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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의 빛과 그늘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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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의 빛과 그늘 (2/2)

[이슈 인 시네마] <아바타>의 진정한 성공요인은 무엇인가

<아바타>의 돌풍이 거세다. 국내에서 외화로는 최초로 천만 관객을 넘겼고, 전세계적으로는 <타이타닉>을 누르고 영화흥행사를 다시 썼다. 최근의 <아바타> 열풍을 보며 한국외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화이론을 가르치고 있는 김형래 씨가 <아바타>에 대한 글을 보내왔다. 기술적 혁신에 대한 감탄과 탄성, 그리고 서사에 대해 설왕설래하며 전국민적 화제가 되고 있는 <아바타>를 깊이있게 분석한 글이다. 길이가 긴 관게로 2회에 나누어 싣는다 - 편집자 주

(앞에서 이어집니다.)

그런데 모방의 역사를 추적해 보면 예술의 역사와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은 예술가와 시인을 이상 국가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젊은이들을 미혹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예술은 이데아의 그림자의 그림자, 즉 모방의 모방이다. 다시 말해 예술가들은 자연을 모방하는데 이 모방은 진리의 세계인 이데아에 대한 2차적 모방이다. 따라서 그는 예술을 열등한 것으로 보았다.

탁월한 모방에 대한 신화는 계속된다. 고대 그리스에 두 화가의 그림 경연대회에 대한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파라시우스와 제욱시스는 그림 경연을 벌인다. 제욱시스는 포도나무를 그린다. 그림이 완성되자 새가 이 포도나무 그림을 향해 날아오다 부딪힌다. 의기양양해진 제욱시스는 파라시우스에게 말한다. "자 이제 너의 그림을 보여다오. 저 커튼을 걷어보아라." 이로써 게임은 파라시우스의 승리로 끝났다. 왜냐하면 제욱시스가 가리켰던 커튼이 바로 파라시우스의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제욱시스는 새를 속였지만 파라시우스는 사람을 속였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모방의 신화가 있다. 솔거의 소나무 벽화도 새를 덤벼들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지 않는가.

모방의 역사는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의 발견과 더불어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한다. 원근법은 당시 프로렌스의 건축가였던 브루넬리쉬가 건축에 이용하기 위해 발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원근법은 이후에 독일의 화가 뒤러에 의해 체계화되어 피사체를 정확히 모사하기 위해 회화에 이용된다. 트롱프뢰유Trompe-l'eil, 즉 눈속임 그림 또한 그 기원이 그리스 로마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원근법을 이용한, 모방에 대한 욕구의 극치를 보여주는 회화의 한 기법이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발명도 인간의 모방에 대한 욕구를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예 중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다게르타입과 스틸사진 카메라, 무비 카메라의 발명으로 이어지는 모방의 역사는 인간의 모방에 대한 욕구를 가장 잘 대변한다. 그 중에서도 살아있는 인간을 실제와 똑같이 모방하려는 욕구는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영화에서 가장 잘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아바타>

그런데 이처럼 인간이 모방에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동시에 왜 영화에서 실제와 똑같은 모방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답이 될 수 있다. 미술사가들에 의하면 고대 동굴 벽화는 주술적이고 마술적인 목적 하에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원시인들은 동굴 벽에 동물의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 동물을 소유할 수 있다는 그림의 주술적 기능을 믿은 것이다. 즉 동굴벽화는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그림이라는 설명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사냥의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가능한 실제 동물과 가장 유사하게 그리는 것이었을 것이다.

인간이 모방에 몰두했던 또 다른 이유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관에서도 추론할 수 있다. 그의 예술관은 자연 모방론에 근거한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감각적인 외적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내적 자연을 모방하는 것, 다시 말해 보편적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즉 플라톤에게는 예술의 모방이 제2의 모방으로 진리 인식에서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모방은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 이처럼 비트의 시대, 즉 디지털 시대에도 모방의 욕구는 어쩌면 진리 인식에 대한 욕구와 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러한 욕구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아바타>에 열광하게 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 같은 가설이 너무 거창하게 느껴진다면 롤랑 바르트와 바쟁의 사진 이론에서 또 다른 가설을 찾아보자. 사진은 1839년 사진의 발명 이후 회화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그로 말미암아 20세기에 새로운 양식의 회화를 출현케 했던 모방의 대가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두 사람이 사진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아는 것은 사람들이 왜 그토록 모방에 몰두하는지에 대한 또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 롤랑 바르트(왼쪽)와 앙드레 바쟁.

바르트에게 사진의 본질은 죽음이다. 사진은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에 사형 선고를 내리고 시간을 파편화시키며 지나간 과거를 영원히 지속시킴으로서 과거의 실존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래서 그에게 사진은 "존재했던 것의 증거물"이다. 바쟁에게도 사진은 죽음과 관련이 있다. 그에게 사진은 방부처리 행위이다. 죽은 것을 영원히 보존하려는 행위이다. 사진은 죽음에 대한 저항과 영원성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모방하는 사진은 영원성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가장 잘 실현하여 주는 매체였다.

