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의 그림자>(황정은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
그림자가 일어서는 것과 같이 현실 원칙에서 슬쩍 비껴 있는 사건의 삽입은 황정은의 첫 번째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문학동네 펴냄)에서부터 나타났던 주요한 특징이었다. 할 말을 잃었을 때마다 돌연 '모자'가 되어버리는 아버지나('모자') 문득 오뚝이가 되어버리는 아내('오뚝이와 지빠귀')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카프카의 변신담을 떠올리게도 했지만, 이 말을 전하는 어조는 명랑하고 태연할 뿐이어서 그 비애의 감당은 어느 틈에 우리의 몫으로 넘어와 있곤 했다.
그 공기처럼 가벼운 어조와 환상성은 서사 속 현실의 중력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보다 가벼워서 자연스럽게 발현된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무겁게 현실을 감지하는 이가 어떻게든 계속 살아가기 위해 차라리 자신의 희로애락을 축소시켜버릴 때 생겨나는 것이었다. 혹자들의 평처럼 '동화적'이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겠으나, 시대가 만들어내는 부조리와 불안의 무게가 실려 있다는 점에서 그 동화는 잔혹 동화에 더 가까운 무엇이었다.
이번 <야만적인 앨리스씨>(문학동네 펴냄)는 전작들에 감돌던 시적인 여운이 바싹 달군 강철과 같은 분노로 응고된 소설이다. 대화의 끝에 길게 남던 고요한 울림 대신, 억눌린 비명과 나지막이 뱉어내는 욕설이 우리를 깊게 찌르며 들어온다. 곳곳에서 분출하는 '씨발됨'은 독자들로 하여금 소설을 빠르게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듯 읽는 것을 집요하게 방해한다.
황정은 식의 잔혹 동화는 이제 따뜻한 환상을 증발시키고 잔혹성만 남겨둔 것일까. 그간 거대하고 따뜻한 환상이 현실의 잔인한 조각을 품고 있었다면,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어떤 감상적인 연민 없이 거침없이 찢어지고 내동댕이쳐지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 절박한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책장을 열면 우리는 사거리에 서 있는 여장 부랑자 '앨리시어'와 만난다. 그리고 그가 여장을 한 채 그곳에 있는 맥락을 헤아리기 위해, 서사는 자연스럽게 앨리시어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다. 소년 앨리시어는 재개발사업에 대한 열기에 가득 차 있는 마을 '고모리'에서, 뻔뻔하지만 무력한 아버지와 난폭한 어머니, 어린 남동생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더 많은 보상금을 받아내기 위해 임시 집들이 빠르게 증축되고 있는 고모리에서, 앨리시어의 늙은 아버지가 잡아먹기 위해 키우는 개는 개장이 열려도 도망가지 않는다. 도망갈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지도, 아니면 도망가도 달리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도 같은 개의 무력함은 앨리시어와 그 동생이 놓인 상태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이다.
문제는 한 번씩 앨리시어의 어머니에게 '씨발됨'의 상태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백 퍼센트로 농축된 씨발, 백만 년의 원한을 담은 씨발, 백만 년 천만 년은 씨발 상태로 썩을 것 같은 씨발"(27쪽)로 표현되는 그녀의 가차 없는 폭력적 양태들은 '씨발됨'이라는 하나의 명사로 단단하게 결집된다. 소설은 앨리시어의 어머니가 보여주는 '씨발됨'이 때려서는 안 된다는 당위를 내면에 쌓는 일이 귀찮고 구차해 이것도 저것도 마다하고 때리는 데 몰두하는 것이라고 냉정하게 기술하면서도, 그 기원을 찾아간다. 눈 속에 알몸으로 서 있다가 몰래 집으로 들어가야 했던 밤에, 앨리시어의 어머니는 상시적이고 일상적인 아버지의 매질보다 어머니를 궁금해 한다.
"어머니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왜 내다보지도 않았을까. 왜 나를 들여보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죽고 싶을 정도로 나는 씨발 추웠는데 왜 나를 궁금해 하지 않는 얼굴로 자고 있나."(42쪽)
배부르고 평온한 얼굴로 자고 있는 어머니를 보는 동안, 아주 조용하게 '포스트 씨발 년'이 발아한다.
