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 : 아니, 꼭 윤복이만은 아니고, 원래 남장여자란 설정 자체가 설레잖아요. 그리고 그 중엔 정말 가슴을 콩닥이게 하는 남장여자 캐릭터도 있고.
S : 그렇긴 하죠. 여자들을 홀리는 남장여자들이 있죠. 남장여자 자체도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고요. 남자들한텐 안 예쁘고 섹시하지도 않으니까.
N : 그래서 하위문화죠. 남자들한테만 인기가 있다고 하위문화 취급을 받진 않는데, 여자들만 좋아하면 하위문화죠.
S : 주류문화가 남성문화니까요. 그런데 남장여자의 인기는 학교에서 남자 같은 여자선배들이 인기가 많은 현상과도 관련이 있지 않아요?
N : 글쎄요, 그럴까요? 톰보이들에 대한 동경은 "저 선배 멋있다"는, 말하자면 대상에 대한 동경이잖아요.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라던가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느낌은 덜하죠. 하지만 남장여자의 경우는 동일시의 욕망이 더 강한 동경인 것 같은데요. 내가 하고 싶지만 못 하는 걸 대신 해주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랄까요.
S : 하긴, 남장여자들은 보통 여자들은 못 하는 걸 잘 하죠. 특히 무술을 잘 하고 검으로 남자를 이길 수 있는 사람으로 그려져요.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오스칼이 대표적인 경우죠. 남자보다 우위에 서서, 남자들만큼 성취한 여자들이에요.
▲ 바람의 화원 |
N : 그러고 보니 <바람의 나라>에서도 신윤복 말고도 무술 잘 하는 남장여자가 또 등장하는군요. 김조년을 수행하는 검객 말예요. 물론 남자인 척하는 여자냐, 여자 무사인데 중성화된 사람인가는 다르긴 하지만요. 이 사람은 외모도 날카로운 편인 데다 대사가 거의 없어요. 신인에 비중이 작은 역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시청자 입장에선 이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일이 없다는 거죠. 입을 열면 어차피 여자의 목소리일 테니까. 반면 문근영은 여자치곤 좀 굵은 목소리를 내잖아요.
S : 네, 그렇다고 어색하지도 않고. 문근영은 생긴 것 자체도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에요. 선이 굵고 이목구비가 또렷하죠. 눈썹은 안 다듬은 것 같고요. 소년 같은 남장여자죠.
문근영과 여배우의 섹슈얼리티
N : 이 드라마로 문근영이 '국민남동생'이라는 별명을 얻었잖아요. 그런데 난 '국민여동생'이란 별명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건 마치 이 배우의 섹슈얼리티를 외부에서 강제로 약화시키려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S : 오히려 섹슈얼리티를 기형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고요?
N : 기형적으로 소비하는 거 맞아요. 말하자면, 그녀를 여동생으로 묶어놓고 자신의 욕망을 금기화하고 남에게 들키지 않겠다는 욕망으로 보이거든요. 여동생이라고 욕망을 안 갖는 게 아니고요. 대신 나도 안 가질 테니 남도 못 갖게 하겠다는 의지가 깔려있는 거죠. 그것의 타협점이 여동생인 거고요. 그런데 이제 '국민남동생'이란 별명이 등장했어요. 연기를 너무 잘 하는 것에 대한 칭찬이기도 하지만, 이 말이야말로 그녀에게 갖는 은밀한 욕망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그녀의 섹슈얼리티를 강제로, 보다 전격적으로 거세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은 거죠.
S : '국민 남동생'이란 별명은 <바람의 화원> 때문에 생겨난 건데, 남장여자란 것 자체가 자신의 실제 섹슈얼리티를 감추고 뒤트는 것이기도 해요. 그런데 세상에 어느 여자가 '남동생'이라고 불리는 걸 좋아하겠어요? 차라리 '오빠'면 몰라. 그녀를 '남동생'으로 부른다는 건 팬들이 대체로 그녀보다 나이가 많다는 얘기기도 할 거예요. 권력을 주지 않겠다는 거고요.
N : 맞아요. 실제로 나이가 많지 않더라도 자신을 우위에 두려는 욕망이죠. '국민 오빠'가 아니라 '국민 남동생'라 부르는 건 그녀의 위치를 어디까지나 내 밑에, 언제까지나 보는 내가 케어해주고 통제할 수 있는 대상으로 묶어두려는 욕망이 반영된 거라고 보여요.
