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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무현의 실패…더 포퓰리즘적이지 못한 탓이다"

[기고] 한국에서 '좌익 포퓰리즘'을 상상한다

반독재 개혁 자유주의 정부였다고 할 수 있는 노무현 정부는 의회 과반수를 차지한 2004년에, 이른바 '4대 개혁 입법'을 추진했다. 그것은 물론 진보가 실현해야 하는 중차대한 정치개혁 의제였다. 그런데 만일 무상 급식, 무상 보육, 무상 의료, 대학 등록금 무료와 같은 의제로 구성되는 '4대 사회 경제 개혁 입법'을 급진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다면 어떠했을까.

당시 많은 보수 언론은 4대 개혁 입법을 추진하는 노무현 정부를 '포퓰리즘'이라고 격렬한 비판을 했다. 4대 사회 경제 개혁 입법을 제기하면 아마 '슈퍼 포퓰리즘'이라는 융단 폭격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만일 여기서 상상한 '좌익 포퓰리즘'의 관점을 도입하여, 4대 개혁 입법 과정에서 "노무현 정부는 보수의 비판처럼 포퓰리즘이어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이슈에서 '충분히 포퓰리즘적이지 못해서 '실패'했다'"라고 평가한다면, 상황을 전혀 다르게 해석해볼 수 있다.

아시아의 많은 자유주의적 민주 정부들에 비교하여 본다면 노무현 정부는 상대적으로 '비타협적인 정치적 개혁주의'를 담지하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더 비타협적인 사회경제적 진보주의로 나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성장 전략을 구사하는 방향으로 비타협적으로 나아갔다. 이 점이 기득권 세력이 강력하게 포진하는 제도권을 우회하여 다양한 사회경제적 포퓰리즘 정책을 시행하였던 타이의 '권위주의적' 포퓰리스트 탁신과 노무현이 구별되는 점이다.

대의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의 괴리 속에 포퓰리즘의 동력이

포퓰리즘 논쟁은 <한겨레> 기사를 계기로 시작했다. (☞관련 기사 : 포퓰리즘 민주주의 '병리 현상' 아닌 '필수 요수') 이 기사는 최근 번역 출판되는 라클라우의 <포퓰리즘의 근거에 관하여>와 아르디티의 <자유주의 가장자리의 정치>에 대한 소개를 통하여, "포퓰리즘을 현대 정치의 병리적 이상 징후로만 바라보던 관점에서 벗어나, '현대 정치의 일반화된 특성'이자 '민주주의의 필수불가결한 구성 요소'란 차원에서 새롭게 조명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이에 대해 신진욱은 포퓰리즘, 특히 우익 포퓰리즘의 반민주주의적 성격을 주목하면서 그것을 규범적으로 비판하고 동시에 그것이 건강한 '대중 민주주의적 동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에 따르면 포퓰리즘은 "'피플'에 호소하여 동의의 기반을 구축하려 했지만, 실제로는 '피플의 자유와 참여, 인권과 정의를 억압"하는 것이기 때문에, 포퓰리즘과 참된 민주정치를 구분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관련 기사 : '대중 민주주의'와 '포퓰리즘' 구분해야)

이에 대해 안병진은 "포퓰리즘=우익, 좌익=대중 민주주의"라는 등식을 넘어서서 우익 포퓰리즘이 대중을 전유하는 지점을 고민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진보는 민주적이고 보수적 병리적이라는 테제는 그 의도와 달리 보수가 대중적 욕망과 결합하는 깊이와 정도를 과소평가하게 만든다"라고 말한다. (☞관련 기사 : '진보는 대중 민주주의' '보수는 포퓰리즘' 이분법적 구분 깨야)

이후 이동연은 약간 다른 각도에서 신진욱과 안병진이 포퓰리즘의 '근대적 형태'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탈근대'적 성격을 드러내는 새로운 대중적 포퓰리즘 현상을 주목하고, 그런 '탈근대적 포퓰리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요소만이 아니라 문화적, 감성적 요소를 내장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관련 기사 : 포퓰리즘에 담긴 정치적 무의식 읽어야)