▲ <야만적인 앨리스씨>(황정은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이 폭력의 기원 한 줄기를 탐색함으로써 소설은 앨리시어의 어머니에 대한 이해에 쉽게 도달하지도 그것을 간청하지도 않는다. 폭력은 견딜만한 것으로 축소되거나 어떤 방식으로도 승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장면에서 소설은 온 세상이 씨발됨으로 가득 차오르는 동안, 책을 읽는 당신은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다보지도 않고, 궁금해 하지 않는 얼굴로 있는지 묻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소설 곳곳에 배치된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하는 물음은 어느 순간부터 질문이라기보다는 '그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하는 힐난으로 변한다. 이에 대해 말하기 위해 기꺼이 돌아가서 소설의 서두에 대해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그대는 앨리시어가 발을 끌며 걷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불시에 앨리시어의 냄새를 맡게 될 것이다. (…) 그대는 얼굴을 찡그린다. 불쾌해지는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그대의 무방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도꼬마리처럼 달라붙는다. 갈고리 같은 작은 가시로 진하게 들러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추하고 더럽고 역겨워서 밀어낼수록 신나게 유쾌하게 존나게 들러붙는다. (…) 그대가 앨리시어 덕분에 불쾌하고 지루하더라도 앨리시어는 계속할 것이다. 그대의 재미와 안녕, 평안함에 앨리시어는 관심이 없다. 계속 그렇게 한다. (7~8쪽)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소년 앨리시어의 일상에서 상연되는 적나라한 폭력들이다. 이 서사 뒤편으로 하나의 이미지가 깔리는데, 그것이 바로 이 추하고 더럽고 역겨운 부랑자로 성장한 앨리시어의 모습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앨리시어가 우리에게 주로 자극하는 감각이 시각이 아닌, 후각이라는 점이다. "무방비한 점막"에 "신나게 유쾌하게 존나게 들러붙는" 앨리시어의 냄새로부터 우리는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다. 시각의 차단이 눈꺼풀을 감아버리는 동작 하나로 손쉽게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살아가기 위해 수반되는 가장 근본적인 행위로서의 호흡과 함께 앨리시어의 체취는 몸 깊숙이 흡수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그 어떤 감각보다도 내밀한 감각으로 침투해 불쾌를 불러오고자 하는 소설이 궁극적으로 목적하는 바는 전염/감염의 수사학이다.
실제로 앨리시어는 고물상을 하는 친구 '고미'의 집에 놀러갔다가 폐지 더미 속에서 감염과 관련된 이미지와 기사를 발견한다. 이 두 번의 에피소드들은 대수롭지 않은 듯 지나치며 삽입되어 있지만, 반복되는 동안 그 의미는 더 명확해진다. 처음 폐지에서 빼낸 종이는 이것이다.
"무명지에 은반지를 낀 아시아 남자가 싸움닭의 볏에 입을 대고 상처에서 피를 빨아내고 있다. 전염, 동물계, 새로운 바이러스, 축제, 청록색 페인트를 바른 흙벽 앞에 머리를 땋아 내린 여자아이가 권총을 쥐고 서 있다."(20쪽)
죽음과 극도의 흥분이 혼용되어 있는 원시적 축제의 현장은 "전염"이라는 언어와 만나면서 불결한 상징이 되고, 그 곁에 보색인 청록색 벽을 배경으로 권총을 쥐고 서 있는 여자 아이와 미묘한 대구를 이룬다. 물어뜯고 피를 빠는 원시적 폭력성은 어느 새 전염되어 권총으로 진화한 것처럼 보인다.
그 다음번 고미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앨리시어가 발견한 종이는 아마존 어딘가에서 발견되었다는 원시부족에 관한 기사다.
"기사를 작성한 사람은 원시부족이 갑작스럽게 외부와 만날 경우 발생할지 모를 감염에 관해 그리고 절멸에 관해 걱정하는 말로 기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68쪽)
다섯 명의 구성원이 남았다는 그 부족이 기사화된 것이 벌써 십 년 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앨리시어는 그 부족이 아직도 살고 있을까를 의심스럽게 자문한다. 그들은 아마 분명히 "감염"되고 "절멸"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감염과 절멸은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였다기보다 폭력으로 점철된 인류사를 종결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귀결처럼 보인다. 이는 이 기사를 발견하기 직전에 앨리시어가 잠들기 전 동생에게 들려주는 '베드타임 스토리'와도 연결되어 있다. '네꼬'라는 둥근 생물에 붙어서 번식하며 살기 시작한 생물체 '얌'들은 화폐와 같은 역할을 하는 '조개'에 미쳐 있다가 결국은 자멸하는 길을 걷는다.
▲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황정은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이제 황정은에게 폭력적인 인류의 자멸은 필연적인 것일까. 작가의 눈은 문명의 진화가 아니라, 야만이 나날이 진화하는 것을 목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야만의 진화 속에서 그 어떤 삶도 간절한 안간힘으로 붙들어야 할 무엇일 수 없다. 소년 앨리시어가 도망치지도 않는 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빨리 죽으면 좋을 텐데.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14쪽)고 웅얼거릴 때, 거기에는 한줌의 악의도 없어서 더 서늘하게 다가온다.
