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흥미로운 일화는 에두아르도 포터의 <모든 것의 가격>(김홍래·손민중 옮김, 김영사 펴냄)에 소개되어 있다. 아마도 포터는 그린스펀의 이야기가 자신의 독자들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책에 삽입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책을 읽는 독자들 중 그린스펀의 저 대답에 새삼 놀라워할 만한 이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오늘날 '자유시장의 가호'가 그 신성함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제는 많은 이들이 시장경제가 누려온 불가침의 자유에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으며, 복지와 분배의 강조는 더 이상 수정주의자들만의 괴상한 견해가 아니게 되었다. 여러 학자들은 오랜 세월 자유시장의 근본이념이었던 경제적 공리주의에 대해 날선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한국에 소개되어 대단한 인기를 누렸는가 하면, 최근에는 아마티아 센의 <자유로서의 발전>이 재출간되면서 이러한 흐름이 여전히 진행형임을 보여주고 있다.
▲ <시적 정의>(마사 누스바움 지음, 박용준 옮김, 궁리 펴냄). ⓒ궁리 |
그러나 모 시인과 같이 "나는 이 책을 제목만 읽었다"고 말하지 않는 이상, 나로서는 이 책이 불러일으킬 일련의 '문학적' 기대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실망으로 바뀌고 말 것임을 단언해야만 할 것 같다. <시적 정의>는 분명 오늘날 문학에게 주어진 중요한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학 바깥의 정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부차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는 까닭이다.
만약 우리가 '공상'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또 우리 앞에 놓인 인간 유형에 대해 그들의 행복, 기쁨, 고통에 대한 공감을 가지고 궁금해 하지 않는다면, 나아가 만약 우리가 각각의 사람을 제각기 살아갈 삶이 있는 개별적인 존재로 보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악의에 찬 감정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그 토대를 잃게 될 것이다. 앞서 주장했듯, 독서는 바로 이러한 토대를 제공한다. 또한 비판에 있어 핵심적인 '분별 있는 관찰자'의 관점 역시 갖게 해준다.(166~167쪽, 강조는 인용자)
'독서'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는 문학의 내재적인 힘이나 가능성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는 독자의 층위인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처음부터 문학 자체의 가능성이나 그 내재적 힘을 추적하는 저작이 아니었으며, 저자의 주장은 철저하게 문학적 경험으로부터 형성될 독자의 '감정적 합리성 emotional rationality'―각각의 사람을 제각기 살아갈 삶이 있는 개별적인 존재로 보는 태도―을 요청하는 데에 한정되고 있다. 특히나 저자의 이러한 접근은 그가 문학의 미학적 가능성을 변호하는 기존의 수사들과 선을 그으며, "유사과학적 pseudo-scientific인 것이 아니라 인문주의적인 공적 추론 public reasoning이라는 생생한 개념을 제시하고, 특정한 종류의 서사문학이 어떻게 그러한 개념을 표현하고 발전시키는지를 보여주며, 공적 영역에서 그러한 개념이 제시할 수 있는 몇몇 이득을 보여주고자"(21쪽, 강조는 인용자)하는 것이 그의 목표라고 단언하는 지점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결국 이 책이 요청하는 '시적 정의'란 샌델이 묘사하는 공동체주의나 아마티아 센이 제시한 '실질적 자유 substantive freedom'에 가까운 사회·경제학적 개념이며,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문학 자체가 아니라 문학적 경험을 통해 배양된 '분별 있는 관찰자'의 자세인 셈이다.
▲ 마사 누스바움. ⓒen.wikipedia.org |
저자가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공리주의적 맹목에 대한 이 '감성적 비판'의 맥락은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에 그 뿌리를 둔다. 이기심을 긍정했다는 흔한 오해와 달리 스미스는 상업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근거로 '공통감각(common sense)'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상업사회에서의 가치는 개별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하는 공통의 정서 위에 이기심이 작동함으로써 발생되므로, 만약 사회가 오직 이기심만으로 움직인다고 한다면 그곳에는 무한의 일탈과 야만이 존재할 뿐 정당한 교환행위가 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적 정의>는 이러한 애덤 스미스의 입장을 수용하면서, "단일하다기보다는 다층적이고, 질적으로 균일하기보다는 다원적"(118쪽)이며, "불평등보다는 평등에, 귀족적 이상보다는 민주적 이상에 더 긴밀히 관계하"(193쪽)는 양식으로서의 문학이 <도덕 감정론>에서 주장했던 정의, 즉 인간의 공감 능력에 기반을 둔 '적정선으로서의 정의'의 현대적 구성체임을 역설한다.
