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도 골수팬을 상당수 확보하고 있는 그가 <도쿄 랑데부>를 들고 전주를 찾았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한국 방문이다. 30일 한국에 도착해 개막식에 참석한 그는 2박 3일간 GV를 비롯해 짧은 일정을 소화한 뒤 2일 일본으로 다시 출국했다. <도쿄 랑데부>는 일과 독립에 대한 고민이 많은 세 명의 젊은이가 우연히 한 집에 살면서 각자 자신의 길과 희망을 찾아간다는 내용이다. 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세 주인공 중 집주인의 손자인 노가미로 등장한다. 노가미의 할아버지와 작은 할머니의 사연이 곁들여지면서 구세대로부터 용기와 사랑을 배우는 신세대의 이야기로 나아간다. 이케다 치히로 감독의 데뷔작인 이 영화는 일본영화계의 거장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으로부터 격찬을 받은 바 있다.
▲ 일본의 중견배우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자신의 주연작 <도쿄 랑데부>를 들고 전주영화제를 찾았다.ⓒ프레시안 |
1일 니시지마 히데토시와 인터뷰를 가졌다. 낮 12시, 그는 아직 전날의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전날 개막식 리셉션에서 상당히 늦게까지 영화인들과 어울린 듯했다. 그러나 그는 시종일관 정중하고 친절했으며, 매 질문마다 진지하게 대답을 주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내 머릿속의 지우개>의 이재한 감독이 일본에서 만들고 있는 차기작 <사요나라 이츠카>의 촬영장에 있었던 그는. 정작 감독이나 스탭들은 아직 일본에 머무르고 있는데 자신이 먼저 한국에 와 있다며 기분이 묘하다고 했다.
화기애애하지만 긴장감이 감돌았던 <도쿄 랑데부> 촬영장
물론 각본이나 작품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그에게는 감독이나 스탭, 함께 일하는 동료배우들과의 관계가 영화를 선택하는 데에 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 그가 다양한 영화들에서 주연뿐 아니라 조연, 심지어 단역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도쿄 랑데부>에 출연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도쿄 랑데부>의 촬영장은 함께 출연한 다른 배우들과 유독 사이가 좋았기도 했다. 다른 촬영장에서도 그랬지만, <도쿄 랑데부>를 찍을 때 그는 자신의 촬영분이 없을 때에도 촬영장을 어슬렁거리며 동료 배우 및 스탭들과 어울리곤 했다. 그의 목소리에 슬쩍 들뜬 기운이 묻어난다.
▲ 니시지마 히데토시와 카세 료가 주연을 맡은 영화 <도쿄 랑데부>의 한 장면. |
하지만 이 촬영장이 마냥 편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니시지마 히데토시의 설명에 의하면, 이 영화의 촬영을 맡은 타무라 마사키는, "일본에서 내로라 하는, 일본이 자랑스러워 할 만한 촬영감독"이다. 타무라 마사키는 배우들의 동선이나 조명 등을 꽉 짜인 구도 안에 놓으며 구속하기보다는 배우들이 프레임 안과 밖을 자유롭게 오가는 쪽을 선호한다. 이는 분명 배우 자신이 스스로 이것저것 시도해볼 여지와 자유를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배우의 움직임을 계속해서 신경쓰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도 된다. 때문에 그는 언제나 동료 배우들이 언제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주시해야 했고, 혹시라도 예상 밖으로 움직였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재빨리 판단을 내려야 했다. 촬영장의 분위기 자체는 화기애애했지만 대신 다른 방식의 긴장감이 항상 흘렀던 셈이다.
직업은 영화배우, 본질은 영화광?
노가미의 작은 할머니 역으로 나왔던 배우, 카가와 교코에 대해 말할 때의 그의 모습이 인상깊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카가와 교코는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나루세 미키오, 구로사와 아키라 등 일본 영화사뿐 아니라 세계 영화사 전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감독들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다. 그것도 그들의 가장 유명한 대표작들에서 활약했던 전설적인 배우로, 일본 영화사의 산 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녀가 얼마나 위대한지 설명하던 그의 목소리는 담담한 어조에서 조금씩 열정과 경외의 분위기를 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그분과 같이 연기를 하는 영광을 얻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어요." 그때의 그의 얼굴엔 수줍은 미소가 어리며 눈은 꿈을 꾸듯 반짝였다. 그 자신이 30대 후반의 중견배우이면서도, 여전히 20대 초반 열혈 영화청년의 분위기가 배어나온다.
▲ ⓒ프레시안 |
그는 소문난 영화광이다. 팬들 사이에서는 그가 크리스마스에 예술영화관에서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영화 세 편을 연달아 보고 나왔다는 얘기도 회자되곤 한다(이는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스스로 밝혔던 일화이기도 하다). 이 얘기를 꺼내자 그는 민망한 듯 고개를 푹 숙이며 웃는다. 그는 이번 영화제 회고전의 주인공인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의 영화들에 관심이 간다고 말했다. 좋은 영화들이 잔뜩 상영되고 있는데 정작 자신은 그 영화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표했다.
