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버스>는 의도적으로 섹슈얼리티를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세계무역센터가 서 있던 그라운드제로를 창문 너머로 보여주는 것이나, 60년대를 연상시키는 반문화운동의 용사들을 등장시키는 것이나, 커밍아웃하지 않은 전직 뉴욕 시장의 입으로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는 넋두리를 들려주는 장면에서 영화는 단순한 '포르노그래피'로 만족할 수 없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 영화를 보고 '야하다'는 표현을 쓰는 건 그래서 좀 격에 맞지 않는 일이다. 야하다기보다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쉽게도 극장 개봉용 판본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지만, 이 영화를 '야한 영화'에서 구원하는 건 역설적으로 성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그 사실성에 있다.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을 보고 야하다고 생각하는 게 좀 이상한 것처럼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야한 게 아니고 불쾌한 것이라고 해야 옳다.
▲ 숏버스 |
<숏버스>는 젠더나 페미니즘처럼 이론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냥 소재로 사용하고 있을 뿐, 주로 그려내는 건 이성애와 동성애이고, 궁극적으로 이 둘이 만나는 지점으로 오르가즘을 설정해놓았다. 이 영화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오르가즘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보여주려는 건 뉴욕의 '자유주의.' 여기에서 자유주의는 '리버럴리즘'이라고 표현해야 적절하게 뉘앙스를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해방되어서 자유로운 개인들을 지칭한다. 이게 바로 뉴요커의 자부심이다.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뉴욕의 포용주의에 대한 긍지를 빼놓는다면 뉴욕은 시체들의 도시일 뿐이다.
<숏버스>는 겉으로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60년대여 다시 한 번'을 외친다. "60년대보다 못하지만" 그래도 뉴욕은 여전히 그때와 다를 게 없다는 주장이 영화에 깔려 있다. 9.11테러가 가져다준 뉴욕의 파괴는 자유와 해방의 선봉에 서 있다고 믿었던 뉴요커의 이상에 대한 파산선고이기도 했다. <매트릭스>의 음울한 선언처럼, 뉴욕은 '실재의 사막'으로 화해버렸다. <숏버스>는 이렇게 심각하게 상처받은 뉴요커의 자존심에 대한 치유제이다. 루시디가 <분노>라는 소설에서 묘사한 그 뉴욕에 대한 하나의 처방책이 <숏버스>인 셈이다.
따라서 이 영화를 미국 판 '386세대 영화'로 보는 것도 크게 틀리지 않은 판단이다. 그러나 법과 정의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한국영화의 경우와 달리, 이 영화는 개인의 욕망을 통해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대명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준다.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지점은 여기이다. 한국에서 <숏버스>를 보고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자유주의의 희망을 발견할 이들이 누구일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보는 순간 이 아이러니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다. 뉴욕의 자유주의를 역사의 희망으로 간직한 이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한국의 중간계급일 테니 말이다. 익숙한 분법으로 본다면 <숏버스>의 주요 관객은 백영옥의 소설 <스타일>에 등장하는 '강남좌파'일 가능성이 더 큰 것이다.
▲ 숏버스 |
심의문제를 둘러싼 소송에서 <숏버스>를 '위험하지 않다'고 한국의 사법부가 판정할 수 있었다는 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 영화가 섹슈얼리티를 노골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그 자체에서 이 영화의 급진성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 영화의 관점은 페미니즘적이지도 않고 젠더이론적이지도 않다. 억압의 가설에 충실히 따라가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전적 관점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오르가즘의 신화에 대해 설파하는 대사도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오르가즘을 신화라고 규정하는 게 아니라 여성의 질 오르가즘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남성 성기의 삽입만이 여성을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게 만든다는 그 판타지를 공격하는 게 비판의 핵심이다.
게다가 <숏버스>가 보여주는 낙관주의는 섹슈얼리티의 범주만을 강조함으로써 엄연히 현실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계급이나 인종 문제를 덮어버린다는 측면에서 정체성 정치학의 한계를 고스란히 답습한다. 사회적 소수자로서 동성애자들이 권익을 되찾는 건 중요하지만, 백인 동성애자와 흑인 이성애자, 또는 백인 중간계급 동성애자와 이민자 이성애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관계를 해명하지 못한다. 섹슈얼리티의 해방이 궁극적인 자유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60년대적 난관은 뉴요커의 상처를 치유하기에 적절한 명약일 수 있겠지만, 새롭게 변화한 정세에서 뉴욕 문화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성찰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남성 성기가 이만큼 적나라하게 자주 화면에 비치는 경우가 없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획기적인 영화이지만, 한국에서는 이마저도 '모자이크'에 거세당해 버렸다.
글쓴이 이택광은 현재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평론가로 전방위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영국 워릭대학에서 철학 석사와 셰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문화이론 및 문화연구를 전공했다.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들뢰즈의 극장에서 그것을 보다』 『민족, 한국 문화의 숭고 대상』 『세계를 뒤흔든 미래주의 선언』 등의 책을 썼으며 최근 『뉴 레프트 리뷰』 번역 및 편집에 참여했다. 이 글을 시작으로 프레시안에 '이택광의 영화읽기'를 연재하며 본격적인 영화평론가로 활동할 예정이다.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