필자가 볼 때 포퓰리즘 논쟁에는 3가지 쟁점이 있다. 포퓰리즘의 동력이 어디서 발생하는가, 포퓰리즘의 동력은 어떤 복합적 성격을 갖는가, 포퓰리즘적 동력이 어떤 지향의 정치적 에너지로 현실화되는가하는 점이다. 신진욱이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쟁점을 다루었다고 하면, 이동연은 두 번째 쟁점을, 안병진은 첫 번째 쟁점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약간 다른 방향에서 포퓰리즘 논쟁을 한국 진보의 전략적 실천과 연관시켜 확장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포퓰리즘에 대한 최근의 새로운 논의들은 진보의 관점에서 어떻게 우익 포퓰리즘이 대중적 동원에 성공하는가를 재성찰할 것인가 하는 데에 그 문제의식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문제의식을 예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필자는 한국의 맥락에서 '좌익 포퓰리즘'을 상상해 본다면 어떤 것일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자 한다. 사실 2007년 초 노무현 정부 하에서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둘러싸고 최장집-조희연-손호철 간에 전개된 이른바 '진보 논쟁'에서도 필자는 '진보적 민중주의'라는 개념으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드러낸 바 있다.

▲ 노무현은 개혁 정치를 추진하는데 있어서 '포퓰리즘'이어서 문제가 아니라 더 '포퓰리즘'적이지 못해서 실패한 게 아닐까? ⓒ프레시안

박정희는 정확히 우익 포퓰리스트

사실 필자의 시각에서 보면 박정희는 정확히 '우익 포퓰리즘' 리더였다. 예컨대 새마을운동은 초기 최고 책임자가 '내무부 장관'이었을 정도로 명백한 '관제 동원 운동'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어떤 관제적 운동-새마을운동-은 대중적 지지자를 남기고, 어떤 관제적 운동-제2건국위원회-은 지지자를 남기지 못하는가를 진보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포퓰리즘 논쟁이 의미를 갖는 지점도 여기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포퓰리즘적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제도화된 정치에 의해 배반당한 좌절과 욕망을 누가 대의하는가에 달려 있다. 새마을운동은 명백한 관제 운동이었지만, 대중의 요구를 전유하는 방식으로 지지자를 남겼다. 좌파 논의 속에서 포퓰리즘의 재평가는 바로 이러한 한국에서 급진적 상상력의 확장이라는 식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학문적 논의로 왜소화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포퓰리즘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통상 인민주의 혹은 민중주의라고 변역되는 포퓰리즘은 한국에서는 인기영합주의 그리고 제도적 수단을 무력화한 대중 동원 전략 같은 '행태적 포퓰리즘'을 중심으로 부정적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필자는 포퓰리즘의 합리적 핵심을, 제도적 통로에 의해서 반영되지 않는 대중들의 정치적·사회경제적 요구들을 정치 지도자 혹은 세력이 특정한 방식으로 수용·전유하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스스로의 대중적 기반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본다.

라클라우의 표현을 빌면, 포퓰리즘적 정서는 그것을 "수용할 수 없는 제도적 체계의 무능력"에서 나타난다. 근대 민주주의의 이상으로서의 인민 민주주의와 현실로서의 '초라한' 대의 민주주의 간의 괴리에서 발생하는 인민의 불만과 과절이 포퓰리즘의 출발점이다. 이 점을 최한수는 "정치가 인민의 일반의사의 표현"일 것을 지향하는 인민주의와 민주주의의 괴리의 문제로 지적한 바 있다(☞관련 기사 : 이념으로서의 '포퓰리즘').

그러나 이러한 정서가 거의 예외 없이 우파의 포퓰리즘 정책 안으로 흡수·통합되어 우파의 정치적 토대가 되고 있다는 것이 필자가 고민하는 점이며, 최근 서구에서 포퓰리즘을 좌파가 새롭게 분석하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여기서 안병진의 표현대로 '보수가 대중적 욕망과 결합하는 깊이와 정도'를 진보가 응시해야 할 필요가 제기된다.

문제는 한국의 분단 현실 및 강고한 보수의 힘이 포퓰리즘이라는 부정적 규정을 통하여 진보의 급진적 상상력을 제약한다는 점이다. 지젝은 <전체주의가 어쨋다구?>에서 전체주의라는 '가상의 적' 속에서, 우파와 좌파의 근본적인 차이를 가리고, 좌파의 급진적인 기획의 상상력이 질곡된다고 말한다.

