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이 전해지자마자 전 국민이 애도의 물결에 동참했다. 하지만 전 국민이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의 안타까운 죽음에, 나는 혹은 우리는 왜 삐딱하게 추모할 수밖에 없는지를 말하고 싶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삐딱하게 추모하는 대표 주자는 분향소 주변을 경찰 버스로 통제하면서 '아늑한' 분위기를 조성한 경찰과 '방문객이 적으면 적을수록 안전하게 행사'를 치를 수 있기 때문에 '일반인이 이곳에 분향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힘든' 곳에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분향소'를 설치한 서울시, 그 외에도 김동길, 변희재, 보수 언론 등 참으로 많다.
그러나 이런 흐름과는 정반대 방향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삐딱하게 추모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의 공과나 평가와 상관없이, 그의 죽음을 삐딱하게 추모할 수밖에 없는 '독한 놈들'이 형성된 것은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 그 자신이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서 보인 '삐딱한' 애도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2003년 11월 4일, 한 달 사이에 노동자 네 명이 유명을 달리 하던 바로 그 시기 노무현 정부는 합동 담화를 통해서,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 달성을 위한 투쟁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자살로 인해 목적이 달성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대통령의 의중이 실린 메시지를 전했다.
아마도 나를 비롯한 적지 않은 분들이 바로 이 대목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 '망자에 대한 예의'라는 측면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극심한 격차를 느꼈을 것이다. 이랬던 이들은 모두 그의 재임 시절의 공과나 정치적 입장에 상관없이 지금 복잡 미묘한 심경에 처했을 것이다.
2003년 11월의 그는 노동자가 분신자살하고, 고공 농성 중에 자결하고, 먼 타지에서 농민이 자결하는 그 절망감과 절박함에 공감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투신자살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숭고함과 절박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일부 보수 세력의 모습에, 2003년 11월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겹쳐 보이는 것은 단지 내개 '독한 놈'이기 때문일까?
물론 나와 같은 '독한 놈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진심으로 추모하면 안 된다던가, 명복을 빌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우리의 '삐딱한' 추모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숭고함, 절박함 외에 사회적 억압으로 '죽음'을 택하는 모든 이들의 숭고함, 절박함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 기간에 고 박종태 열사를 추모하는 것은 '죽창 시위'이고, '밥그릇 챙기기'일 뿐이라는 생각은 2003년 11월에 고인이 범한 실수를 되풀이 하는 것이다. 사실 요즘 추모해야할 안타까운 '죽음'이 너무 많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고 박종태 열사와 용산 참사로 돌아가신 철거민 5명 외에도, 성적 비관 등으로 자살한 청소년들이 적지 않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삐딱하게' 추모하는 것은 장례도 끝나기 전에 그의 공과를 평가해야 한다거나, 그가 예전에 다른 이의 '숭고함'과 '절박함'에 공감하지 못했으므로, 우리도 똑같이 되갚아주자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망자에 대한 예의'에 대해선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것, 전직 대통령 외에도 노동자, 철거민, 청소년도 같이 추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꿈꾸던 '사람 사는 세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직 최고 지도자도, 일개 시민도 같이 추모를 받을 수 있다면 그의 '이상'에 좀 더 가까워진 사회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나와 같은 '독한 놈들'은 복잡 미묘한 심경을 숨기며 침묵만 지키고 있어서는 안 된다. 다른 많은 국민들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나 추모 행사도 참여하면서, 우리의 '삐딱한' 추모를 같이 해야 한다. 비록 추모의 대상이나 방식은 다를지라도, 그들의 죽음에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은 동일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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