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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Factory.77] 비극이 지닌 낭만성의 정점, 발레 '지젤Gise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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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Factory.77] 비극이 지닌 낭만성의 정점, 발레 '지젤Giselle'

[공연리뷰&프리뷰]국립발레단 제136회 정기공연

체념하듯 떨어지는 흰 백합이 허망하게 아름답다. 동이 텄지만 밤보다 검은 암흑이다. 재회할 수 없는 연인을 그리워하는 남자의 뻗은 손이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을 가리키며 여운으로 남는다. 국립발레단이 선보인 발레 '지젤'은 죽음이 지배하는 인간의 극단적 절망에서 순백의 절대 미美를 피워내며 슬픔의 아름다움을 형상화시켰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무용수들, 부드럽게 무대를 감싸거나 날카롭게 가로지르는 조명,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과 이별을 아우르는 음악, 현실과 환상의 두 세계와 호흡하는 의상 등 이 모든 것의 합일이 낭만발레의 정수라 불리는 '지젤' 앞의 구차한 수식을 거부한다. 막이 내리고 이제 남은 것은 관객 속에서 멈추지 않을 춤을 추고 있는 지젤, 그녀가 가진 사랑의 숭고함이다.

▲ ⓒnewstage

평화롭고 아기자기한 마을, 병약하나 밝고 싱그러운 지젤은 알브레히트를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사랑의 시작은 비극의 시작임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두 남녀가 서로를 응시하는 찰나의 순간은 잔인하리만치 아름답다. 손가락의 미세한 떨림, 수줍음에 둘 곳 모르는 시선, 조심스러운 발걸음의 지젤(김지영)은 가볍고 경쾌하면서도 우아하다. 알브레히트(이동훈)의 춤에는 부드러우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남자의 여유가 있다. 무용수들의 독무와 파드되, 아다지오, 바리아시옹, 농민들의 군무 등 생동감 넘치는 축제의 빛깔로 가득한 이 공간에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건 순간이다. 지젤을 사랑하던 힐라리온(이영철)이 등장할 때마다 느껴지던 평화 속 불안의 기운이 권력이 돼 모습을 드러낸다. 죽음과 비극은 급작스레 온다. 알브레히트의 신분과 그의 약혼사실을 알게 된 지젤을 지배하는 것은 이제 절망은 넘어선 광기다. 연약하면서도 아름다웠던 여인이 미쳐가는 과정을 발레리나 김지영은 섬뜩하리만치 리얼하게 표현해낸다. 떨림보다 경련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움직임이 가슴 가장 깊숙한 곳에 예민한 상처를 낸다. 어머니와 알브레히트의 품에 안기고 허물어지듯 쓰러지는 지젤의 마지막 순간은 음악, 조명, 무용수의 조화가 이뤄낸 비극의 정점이다.

▲ ⓒnewstage
발레 '지젤'의 1막과 2막은 전혀 다른 색과 표정을 지닌다. 지젤이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관객은 그녀에게 생명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춤을 좋아하고 명랑하며 소박하던 자신의 모습을 묘지에 묻고 윌리가 된 지젤은 더 이상 하늘을 꿈꾸듯 희망의 도약을 하지 않는다.

웃고 울었던 1막 현실세계의 사람들과 달리 2막을 장악한 윌리들은 완벽한 절제를 추구한다. 신체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윌리들의 춤과 군무의 절도는 음습하면서도 황홀한 혼의 세계를 선사한다. 서늘하게 아름답다. 희로애락이 배제된 윌리들의 표정과 움직임에는 상처받은 영혼들의 한이 있다. 폭발하고 분출하는 대신 안으로 응축하며 수직보다는 수평적 움직임과 기하학적 대형을 통해 공간의 환상성을 구축한다. 중력에 구애받지 않고 이동하는 그녀들의 새하얀 의상은 푸르스름한 달빛을 흡수하며 물에 물감이 번지듯 몽환의 나풀거림으로 초현실적 이미지를 완성한다. 수많은 남자들이 윌리들에게 홀려 춤을 추다 죽음을 맞이하듯 관객은 무대가 뿜는 마술적 아우라에 취한다.

신화적 모티브에 서정성을 더한 것은 의상과 음악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특수한 감정 상태를 아우르는 선율은 극적 통일성을 지니며 표현을 극대화시킨다. 두 세계를 의상으로만 묘사한다 해도 부족함이 없었던 장인의 숭고한 열정은 바늘과 실로 한 편의 시詩를 짜냈다. 국립발레단 무용수들의 기량은 무대를 초월한 움직임으로 자신들의 고통을 전염시켰다. 묘지에서 춤을 추는 남녀의 몸짓이 더없이 아름다울 때, 그들의 엇갈리는 시선마저 노래가 될 때, 말 없는 윌리들의 이야기가 안개처럼 부유할 때, 무대에서 퇴장한 지젤이 도대체 사라지지 않을 때, 그래서 비극이 더욱 아름다울 때 막이 내린다. 자신을 속인 연인을 용서하며 지켜주었던 지젤의 사랑만이 알브레히트의 손끝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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