그러나 사진은 정지된 이미지만을 제시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영화는 살아 움직이는 이미지를 기록함으로써 망각과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인간의 희망을 오늘날까지 가장 잘 구현한 매체가 아닐까? 사람들이 비디오카메라의 등장과 함께 인생 전체를 기록하려는 욕구를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다른 한편 영화의 인기에는 미디어 기억이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대중 매체,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상 미디어에 익숙한 대중들은 전지구화된 오늘날 어느 나라에서든 공동의 미디어 기억을 소유하고 있다. 예컨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이들 대중의 기억 속에 영상의 파편으로 새겨져 있다. 더욱이 무채색의 인쇄매체로 각인된 기억보다 총천연색 영상으로 뇌의 스크린에 영사된 기억은 비교와 대조가 훨씬 쉽다. 대중들은 금방 표절 여부를 판별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표절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피해가는 <아바타>의 영상 이미지들은 오히려 대중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 지점에서 스토리텔링 자동생성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쾌재를 부를지도 모른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스토리를 테이터베이스화하여 그 스토리들의 우연적 혹은 의도적 배합을 통해 무한한 스토리를 생성해낼 알고리즘을 만들려고 한다. <아바타>는 그들의 연구에 희망과 정당성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디서 본 이미지, 어디서 들은 이야기들로 조합된 <아바타>의 이미지와 스토리가 그것을 말해준다.

<아바타>의 정치적 무의식

앞서 미국 본토에서 보수주의 단체들이 <아바타>의 정치적 알레고리를 비판하고 있다고 하였다. 영화가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과 아프간 전쟁 등 미국의 군사주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부시 정권이 원유를 확보하기 위해 이라크를 침공했듯이 영화에서 지구인들은 1킬로그램에 2천만 달러 하는 광물질을 확보하기 위해 판도라 행성을 침공한다.

▲ <아바타>

다른 한편에서는 영화가 인종주의와 백인 우월주의를 드러내고 있다고도 비판한다. 나비 족의 모습은 큰 키를 제외하곤 착취당하는 미개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인디언이나 아프리카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최첨단의 무기와 과학기술로 무장한 백인들은 그들보다 우월한 인종으로 그려진다. 나비 족을 지키는 최후의 구원자도 귀화한 백인이다. 이러한 설정이 감독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 내 소수민족에게 인종주의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이다. 감독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 분쟁이 사라진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했지만 이것은 미국사회에 대한 감독의 인식 부족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감독이 의도하지 않은 정치적 무의식에는 또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우리가 이 영화의 흥행을 무조건 반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선 영화가 제 3국에 상륙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 영화의 내용과 신기술은 유토피아적으로 홍보되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곧 배급과 상영 방식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적임이 드러난다.

영화는 제 3국에 대한 백인의 착취와 인종주의를 비판하고 이것을 대중예술이라는 외피를 빌려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영향력은 그 메시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영화의 기술력과 자본에 있다. 우리에게 메시지만큼이나 감동을 주는 것은 후자의 파급력이다. 막대한 자본과 기술력 그리고 유토피아적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우리의 영화시장을 장악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블록버스터 외화에 저항할 수 있는 토착 영화는 많지 않다. 그래서 블록버스터 영화의 후유증에 대해서는 늘 말이 많았다. <아바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곳곳에서 한국 영화 관계자들의 한숨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블록버스터 외화가 우리의 영화 시장을 단순히 장악한다고 투덜거리는 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와 같은 영화는 국내 영화계에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심어준다. 우리에게 블록버스터의 신화를 꿈꾸게 하고, 영화에서도 규모의 경제 논리가 통용된다는 믿음을 준다. 그래서 그들의 전략을 모방하게 만든다. 미래가 보인다. 그 결과는 시장의 불균형일 것이다. 소위 저예산 영화, 독립영화, 예술영화가 설 자리가 좁아지게 된다.

영화에서 규모의 경제 논리는 더욱이 영화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 공연들, 연극, 뮤지컬, 음악 공연 등의 균형적 발전을 저해한다. 그래서 영화에 천만 관객이 든다는 것은 무조건 환영할 만한 사건은 아니다. 이것은 문화의 편식을 의미한다. 즉 이러한 편식 증상은 영화 장르 내에서의 불균형뿐만 아니라 여타 예술 장르와의 불균형을 초래한다.