지젝의 이러한 '역설적 독해'는 심지어 스탈린주의, 파시즘 등에 까지 확장된다. 그는 "진리를 앞세워 폭력과 공포를 휘둘렀던 혁명적 실험들, 곧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 러시아혁명과 스탈린 체제,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이 여기서 적극적으로 또는 긍정적으로 참조된다. 이 실패들이 실패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해방적 고갱이'가 거기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표현을 확장하면, 포퓰리즘, 공산주의, 좌익, 좌파 등의 언어들은 진보와 개혁 세력의 급진적 상상력을 제약하는-그래서 자유민주주의의 헤게모니를 보장하는 복합적 임무를 수행하는-일종의 지적인 '구멍마개'의 구실을 하는 지도 모른다. 허경영의 정치 개그는 제도화된 정치에 의해 실현될 수 없는 '급진적인 요구와 불만'이 개그의 형태로서만 정치의 장에 들어온다는 것을 슬프게 말해준다.

포퓰리즘이라는 언어는 진보의 상상력을 제약하는 구멍마개?

최근 타이의 정치적 갈등에 대해서 <조선일보> 4월 15일자 사설은 다음과 같이 보여준다.

"탁신 지지층이 부패한 탁신을 못 잊어하며 거리를 휩쓸고 있는 이유는 탁신이 폈던 포퓰리즘 정책의 맛을 잊지 못해서다. 그는 집권 직후 농가 부채를 3년 유예하고 모든 국민이 30바트(1050원)만 내면 기본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했고, 도시와 농촌 간 소득 격차를 줄인다며 농촌 마을마다 100만 바트(3500만원)씩 나눠줬다.

이런 선심 정책이 국가 재정을 바닥낸 건 당연한 일이다. (…) 한 번 포퓰리즘에 중독된 민중에겐 어떤 해독제(解毒劑)도 약효가 없다. 타이만 그런 게 아니다. 20세기 전반기 선진국 문턱까지 올라섰던 아르헨티나 등 남미 국가들이 포퓰리즘에 맛들인 국민의 비위를 맞추다 후진국으로 다시 굴러 떨어졌다.

지금 국내에서도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야가 작심한 듯 갖가지 선심 정책을 풀어놓고 있다. 민주당이 1조50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초·중학생 548만 명에 대한 무상급식을 대표 공약으로 내세우자, 한나라당은 이에 질세라 지난 한 달 동안 총 1조2200억여 원의 예산이 필요한 9개의 친(親)서민 정책을 발표했다. 이 나라 정당 수준이 이 지경이니 빨간셔츠와 노란셔츠가 부딪쳐 피를 뿌리는 타이 사태가 남의 일 같지 않다."


정확히 바로 이 지점에서 포퓰리즘이라는 부정적 규정에 의해서 우리의 상상력이 멈칫하는 것을 넘어서 사고해 보자는 것이다. 무상 급식이 국민적 의제가 되고 한나라당마저-제한되지만-'무상 보육'을 내거는 현실을 포퓰리즘의 과잉이라고 매도하는 바로 그 지점 말이다.

필자는 한나라당이 무상 교육을 온전하게 실현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하는 언론에 맞서서 그것을 옹호할 것이다. 최근 경총은 "정치권이 선심성 정책을 경쟁적으로 제시해 기업의 투자 환경을 악화시키고 일자리 창충을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하면서, 그 예로 대체 휴일제, 보육비 지원 확대, 실업 부조 도입 등을 예로 제시하였다. 민중 복지의 확대를 '묻지 마 공약'으로 매도하면서 비판한다면, 필자는 그 묻지 마 공약을 옹호할 것이다.

물론 필자는 민주주의 자체의 급진적 확장을 통해서, 제도화된 민주주의가 사회와의 괴리를 극소화하면서 배반된 사회적 요구들이 다양한 채널로 흡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진보적이고 더 개혁적인 '좋은 정당'을 통해서, 또 신진욱이 강조하는 것처럼 대중 민주주의적 통로를 통해서 대중들의 요구와 이해가 더 많이 민주주의의 '내부화'하도록 해야 하고 대중의 좌절과 열망이 우익 포퓰리즘의 동력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차기 민주 정부가 들어섰을 때, 혹은 진보 정당 정부가 들어섰을 때, 어떻게 보수 정권 하에서 배반당한 대중의 요구와 이해를 수렴할 것인가를 상상하는데, '좌익 포퓰리즘'의 관점을 대입해 보자고 제안해보고 싶다.

(이 글의 축약본은 <한겨레>에도 실렸습니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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