그러나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많은 사례들에도 불구하고, <시적 정의>가 내놓은 저 "근본적인 인간의 감수성"에 대한 옹호가 과연 얼마만큼 유의미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끝내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마치 여성의 고유한 특성을 남성중심사회의 대안으로 제시했던 문화적 페미니즘이 결국 성차 담론을 고착화하는데 일조하고 말았듯이, 오늘날 '감성적 합리성'을 통한 대안적 모델로 제시된 문학은 끝내 현대사회의 비인도성에 아무런 경종도 울릴 수 없으리라는 것이 점차 확실해지고 있다. 이미 자본주의는 누스바움이 발견한 감성의 힘, 나아가 그것이 회복시키려는 '공적 담론' 자체를 스스로의 논리 안에 적극적으로 포섭하는 단계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미학적'이라고 지칭되어온 여러 속성들―질서에 저항하고, 억압에 맞서며, 경계를 없애려는 힘―은 창조성의 발명 이후 자본주의 사회의 주된 덕목들로 변해가고 있다. 이로써 "창조적으로 행동하라!"는 현대사회의 규범은 상상력과 감성의 해방을 주장할수록 그것이 오히려 자본주의의 규율에 더욱 밀착하게 되는 이중구속을 야기하기에 이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적 정의>가 지지하는 모든 '쓸모'를 거절해버리는 문학주의의 자세, 예컨대 문학의 '쓸모없는' 부정성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식의 선언이 힘을 얻을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오늘날 문학이, 나아가 예술이 직면한 현실은 그들이 의지해온 미학 자체의 붕괴이며, 미적 자율성을 둘러싼 믿음은 '공통 감각' 자체가 물화되어버린 현실로 인해 도리어 그와 같은 물화의 승리를 확언해줄 한낱 증거물로 전락하고 만다. 현대예술이 처한 곤경은 우리가 상상하는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다. 뒤샹 이후로 우리는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그와 반대되는 명제야말로 오늘날의 확고부동한 진실이다: 이제는 어떤 것도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없다.
앞으로 문학은, 그리고 예술은 저 '부드러운 억압'의 전방위적 공세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토머스 캣과 제리 마우스의 우스꽝스러운 콩트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장면을 제공한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필름 속에서 곤경에 처하는 것은 늘 포식자의 몫이지만, 그러한 유쾌함이 고양이와 쥐라는 둘 사이의 역학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짤막한 콩트는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매번 우리에게 지극히 새삼스러운 진실 하나를 은연중에 상기시켜준다. 쥐는 결코 잡아먹히길 원하지 않는다는 진실이 바로 그것이다.
감수성의 힘은 현대사회의 모순을 보완할 수도, 그것을 전복할 수도 없다. 그러나 문학과 예술은 이 폐허의 공간에 어떤 '말'을 남길 수는 있다. 상상력을 억압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권장함으로써 그것의 가치를 무력화하는 것이 오늘날 지배체제의 논리라면, 진정한 '시적 정의'는 그와 같은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과 상상을 멈추지 않으려는 어떤 고집스러움의 형태로 남겨질 것이다. 물론 이것은 미학적 인식의 불가능성을 "무용하지만 자율적인 것, 아무데에도 쓸모가 없지만 목숨보다 더 소중한 무엇"으로 감싸 안으려는 해묵은 예술지상주의의 태도와는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문학이, 나아가 예술이 내포하는 부정의 정신에게 남겨진 권리는 단지 비극으로 흐르는 삶을 물화의 외부에서 견디는 관조자의 권리에 불과하다. 그 이상의 쓸모도, 그 너머의 '더 소중한 무엇'도 없다. 다만 상상의 힘은 그저 이곳에 있음으로써, 비로소 희미하게 빛나는 샛길의 존재에 도달한다. 그리고 오직 저 비관만이, 우리를 우리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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