의 몰락의 원인으로 '민주주의(천민민주주의)'를 지목했다고 합니다. 투키디데스가 정말로 천민민주주의란 말을 사용했습니까? 그때의 민주주의가 현대의 민주주의와 동일하거나 그때의 민주주의를 천민민주주의라고 동일시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죠? 잘 아시다시피 귀족정주의자인 투키디데스 입장에서는 1인 1표식 민주주의가 얼마나 골치 아팠겠습니까? 억지로 끌어다 둘러붙인 논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동영 후보에게 표를 던진 620만명의 일부가 '천민민주주의'를 주도하고 있답니다. 주 의원 진영에 표를 던진 사람은 '귀족민주주의자'입니다. 반대는 당연히 '천민'이 되는 것이죠. 이 부분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일정부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부자·고소영 내각'이 바로 징표입니다. 이명박 행정부가 꿈꾸는 나라, 주성영 의원이 꿈꾸는 민주주의 주체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폐쇄적인 '귀족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지점은 주 의원이 중우정치, 포퓰리즘을 거론하며 이것이 '천민민주주의'로 변질되기 쉽다고 말한 부분입니다. 변질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일정부분 동의합니다. 주권자인 시민의 의사에 기초하는 정치행태와 스스로의 정치적 결단에 의지하는 자기만족적 정치행태는 구분해야겠죠. 속으로는 자기만족을 꾀하며 겉으론 시민을 위하는 척하는 하는 것이 바로 포퓰리즘이겠죠? 절차적으로는 직접민주주의라 왜곡하며 의회를 우회하고 민심을 왜곡하고 선동하는 정치가 포퓰리즘입니다.
  
  지금 이 시간 현재 의회를 우회하고 주권자인 시민을 우회하며 시민들의 의사를 왜곡하고 미국 쇠고기업자의 '민심'을 추종하는 정치가 어디에 이뤄지고 있나요? 촛불집회입니까, 아니면 여의도와 청와대입니까? 뻔한 사실 아닙니까? 굳이 이런 정치형태를 '천민민주주의'라 비판한다면 그 비판의 화살은 촛불집회의 광장이 아니라 여당과 행정부 자신들의 가슴에 먼저 겨눠보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촛불집회에 대해서도 같은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겠죠. 그런 의미에서 주 의원의 논리는 더 이상 오갈 데가 없습니다.
  
  최근 들어 여러분들이 이런저런 역사적 경험을 얘기하며 독서를 권유합니다. 제 정치적 동지인 정성호 전 의원께서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히틀러 시대로 이르는 독일의 역사적 흐름을 늘 얘기하며 유사점과 차이점을 교훈으로 삼자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엔 독일 현대사를 탐독하기도 했습니다. 몇 일 전에는 H신문사의 선배께서 어느 블로그에 실린 '보나파르티즘'을 한 번 읽어보라며 권유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글을 읽고 나서 호기심에 프랑스 근대사 제2제정 시대를 재독하게 됐습니다. 주 의원에게 참고로 보내드리고 싶은 부분입니다.
  
  "나는 보통 선거권의 성수로 세례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진창에 발을 담글 생각은 없다. 나폴레옹 3세의 이 말은 그의 치세 기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혼재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자신이 소란스러운 정치권을 초월하고 좌파와 우파를 뛰어넘어 있으며, 투표에 의해 선출된 입법 기관이 아니라 국민이 책임진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관료들이 조종했던 몇 번의 국민투표를 제외하곤 그는 국민 여론수렴에 소홀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조심스럽게 언론을 구속하였다. 겉으로는 노동자와 농민에 대해 진보적인 견해를 과시하였지만 그는 1848년 6월 투쟁으로 공황 상태에 빠진 유산 계급에 기대어 정치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또한 그는 1851년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시위를 가공할 만한 폭력으로 진압하였다."(케임브리지 프랑스사, 252쪽)
  
  비록 시대와 나라는 다르지만 역사로부터 얻는 교훈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제2제정과 주 의원과 대통령의 얼굴이 겹쳤습니다. 제가 과한가요?
  
  천민민주주의가 아니라 '천민자본주의'를 지적해야 할 때입니다. 천민자본주의의 핵심은 모든 것을 사고팔 수 있고 '돈이 곧 신'이 되고 마는 그런 자본주의입니다. 상대적 소유권이 아니라 절대적 소유권을 주장합니다. 소유권 만능주의 사상입니다. 소유권 절대주의 사상입니다. 사실상 자본주의는 전인격이 아닌 재산권의 비율에 따라 모든 것이 정해지는 불평등 체제입니다. 돈과 돈 사이에서의 평등입니다. 이에 반해 민주주의는 전인격이 1인 1표제입니다. 그래서 굳이 따지자면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극단적 불평등 체제에 대한 나아가 '극단적 시장주의'에 대한 수정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등을 주장하며 남녀노소 직업의 귀천을 불문하고 1인 1표라는 평등을 강제합니다. 어쩌면 주 의원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정부 또한 그런 점에서 시민들에게 심각한 차별과 상처를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강화된 민주주의', '실질적 민주주의'가 절실한 때인 것 같습니다. '소유권'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 그리고 '국가의 책임'을 갈무리할 가장 근접한 해답은 아직까지 '강화된 민주주의' 혹은 '실질적 민주주의'가 아닌가 하는 판단 때문입니다. 진정한 천민자본주의자, 진정한 포퓰리스트가 가장 두려워하는 체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