S : 드라마에서 김홍도가 매번 신윤복을 감싸주긴 하는데, 원작에선 별로 그렇진 않아요. 오히려 김홍도는 항상 아슬아슬하고 불안해 해요. 신윤복이 참 쿨하고 시크하고, 언제 사고를 칠지 몰라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움직이는 시한폭탄'처럼 그려지거든요. 신윤복에 대한 실제 역사 기록이 별로 없긴 하지만, 도화서를 뛰쳐나갔다는 점만 봐도 이 사람이 얼마나 튀고 파격적인 사람이었을지 짐작이 가잖아요. 하지만 드라마에서 문근영이 그리는 신윤복은 그렇게 위험하거나 불량한 인물은 아니죠. 그냥 똘똘하고 귀여울 뿐이에요.
왜 '마성의 게이'가 아니라 남장여자일까?
N : 역사적 기록이 별로 없다곤 해도 실제로 신윤복은 남자였죠. 저는 여기서 궁금증이 생기는 것이, 원작이나 드라마에선 왜 하필 신윤복을 남장여자로 설정했을까요? 게이이거나 양성애자로 설정하는 게 더 재미있었을 텐데요. 본인은 이성애자라도 주변의 여자들은 물론 남자들을 다 홀리고 다닐 만큼 특별한 매력과 색기를 가진 남자로 설정했다면 훨씬 재미있잖아요.
S : '마성의 게이' 말씀이군요. 지금도 그런 면이 있지 않아요? 남자와 여자를 다 홀렸는데.
N : 왜 그런 생각을 했냐 하면, 신윤복의 그림들이 여성적이고 섬세한 필치라곤 해도, 내가 생각하기엔 오히려 여자를 너무 좋아하는 바람둥이 호색한 남자의 느낌이 많이 들어서거든요. 여자들을 그렇게 디테일하게 그려댄 것도 신윤복이 여자여서가 아니라 실은 여자를 너무 좋아해서...
S : 아, 그건 동감이에요. 필치를 떠나서 그림들의 시선 자체가 전형적인 남자의 시선이지 않아요? 단오풍정만 봐도 여자들을 훔쳐보는 중들이 있잖아요. 여자라면 그런 인물은 안 넣었을 거 같아요.
N : 그렇다면, 신윤복 자신은 이성애자인데 외모도 곱상하고 체구도 작고, 도화서의 모든 남자들을 홀릴 만큼 특별한 매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으로 설정했을 때 훨씬 위험한 매력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요. 거기에 김홍도와 모종의 관계를 맺는다면 훨씬 불온하고 멋진 설정이 됐을 텐데, 지금의 남장여자 설정은 '너무 안전한' 면이 있어요. 반면에 올해 제작된 일지매 드라마 두 편은 모두 일지매를 남자로 설정했어요. 일지매야말로 딱 남장여자로 설정했어야 하는 캐릭터 아닌가요? 일지매 여자설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S : 일지매를 남장여자로 하지 않은 건 '칼을 들고 싸우는 여자'라는 게 너무나 위협적인 이미지이기 때문 아닐까요? 남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여자인데요. 일지매 자체가 시대에 저항한 반항적인 인물인데, 여자에다가 칼까지 들어봐요. (잠시 한숨 쉬고) ...최고죠. 정말 멋있을 거 같아요. 사실 남장여자의 본질은 '싸우는 사람'이란 거죠. 거기에 일지매는 도적떼를 이끌잖아요. 일지매야말로 남장여자의 클리셰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죠. <바람의 화원>의 그 여자검객도 설정이 더 있었으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N : 그러게요. 그런데 <바람의 화원> 보면서 좀 재미있는 상상을 했어요.
S : 무슨 상상이요?
N : 조선시대가 알고 보면 남장여자들이 판을 치고 그게 암묵적으로 묵인되는 시대였다면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거죠. 겉으로야 여자의 사회활동을 막았지만, 생각해 봐요. 예컨대 딸이 너무 똘똘해서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깨치고, 어느 순간 맹자를 읽고 주자를 읽고 와서는 아버지랑 성리학 토론이 된다고 하면, 그 재주를 썩히는 게 부모 입장에선 얼마나 아깝겠어요. 계획적으로 딸을 아들로 키울 수도 있고, 애가 좋아하니까 어릴 적에 남자옷도 입히고 하다가 어쩌다 보니 남자애로 키우게 될 수도 있고. 양반이 아니더라도 당시 중인들이 나갔던 전문직들의 경우 남장여자들이 꽤 진출해서 자기들끼리 비밀모임도 있어 노하우를 전수를 해준다거나, 혼인이나 성인식 같은 집안 공식적인 행사도 커버해주고 위장해주는 비밀 직업들도 있었다거나, 그런 식으로요.
