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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몸을 갖게 된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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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몸을 갖게 된 남자들

[뷰포인트] 츠카모토 신야의 영화 <철남> vs. 연극 <강철왕>

살아서 숨쉬는 인간의 육체가 강철로 변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혹은 어떤 이유로 인해 신체가 철로 변할까. 이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답변이 있다. 츠카모토 신야의 영화 <철남> 시리즈와 고선웅 작, 연출의 연극 <강철왕>이 그것이다. 두 작품 모두 남성의 육체가 철로 변한다는 동일한 아이디어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작품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다르다. 영화와 연극이라는 매체의 차이도 있겠지만, 육체의 강철화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강철화된 몸과 가족, 특히 아버지와의 불화라는 동일한 소재는 두 작품에서 어떤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을까.

생체무기인 아들, 무기 개발자인 아버지와 불화하다

츠카모토 신야의 <철남>은 1, 2편으로 제작되었으나 내용상 연속성을 지니지는 않는다. 저예산으로 기발하게 찍었던 <철남1>(The Ironman, 1988)은 현기증 나는 카메라 워크 만큼 톡톡 튀는 B급 감수성을 보여주었다. 그에 비해 <철남2>(Tetsuo II: Body Hammer, 1992)는 예산이 늘어난 만큼 화면의 색채는 좋아졌으나 상상력의 날카로움은 무뎌졌다. 템포가 느려졌고, 어떤 의미에서는 진부해졌다. 가족의 카테고리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이 지나치게 쉬워 보였던 탓이기도 할 것이다. <철남2>의 경우 철남으로서 자각을 시작하는 것도 가족 때문이고, 악당의 보스는 동생이며, 과거사는 가족 비극이 된다. 가족으로 시작해서 가족으로 끝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몸이 강철로 변하게 되는 건 강인한 육체에 대한 소망 때문이다. <철남1>에서도 끊임없이 강철과 운동선수의 구릿빛 육체가 교차된다. <철남2> 역시 연장선에 있다. 아들을 유괴당하고도 어찌할 줄 모르는 연약하고, 왜소한 남자는(그는 매우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있기도 하다!) 분노의 끝에서 강철로 변한다. 유약함에 대한 뼈저린 분노가 육체의 변성을 가져온다. 강한 남자와 강한 육체. <철남> 시리즈가 모두 군국적인 색채를 보이면서 끝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육체의 폭력성이 극단적으로 드러날 때가 전시(戰時)이기 때문이다.

▲ 츠카모토 신야 감독의 데뷔작 <철남>.

<철남2>에서는 생체무기를 개발하려는 아버지에 의해 형제가 모두 철남이 된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는 장면을 보고, 철남은 아버지를 죽이게 된다. 가족 관계가 파괴될 때 철남은 자신의 육체를 무기로 사용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들이 유괴되자 그동안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아왔던 주인공은 철남으로 변신한다. 울타리에 대한 방어 본능이 공격성으로 치환되는 셈이다. 작품에서는 '살의' 혹은 '파괴에 대한 에피파니'라고 말하며 철남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설명하지만 외부로서의 공격이 있지 않으면 온순한 양 같다고 할 때 오히려 방어적 공격에 가까워 보인다.

결말에서 철남의 폭주로 도쿄 시내가 초토화된다. 황폐해진 거리를 멀리서 잡던 카메라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폐허더미 위에 서 있는 철남 가족들을 비출 때는 섬짓하다. 연약한 남자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결국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부숴버린다. 1992년에 제작된 이 생뚱맞은 가족 찬가는 코믹하다 못해 무섭다.

이 극단적인 가부장적 욕망은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아버지가 아들을 무기로 사용해 전쟁터에 내몰고 어머니를 학대해서 죽였다면, 그 아들은 유괴된 자식을 되찾기 위해 무기가 되고 아내의 손에 의해 폭주를 멈춘다. 아버지와 아들은 정확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철남2>는 결국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전(前) 세대에 대한 막연한 혐오감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는 자신의 현재의 폭주가 결국 과거에 저지른 죄 혹은 상흔에서 유래한다는 퇴행적 항변이기도 하다.

예술가 아들, 자본가 아버지와 불화하다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2월 15일까지 공연하는 연극 <강철왕>은 가족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강철이 되어버린 사내의 이야기다. 아버지를 향해 총을 난사하던 철남과 달리 강철왕은 분노를 고스란히 참고 견디다 철덩어리로 승화(?)해 버린다.

▲ 연극 <강철왕> 포스터
'스트레스, 스테인레스가 되다!'라는 기발한 카피를 보았을 때 현대인의 스트레스 증후군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다. 하루종일 스트레스에 묻혀 살아가는 전형적인 샐러리맨이 야근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강철로 되어버리는 상상을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 좀 많이 달랐다. 무엇보다 주인공은 무용수 아들이었고, 강철공장의 사장인 아버지와 대립하고 있었다.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유머 코드를 다루고 있으나 내용의 뼈대는 의외로 시대착오적이었다. 고리타분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문제의식이 이전 세대에 가까웠다는 이야기이다. 예술을 하고 싶어하는 아들과 대를 이어 사업을 하길 원하는 아버지의 갈등은 1980년대의 천민 자본주의가 낳은 부자관계와 닮아있다. 아버지가 1980년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수출 품목 중 하나인 철강산업을 하고 있다는 점 또한 그러하다. 악착같이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돈을 긁어모으고 있는 아버지와 먹고 사는 데 하등 도움이 안 되는, 더군다나 남자들이 보기에는 연약해 보이는 무용을 하는 아들. 이들 부자간의 불화가 어딘가 모르게 '올드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2009년 현재는, 문화상품이 산업이 되는 시대인 까닭이다.

현재 대한민국과 서울시는 문화산업에 투자를 못해서 안달이다. 한류를 시작으로 드라마, 영화와 애니메이션과 뮤지컬에 쏟아졌던 투자자본이 무엇을 의미하던가. 왜 자꾸 문화예술이 '문화산업'이 되고,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언술로 설명이 되던가. 오늘날의 아버지는 아들을 유학을 보내서라도 재능을 닦아 세계무대에 입상시키는 것이 꿈이다. 영화 한 편 잘 만들면 자동차 2만 대를 파는 것과 같다는 캐치 플레이 역시 귀에 익다. 미술품이 투자의 대상으로 은밀하게 거래되고 있지 않던가. 더 이상 예술가 아들은 자본가 아버지와 불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여서 문제다. 부자관계가 너무 절친하고, 상호공생적이어서 이젠 불화하기가 힘들 지경이다. 미래의 예술가들은 자본가 아버지의 후원 아래에서 찬란하게 꽃필 것이다. 그 쓰디쓴 깨달음에 쓴웃음을 짓는다.

한때 예술가는 '자신을 가만두지 않는' 세상에 대해 분노하며, 돈과 유명세 모두를 원하지 않는다고 스트레스를 받았던 모양이다. 왜 이렇게 변화의 속도가 빠른가. 한 연출가가 그려내는 예술가상과 사회상이 시대의 속도를 못따라갈 정도가 되었다. 한 세대가 지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변화의 속도가 더 빠른 셈이다. 그 속도에 스트레스를 받아 스테인레스가 되어 버릴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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