한국영화에 관심이 많은 영화광 일본배우
그는 한국영화에도 관심이 많다. 홍상수, 김기덕, 봉준호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줄줄이 나왔다.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다른 젊은 한국감독들의 영화들도 궁금하다고 했다. 사실 그는 김기영 감독의 팬이기도 하다. 작년에 도쿄에서 반 정도 복원된 <하녀>를 봤다며, 너무나 아름답고 파워풀한 영화라고 감탄을 아끼지 않는다. 나는 혹시 이번 영화제에서 <하녀>의 완전복원판이 최초로 상영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냐고 물어봤다. 통역이 말을 전해주자마자, 그는 화들짝 놀라며 순간적으로 목소리 톤을 높였다. 정말이냐고, 재차 물어보며 티켓 카탈로그에서 상영일정까지 확인하더니 아쉬움과 섭섭함이 잔뜩 어린 감탄사를 내뱉는다. 과연 영화광이라는 소문이 틀리지 않구나 싶다. 의도치 않게 그에게 약을 올린 꼴이 됐다.
▲ 인터뷰 도중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전주영화제 티켓 카탈로그를 체크하고 있다. 그는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회고전과 김기영 감독의 <하녀> 완전복원판, 한국의 젊은 감독들의 영화에 관심을 보였다.ⓒ프레시안 |
어떤 영화들, 어떤 감독들이 영화인생에 영향을 크게 미쳤냐고 물어봤다. 아마도 통역 과정에서 "최고의 영화를 꼽으라"는 말로 전달이 됐던 모양이다. 그는 "그 질문은 너무나 어렵다"고 대답을 피했다. "세상엔 제가 아직 보지 못한 영화들이 너무나도 많은걸요." 이런, 이 대답은 진짜 영화광들이 하는 대답 아닌가. 그런 사람들이 대답하기에 가장 난처해하는 질문 중 하나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나 감독을 꼽으라는 것이다. "그 질문이 얼마나 대답하기 난감한지 안다"고 말하자, 그는 본심을 제대로 들켜 쑥스럽다는 듯 또다시 고개를 숙이며 활짝 웃는다. 대신 그는 최근에 인상깊게 본 영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체인질링>을 꼽는다. <그랜 토리노>는 아직 보질 못했다며, 일본에 돌아가는 대로 볼 생각이라고 한다.
이런 영화광이라면 연출에도 욕심을 낼 만한데, 의외로 그는 연출에는 전혀 뜻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감독들은 위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란다. 자신은 그저 영화와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좋은 사람일 뿐이라는 소박한 대답을 덧붙인다. <체인질링>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도 배우에서 시작하지 않았냐고 짖궂게 역공을 해봤지만 그의 대답은 단호하기만 하다.
성인남자의 진지함과 소년의 수줍음 사이
▲ 인터뷰 도중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니시지마 히데토시. ⓒ프레시안 |
그러다가 때때로, 그는 상대의 사교적인 멘트나 별로 웃기지 않은 농담에도 활짝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성인남자와 청년 사이, 매사에 진지하고 성숙하게 대처하는 단단한 사람처럼 보이던 그가 순식간에 천진난만하면서도 수줍은 소년으로 변신하는 때이다. 통역자가 낀 고작 30여 분의 대화에 나는 완전히 무장해제를 당하고 만다. 이 사람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 계속 실없는, 그러나 별로 웃기지 않는 농담을 던진다. 그는 통역을 통해 내 말을 들을 때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웃기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웃어준다. 배우의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감수성을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함께 일을 하는 시간 동안 서로 편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몸에 밴 듯한 사람같다.
먹을거리로 유명한 전주인데 한국음식은 무얼 먹었냐고 물어봤다. 그는 상 한가득 반찬이 나오는 한정식을 꼭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영화제 스탭들이 추천해준 콩나물국밥도 아직 못 먹어봤단다. 대신 비빔밥을 먹었는데 정말 맛있더라고 했다. "정말 맛있어요"라고 우리말로 외친 뒤에 "정말", "진짜"를 반복하며 강조한다. 심지어 두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며 활짝 웃었다. 사실 그는 인터뷰장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에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라고 우리말로 인사를 건넸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다음엔 여유롭게 한국을 방문해 영화도 많이 보고 맛난 한국음식도 많이 시도해볼 기회를 갖기 바란다고 말했다.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심을 꽉꽉 눌러담아서. 다시 정확한 발음의 한국말 대답이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그는 한국말을 배우고 싶다고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
<도쿄 랑데부>가 과연 한국에서 개봉할지 아닐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이재한 감독의 <사요나라 이츠카>는 늦어도 내년에는 개봉할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의 팬들은 <사요나라 이츠카>가 개봉할 때쯤 그가 한국을 다시 방문할 것이라 기대해도 좋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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