S : 참 상상도 구체적으로 하셨군요. 딱 그런 설정으로 로맨스 소설도 이미 나온 게 있어요.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라는 책인데, 남동생 대신 과거에 응시했다가 덜컥 합격해서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지내죠. 전형적인 '남학교에 간 여학생' 컨셉트예요. 성균관 유생들과 같이 침식을 하고 유생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죠.
남장여자, 억압된 욕망의 대리 실현자
N : 사실 모든 남장여자물의 기본은 남자들만의 세계에 여자가 들어가서 그 생활을 내 대신 관찰하고 체험한다는 거죠. 여자들만의 세계에 남자가 잠입한다는 건 어느 정도 성적인 목적인 경우가 많잖아요. 여자들끼리 목욕하는 걸 훔쳐보고 싶다던가 하는. 그런데 여자가 남자들만의 세계에 몰래 들어간다는 건 사회적으로 억압을 받는 상황에서 자아실현을 하겠다는 목적이 커 보여요.
S : 요즘 나오는 남장여자물들이 주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클 거예요. 여자들이 남자들 목욕하는 걸 훔쳐보겠어요, 뭐하겠어요? 사춘기나 젊은 여성들의 경우 남자들의 몸을 오히려 무서워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게다가 2008년을 배경으로 남장여자물을 만든다고 했을 때, 별로 메리트가 없는 건 사실이죠. <셰익스피어 인 러브>만 해도 여자가 연극을 못 하던 시절에 연극을 하고 싶어 남장을 했던 여자의 이야기니까요.
▲ 셰익스피어 인 러브 |
N : 맞아요. 남자들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죠. 그런데 이게 단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워낙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자가 억압을 받다보니 남자들에게만 허락됐던 사회적 성취를 자기도 이뤄보겠다는 욕망을 추구하는 셈이죠. 어찌 보면 남장여자물이 인기있는 시대란 여자들에겐 별로 행복하지 않은 시대인지도 몰라요. 지금이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남장여자물을 소비하는 거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당대를 배경으로 해서 <가슴달린 남자> 같은 영화들이 나왔었으니까요. 그런데 <커피프린스>에도 생존의 문제가 나와요. 님자들만 뽑는 카페에 들어가는 문제가 아니라, 윤은혜가 그 전에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짤리면서 "계집애라 싼맛에 쓸까 했더니 사고만 친다"는 말을 듣죠.
S : 여자 하나에 남자 여럿이라는 게 여자들의 판타지 아니겠어요? 남자 하나에 여자 여럿은 남자들의 판타지고요.
N : 정말 그게 여자들의 판타지일까요? 실제 상황이라면 오히려 두려움을 느끼지 않겠어요? 남자들도 여자들 무리에 자기 혼자만 남자라면 위협감을 느낄걸요.
S : 실제상황이라면 좀 무섭겠지만, 대부분의 남장여자물은 판타지니까요. 만화나 게임들을 보세요. 주인공은 한 명 여러 명의 이성이 등장해요. 신윤복도 그런 식의 위협은 별로 겪지 않잖아요. 오히려 주변에 미묘한 성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주변 남자들을 자신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도록 만들죠. 내가 게이인가? 고민하게 만들고요. <커피프린스>만 해도 공유 외에 다양한 남자들이 모두 윤은혜를 나름의 방식으로 챙겨주잖아요.
N : 그 남자들이 다들 유형별로 다른 멋진 남자들이죠. 우직한 남자, 귀여운 남자, 예쁘고 카리스마 있는 남자, 그리고 공유는... 평생 스트레이트로 살아오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남자가 정체성 혼란에 좌충우돌하는 걸 구경하는 게 또 남장여자물의 커다란 재미지요. 게다가 윤은혜는 정말 남장여자다웠어요. 그냥 여자가 남자옷 입은 게 아니라,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호한 매력을 줘야 남장여자잖아요. 그러고 보면 '남장여자'란 게 꽤 까다롭죠? 난 윤은혜 이전엔 한번도 드라마나 영화에서 남장여자에 만족해본 적이 없어요. 남장여자는 여자 같으면 안 되죠. 정말 남자처럼 보여야하고, 그럼에도 너무 남자 같아서도 안 되고, 우락부락하면 더욱 안 되죠. 예쁜 남자처럼 보여야 하는 거죠.