영화 시장만을 봤을 때 대형 영화의 성장은 전체 영화 시장의 파이를 늘릴 수 있는 견인차가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칫 예술에 대한 대중의 편식을 초래하여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영화 예술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예컨대 지금처럼 저예산 영화들과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불균형을 보이는 때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멀리 보면 영화 시장의 성장보다는 위축의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이것이 지나친 기우일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봉준호 감독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영화는 첨단 기술을 적용한다고 해서 흥행이 보증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CG나 3D는 영화를 표현하는 도구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보다 창의적인 스토리와 탄탄한 구성, 진정성 담긴 배우들의 연기가 영화의 핵심 요소라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또한 이 점이 바로 한국영화의 경쟁력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데일리 김용운 기자의 기사 재인용)

기술과 상상력, 그리고 자본

흔히 오늘날의 문화 현상을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와 비교한다. 무한에 대한 동경과 환상의 세계 찬미, 비합리성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낭만주의적 문화 현상을 오늘날에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리 포터>, <반지의 제왕>, <아바타> 등의 영화들은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한다. 마술과 환상, 그리고 외계 세계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력과 이런 상상력을 시각화할 수 있는 디지털 기술력이 제2의 낭만주의를 야기했다고 할만하다.

그러나 이런 등가적 비교에는 뭔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19세기의 낭만주의를 주도했던 것은 활자 매체였지만 오늘날의 낭만주의를 주도하는 것은 영화와 디지털 기술이라는 사실이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은 영화와 디지털 기술이 무한한 상상력의 비가시적 영역을 가시적 영역으로 불러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이러한 상상력의 가시화를 가능케 한 것이 거대 자본이라는 사실에 있다. 과거에는 이런 상상력을 펼치는 데 있어 매체의 전환(비가시적인 것에서 가시적인 것으로)이 필요 없었고 막대한 돈을 들일 필요도 없었다. 종이와 펜만 있으면 어떠한 상상도 가능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자본과 기술의 도움 없이 낭만주의적 상상력의 부흥이란 기대할 수 없다.

현대의 낭만주의는 과거와 달리 이제 더 이상 비합리성을 근거로 삼지 않는다. 여기에 과거의 낭만주의와의 또 다른 차이가 있다. 과거의 낭만주의는 기계적 사고와 합리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오늘의 낭만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기술과 합리주의를 근간으로 부활·부흥하고 있다. 자본과 기술은 오늘날의 사회를 합리주의 사회로 만드는 근간이다. 바로 이점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는 현대의 낭만주의를 오해할 수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에서의 낭만주의는 자본과 기술이 없다면 낭만주의적 상상력에 제한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오스트리아의 미디어 미학자 페터 바이벨은 디지털 미학이 자본주의 미학인 전통 미학으로부터의 해방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그는 기술과 자본의 관계를 독립적으로 간주하고 기술이 자본에 대한 예술의 종속성을 해방시킨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 의하면 칸트, 헤겔, 하이데거의 전통 미학이 예술 작품의 상품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다. 이들이 작품의 배후에 존재한다고 규정하는 '천재 작가', '정신', '존재'라는 개념은 기술복제 예술 작품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예술 작품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었지만 디지털 복제 예술에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벤야민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예술 작품의 아우라 개념은 오늘날의 테크노 아트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통 예술 시장에서는 그런데 그 아우라 류의 개념들이 작품의 상품성을 결정하는 요소였고 이것이 자본주의적 예술 시장을 합리화시킨 개념들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테크노 아트가 비자본주의적 예술인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전통적인 미학 이론과 오늘날의 테크노 아트가 결합하여 더욱 공고한 자본주의적 예술 체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특히 예술의 자율성을 의미하는 칸트의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는 개념은 낭만주의 예술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즉 낭만주의적 환상의 세계는 예술의 자율성을 한껏 과시한 예술 경향이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시각 낭만주의(오늘날의 낭만주의가 시각 예술인 영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역시 예술의 자율성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활자 낭만주의(19세기 낭만주의)와 동일하다. 그러나 활자 낭만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시각 낭만주의가 페터 바이벨의 주장과는 달리 훨씬 더 기술과 자본에 좌우된다는 사실이다.

상품이면서 동시에 문화인 영화가 자본과 기술에 좌우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이러한 경향은 국지적이 아니라 전지구적이 되었다. 이것으로 발생하는 문제는 좀 더 거시적으로 말하자면 앞서 언급한 대로 문화의 다양성 대신 획일성의 지배, 예술 장르 간의 균형 발전 저해 등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우려는 쉽게 발화되지는 않지만 사회 전반에 깔려있다.

<아바타>에 대한 기존의 찬사와 비판은 지금까지 각각 기술력과 내용을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밑에 깔린 자본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본에 대한 비판이 없이는 <아바타>가 유포하는 정치적 이념들은 한낱 공허한 염불로 끝나버리고 진보장사의 구실을 만들어주게 될 뿐이다. 따라서 이제 <아바타>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기술력과 내용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사를 벗어나 영화의 형식으로서의 기술과 자본에 대한 비판과 반성으로 옮겨가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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