밤마다 앨리시어가 동생에게 들려주는 베드타임 스토리는 소설에서 세 번에 걸쳐서 전개된다. 중요한 것은 베드타임 스토리가 몇 번 나오는지가 아니라, 그 스토리들이 서사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겠다. 이 베드타임 스토리들은 현실의 시간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상시적인 폭력에 짓눌려 있는 갑갑한 현실을 구부리고 압축해서 변주한다. 말하는 여우가 나오고 '네꼬'라는 생물이 등장하는 그 스토리들은 어머니의 '씨발됨'이 내뿜는 독기와 치욕의 세계로부터 잠시나마 환상의 방어막이 되어준다. 하지만 그 내부 서사가 종결되는 방향들은 "온 집안을 완전 씨발 상태로 만들어버리고 씨발 사라져버렸다"거나, 가장 밝은 갤럭시를 만들어내며 결국에는 "다 죽는" 이야기다. 어느 순간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는 이야기들 속에서 마지막 베드타임 스토리는 이례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앨리스 소년은 떨어지면서 다시 기다렸다.
뭐를?
바닥에 닿기를.
(…) 그래서, 닿았냐.
아직.
아직?
아직도 떨어지고, 여태 떨어지고 있는 거다. 상당히 어둡고 긴 굴속을 떨어지면서 앨리스 소년이 생각하기를,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상당히 오래전에 토끼 한 마리를 쫓다가 굴속으로 떨어졌는데… 아무리 떨어져도 바닥에 닿지를 않고 있네… 나는 다만, 떨어지고 있네…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고… 계속, 계속… (131~32쪽)
앨리스 소년은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지기를. 밤과 낮이 뒤집어지기를" 바라다가 토끼를 따라 뛰고 마침내 토끼굴로 미끄러진다. 그런데 다른 곳으로 향하기 위한 이 여정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떨어짐은 어쩌자고 이렇게 쓸쓸하고 불안한 것일까. 이 끝없는 하강의 감각은 최근 황정은 소설에서 변주되고 있는 무엇이다.
이 에피소드는 <파씨의 입문>(창비 펴냄)에 수록된 '낙하하다'에서 이미 하나의 서사로 구축된 바 있었다. 여러 에피소드가 희박하게 제시되는 가운데 소설을 읽어갈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화자가 "죽는 순간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죽어서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는 상태"로 하염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낙하하는 운동성의 감각이 모순적이게도 폐쇄된 공간의 감각과 나란히 놓여 있다는 것이다. '낙하하다'에서 막연하게나마 인지되는 공간은 시멘트 개수대에 개수 구멍이 없고, 문이 없고, 시계가 없는 극도의 폐쇄성을 보여주는데, 그 안에서 화자의 낙하만이 무한히 계속된다.
▲ <파씨의 입문>(황정은 지음, 창비 펴냄). ⓒ창비 |
그래서 이 폐쇄성과 일방향적인 운동성의 병치는 역설적으로 더 큰 절망을 불러온다. 무언가 붙잡을 수도 없이 그저 떨어지고만 있는 공간의 바깥이 없다면, 어떻게 이 세계에서 탈출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 모든 절망에 무심한 채, 앨리시어가 사는 고모리에는 끝없이 비가 내리고, 앨리스 소년은 토끼굴 속을 계속 떨어져 내릴 뿐이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內'과 '外 ', 그리고 '再, 外'의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왜 3장에서 작가는 안으로 들어오는 대신 또 다시 바깥으로 향하는 것일까. 3장 '再, 外'에 진입하기 직전, 마침내 앨리시어가 효과적으로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자신의 무력을 깨우친 날에, 유일하게 "죽지 않았으면 했던" 동생의 죽음에 속수무책으로 직면해야 했던 것은 시사적이다. 야만의 진화는 삶이 아닌 죽음이 차라리 온당한 것으로 느껴지게 만들었으며, 끝내 이해 불가한 죽음을 남겨놓고 말았다. 이 죽음 앞에서 앨리시어는 '야'라고 불러왔던 동생의 진짜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은 상징질서 바깥으로 밀려난다는 것이다. 한때 어느 돌에 새겨지기도 했던 그 이름은 영원히 불리지 않을 것이며, 우리 역시 영영 그 이름을 알 수 없을 것이다.
화자는 애도할 수 없는 죽음 앞에 서있는, 절박하고 쓸쓸한 "앨리시어의 실패와 패배의 기록"을 써내려갈 '그대'를 찾는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바깥에 무기력한 방관자의 자리로부터 그대는 자석에 끌려가듯 천천히 그곳으로 불려간다. 만일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는 동안 당신이 충만감에 도달하는 데 실패했다면 당신은 이 소설을 읽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 선명하고 무섭고 단단한 씨발됨, 문명이 아니라 야만이 진화하는 시대 속에서 황정은은 이렇게밖에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그대가 응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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