S : 그러니 소설과 만화에서 주로 소비되는 거겠죠. 남장여자 드라마는 별로 없었잖아요.
N : 손예진이 남장을 하고 나온 적이 있는데, 그게 말이 되냔 말이죠. 남장여자의 매력이란 성의 경계 자체가 모호해지는 것이 매력인 셈이에요.
S : 남녀 모두의 매력이 섞여야 하는데, 굳이 말하면 남자 쪽에 가깝죠. 남장여자가 명품가방 들고 꺅꺅대는 이미지는 아니잖아요.
N : 그렇긴 해요. 스타벅스 커피와 명품가방에 꺅꺅대진 않죠. 대신 전자기기 같은 거에 게거품을 물죠.
여자들은 왜 남장여자에 열광하나?
N : 지난번에 꽃미남이 인기있는 이유가 안전한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란 얘기를 했잖아요. 실제로 그런가 아닌가는 별개지만요. 남장여자를 좋아하는 심리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S : 남장여자의 경우 남자가 '안전'과 관련해 제공할 수 있는 걸 모두 제공해주는 동시에 아무런 위험이 없는 존재예요. 날 지켜주고, 안전하기도 하고, 관상용으로도 좋고요.
N : 아, 친구도 되는구나! 적어도 남장여자는 마초질은 안 할 것 같은데요. 권위적으로 굴지도 않을 거고.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 소위 남자 같은 여자는 남자보다도 더 권위적인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어 직장 같은 데에서 지위가 높은 여자상사들은 '치마두른 남자'인 셈인데, 남자상사보다 더 지독한 사람도 많거든요. 꼭 남장여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S : 만화나 문학, 영화 텍스트에 나오는 남장여자들은 여자에게 권위적이지 않아요. 여자들과 수평적인 관계고, 오히려 아무 데에도 적을 둔 곳도 없고, 여자들을 안 보이는 곳에서 도와주죠.
남장여자, 생존을 위한 우회로이기도 하다
N : 내 경우는 남장여자를 좋아하는 베이스엔 남자들의 세계에 진출하고 싶었던 욕망이 컸던 것 같아요. 사실 제가 고등학교나 대학에 진학할 때만 해도 여자가 무슨 대학이냐 분위기가 있었어요.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오빠가 대학에 가야 한다고 여상에 가는 친구도 있었고요. 그런 식으로 여자에게 금지된 구역이 워낙 많아서, 남장여자는 말하자면 여자들에게 금지된 사회적 구역으로 들어가는 편법의 통로였던 셈이에요. 생존과 관련되니 좀 더 처절한 면이 있는 것 같네. S씨 또래들 중엔 그런 케이스가 거의 없죠?
S : 없죠. 요즘은 딸이라고 대학을 안 보낸다거나 하는 건 없죠. 딱히 취업에서부터 차별을 겪지도 않고요.
N : 그래요, 오히려 어떤 회사들은 여자들을 반기죠. 근데 그것도 다 싼 값에 더 많은 일을 시킬 수 있고...
S : 짜르기가 쉽기 때문이죠!
N : 맞아요. 대한민국 비정규직의 80%가 여성이잖아요. 여자들의 경우 출산이나 육아 때문에 일을 쉬다가 다시 일을 하려는 경우에 학습지 교사 정도 외에 길이 많지가 않아요. 예전에 하던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비정규직으로 월급이 반으로 깎이는 경우도 꽤 많다고 하더라고요. "불러만 줘도 땡큐"라는 거죠.
S : 암울하네요. 그런데 20대인 나는 남장여자를 소비하는 게 N씨와는 달라요. 역시나 일단 비쥬얼이 중요하고요, 굳이 남자들의 세계에 끼고 싶다거나 진출하고 싶다는 욕망도 별로 없어요. <세느강의 별>이란 만화는 일종의 조로와 같은 변신물인데, 여주인공이 밤마다 변장을 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다니기도 해요. 이쯤 되면 거의 슈퍼히어로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는 거죠. <커피프린스>가 인기를 끌 무렵 일본에선 <아름다운 그대에게>라는 드라마가 나왔는데, 좋아하는 남학생과 가까워지기 위해 남장을 하게 돼요. 확실히 맥락이 다르죠?
남장여자의 한계, 이성애 중심주의
S : 사실 남장여자물의 대가엔 고전적인 작가들도 있죠. 셰익스피어 작품엔 유독 남장여자들이 많이 나오는데, 전형적인 남장여자물의 클리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죠. 그 시대에도 남장여자가 많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다면 작품들에 그렇게 많이 나올 리가 없잖아요.
N : 아까부터 얘기하지만 여자가 억압된 상황일수록 남장여자들이 많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러니 남장여자물도 많은 거고.
S : 생각해보니 [십이야]의 바이올라도 결국 생존문제 때문에 남장을 하는군요. 그런데 셰익스피어뿐 아니라 대부분의 남장여자물에서 주인공이 생존을 위해 남장을 하더라도 나중에 사랑을 찾고 남자의 인정을 받은 뒤엔 다시 여자로 돌아와요. 예외가 포샤 정도일까. 물론 포샤도 여자로 돌아오긴 하지만, 남장의 목적 자체가 사랑하는 남자를 구해주기 위해서죠. 역사상 가장 멋있는 남장여자 아닐까 싶어요. 시녀와 쌍으로 남장을 하는데 이게 또 묘한 분위기가 나죠.
▲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베니스의 상인> |
N :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기지와 재치가 넘치는 아가씨 아닌가요. 역시나 법정이라는, 여성에게 금지된 공간에 들어가기 위해 남장을 하죠.
S : 맞아요. 보통 셰익스피어의 남장여자들은 남자보다 뛰어나요. 남자들은 대부분 찌질하죠. [십이야]의 올시노 공작을 봐요, 찌질하기 이를 데가 없어요. 하긴 그 작품의 경우는 여자가 둘 다 세죠. 바이올라는 물론이고 올시노가 사랑하는 올리비아도 세죠. [뜻대로 하세요]에서도 로잘린드는 너무나 멋지고 언변도 뛰어나죠. 여기에도 그녀에게 반하는 여자가 나와요. 물론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도 있고요.
N : 그런 작품들이 코미디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이성인 줄 알고 좋아했는데 동성으로 밝혀지는' 과정의 좌충우돌이잖아요. 결국 이성애가 전제되는 걸 당연시한 결과예요. 진짜 성별이 밝혀졌을 때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고 관계가 유지되거나 발전하는 결말이 별로 없죠.. 평생 당연하게 이성애자로 살아온 사람에게 자기가 좋아한 사람이 동성이란 게 밝혀지는 순간은 당연히 충격이겠지만, 이 사람을 언제 좋아했나 싶게 너무 쉽게 물러서잖아요. 만약 동성애나 이성애나 별 구분없이 존중되고 당연시되는 사회라면 그런 해프닝 자체가 코미디가 될 수 없죠. 코미디로서의 위력은 떨어지니까요.
반대의 경우인 <커피 프린스>도 마찬가지예요. 공유가 윤은혜에게 "네가 남자든 여자든, 사람이든 외계인이든 이제 상관없어. 갈 데까지 가보자"라고 고백하잖아요? 난 그때 드라마 보다가 "한국드라마가 드디어 한 단계 위대한 진보의 발을 디뎠다!"고 외쳤어요. 평생 이성애자로 살아온 애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 거니까요. 하지만, 이것은 한계가 있는 진보예요. 둘이 연결되는 순간은 이후에 성별이 밝혀질 것을 전제하고 있죠. 동성애 코드란 게 인물들의 갈등을 만들기 위한 소재로 삽입됐다가, 그 갈등이 해소된 후 주인공들은 너무나 안도를 하며 이성애 커플을 이루며 끝이 나죠. 해피엔딩이 되려면 이성애로 복귀를 해야 하다니, 오히려 이성애를 너무나 강조하는 결과가 돼버려요.
S : 드라마를 위해 동성애가 재미의 요소로 삽입된 케이스죠. 동성애를 포용하자거나, 동성애 역시 사랑의 한 모습일 뿐이라는 걸 보여주는 의도가 아니고요. 그저 개인적인 분노나 선택으로 끝나기 마련이죠. 남장여자들의 경우 처음부터 여자란 걸 모두가 아는 경우도 있고 감추는 경우도 있는데, 여자들은 어느 쪽이든 좋아하는 편이에요. 성적인 함의보단 동경에 가깝죠. 성적인 게 있다 하더라도 여자들의 사랑은 결국 사라지고, 남장여자는 남자를 선택하죠.
N : 이 사회에서 안전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한계겠죠. 공중파 드라마는 더할 거고. 남장여자물을 소비하는 심리도 거기에서 많이 벗어나 있지는 않아 보여요. <바람의 화원>에서 문근영과 정향, 이른바 닷냥커플도 결국 이뤄질 수 없는 사이로 처음부터 전제돼 있잖아요? 아, 그런데 의외로 이 커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대놓고 많아서 놀랐어요. 여여커플에 대한 지지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난 적이 있던가요?
S : 레즈비언 아님에도 지지하는 층이 있긴 해요. <마리아님이 보고계셔> 같은 만화의 경우 그랬죠. 이것도 여자들의 하위문화 시장에 속해요. 남자들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 경우 성적인 게 전제돼 있죠.
N : 만약 남장여자와 여자가 좋아하다가 성별 밝혀지고 어쩌고 한 뒤 둘이 결국 연결돼서 같이 떠난다면, 사람들이 좋아할까?
S : 안 좋아할걸요. N씨를 위해 <소녀혁명 우테나>란 애니메이션을 추천해드리죠. 인기가 없어서 망했으나 광팬들 사이에서는 전설이 된 작품이에요. 좋아하던 왕자를 찾는 여자주인공이, 그 전까지 자신이 왕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남장을 해요. 결국 여자애랑 잘 되는 엔딩이죠. 남자도 많이 나오고 심지어 남녀간 베드씬이 나오는데도 남자들은 로맨스의 축이 아니에요. 주축은 우테나와 흑인소녀가 영혼까지 교감하게 되는 관계가 되는 거죠.
그런데 남자들은 왜 남장여자를 싫어하지?
N : 이유가 뭘까요. 남자들이 남장여자물을 싫어하는 건. 역시 성적으로 어필을 안 하니까?
S : 힐러리 스웽크가 나왔던 <소년은 울지 않는다>가 생각나는군요. 진지한 남장여자물이었죠.
N : 마지막에 힐러리가 스웽크가 죽는 게, 성깔나쁜 남자한테 잘못 걸려서라기보다는, 감히 남자의 우월한 영역을 여자 주제에 침범했다는 것에 대한 응징과 처벌의 의미가 강해 보였어요. 남장도, 여자를 사랑하는 것도 둘 다 말이죠. 담배 피우는 여자에 대한 거부감도 결국 그거잖아요. 남자들의 영역을 여자가 침범한다는 느낌이요. 마치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듯... 원래 영화에서 외계인이라는 게 낯선 존재에 침략자 이미지죠. 그래서 '악'인 거고.
S : 역시 N씨는 너무 성 대결적이라니까요. 그래서요?
N : 남장여자란 건, 남자들한텐 마치 지구인으로 변장한 외계인 같은 느낌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팀 버튼의 <화성침공>에서 껌 씹는 외계인 여자, 기억나죠? 인간 여자로 변장은 했는데 좀 부담스러운. 이쁘긴 무지 이쁘지만 말예요.
S : 으악, 영화 이미지 중에서 가장 무서운 캐릭터였어요! 그런데 남자들이 정말 남장여자를 그렇게 느낄지 어떨지는... N씨도 결국 추측을 하는 거니까, 나중에 남자들에게 직접 물어보도록 하죠. 사실 요즘의 남장여자물은 주로 코미디나 눈요기 쬭이죠. 대체로 귀여운 이미지고요. 역시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 거겠죠. 어떤 욕망을 투영하기보다는 소비쪽에 더 가까워요.
N : 내가 남장여자를 좋아한 이유들을 쭉 말하고 보니까, 처절하기도 하고 구차하기도 한 느낌이에요. 이미지 소비는 처절하지 않죠. 그건 세상이 변했고, 조금은 좋아졌다는 증거이기도 할 거예요. 참 아이러니한 결과죠.
S : 엔터테인먼트란 게 언제나 그런 면이 있죠. 그래서 재미있고요.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