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열린 도쿄 퀼트전의 주제는 '무민’이었다. 무민과 그 친구들의 세계를 바느질한 수백 점의 퀼트 작품이 선보였다. 2014년은 무민의 작가 토베 얀손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므로 그 헌정 전시회가 열린 것이다.
토베 얀손을 비롯해 안데르센,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등 몇몇 동화작가들이 지난 세기에 살았다는 것은 전 세계 어린이에게 큰 행운이다. 그들의 문학은 어린이의 사회, 문화적 지위를 바꾸어놓는데 큰 역할을 했다. 안데르센은 소년, 소녀라는 집단 지칭 속에서 한 사람의 '인어공주’, '성냥팔이 소녀’의 시선을 찾아냈다. 린드그렌은 '삐삐’를 통해 어린이는 독립적인 삶의 주체임을 선언했다. 토베 얀손은 '무민 시리즈’로 어린이들이 상상하는 세계가 얼마나 생명력 가득한 곳인지 보여주었다.

그러나 무민은 '하나의 세계'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방대한 서사와 다양한 외연을 가지고 있는 20세기의 대표적 아동문학작품이다. 토베 얀손은 <무민 가족과 대홍수>(1946)를 시작으로 최종 편 <무민 골짜기의 11월>(1970)을 써내기까지 25년간 아홉 권의 무민 이야기를 집필했다. 1953년 셀마 라게를뢰프 훈장을, 1966년에는 아동문학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 상을 받으며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그는 핀란드 국적이지만 스웨덴 계 이민자이며 작품도 스웨덴어로 썼다. 작품에는 무민트롤과 무민 엄마, 무민 아빠를 비롯한 수십 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각자 다양한 처지의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다.
동화책에서 출발한 무민은 만화, 인형극, 오페라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무민 만화는 1947년부터 핀란드의 스웨덴 계 신문 <현대>에, 1954년부터는 영국의 일간지 <이브닝 뉴스>에 실렸다. 작가 본인이 직접 그려서 7년간 연재한 후에 동생 라루스의 손을 빌려 무려 15년간 연장되었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무민의 모험 1 : 무민, 도적을 만나다><무민의 모험 2 : 무민, 집을 짓다>(김대중 옮김, 새만화책 펴냄)는 당시 토베 얀손이 연재한 작품들을 큰 판형의 만화책으로 엮은 것이다) 일본에서는 자체적으로 '무민 그림책'을 제작하기도 했다. 무민 골짜기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일본인들은 1960년대 이후 세 차례나 무민 장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100개국 이상에 수출했다. 핀란드의 탐페레에는 박물관 '무민 골짜기'가 있고 난탈리에는 테마파크 '무민 월드'가 있다.

그럼에도 삶의 국면과 사태의 본질을 정직하게 드러내야한다고 믿는 몇몇 작가들은 다른 돌파구를 택했다. 동물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동물이 주인공인 동화를 통하여 인간의 모습을 고도로 풍자하는 우회로는 상당히 영리한 것이었다. 전후의 동물 이야기들은 사실적인 작품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풍자가 강한 판타지로 쓰이기도 했다.
무민 시리즈의 주인공은 동물이 아닌 트롤이다. 하지만 낭만적 의인화 판타지의 형식에 씁쓸한 냉소와 사회 비판 의식을 담았다는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흐름과 연결된다. 온몸이 몹시 낭만적인 곡선으로만 이루어진 이 트롤 가족은 살랑거리는 꽃과 풀과 들판에서 살아간다. 산과 들은 방금 어떤 비극에서 귀환한 자라 하더라도 변함없이 그를 따뜻하게 보듬어 안아준다.
무민 가족이 타인을 대하는 방식은 이런 너그러움과 사랑을 토대로 한다. 그러나 무민과 그 친구들이 겪는 '새 삶'의 이면은 녹록치 않다. 새집을 짓듯이 '새 전통'을 만들어야 하는데 허세만 남은 끝물 귀족, 신흥 중산층, 하층 노동자와 서민으로 이어지는 계급의 장벽은 엄존하고 있다.
무민과 친구들은 집단에서 홀로 '아니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려고 애쓴다. 연거푸 출현하는 명망가들의 예언에 쉽게 흔들리지 않으려고 끝없이 스스로 회의하고 의심한다. 무민의 세계에서 아직 세상은 불안정하고, 어쩌면 처음부터 불안정했던 것이다. '봄맞이 청소를 하다가도 사라져버리는' 아빠 엄마를 향한 무민의 불안은 '언제 이 짧은 인생이 사라져버릴지 모르니 자식을 두고라도 놀러가자'는 무민 부모의 충동적인 결정과 마주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 <해변의 카프카>(김춘미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에서 이러한 무민의 철학을 반영하여 어떤 장면을 쓴 바 있다. 작품 속에서 사쿠라는 가출한 열다섯 소년에게 "어릴 때부터 너무 모든 걸 단정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세상에는 절대라는 것은 없으니까”라고 말한다. 이 말을 할 때의 사쿠라는 '가스대 앞에 선 채 커다란 컵으로 김이 피어오르는 네스카페를 마시고 있다. 그 컵에는 무민 가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상권, 174쪽)'고 묘사된다.
하루키는 이 장면에서 왜 하필이면 커다란 머그컵을 등장시킨 것일까. <무민의 모험>에서 '머그컵'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소재다. 무민트롤과 무민의 부모는 원래 이산가족이었다. 1947년 이 만화가 신문 연재를 시작할 무렵 세계 각지의 가족들은 이렇게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무민의 엄마와 아빠는 뱃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진 무민트롤을 다시 만난다. 그들은 서로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전쟁의 상흔은 이렇게 짙고 냉정하다. 그러나 추운 바닷물에서 떨던 무민트롤에게 무민의 엄마는 뜨거운 '토디(위스키 레몬 음료)'를 한 잔 따라준다. 그 머그잔을 보는 순간 무민은 갑자기 어린 시절이 떠오르게 되고 그들은 과거에 한가족이었음을 기억해낸다.
토베 얀손은 사람들이 가장 근본적이고 변함없다고 믿는 '가족'이라는 가치조차도 이렇게 쉽게 해체, 재구성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고작 머그잔 한 잔의 기억에 의지하여 훌쩍 봉합되기도 하는 것이다. 머그컵의 기억으로 무민을 되찾은 무민 엄마와 아빠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무민의 친구 스니프를 입양하고 그를 '새 아들'로 삼는다. 그리고 곧이어 네 사람은 '가족이 함께 평온한 시간을 보내다니 정말 좋다'고 말한다. '수천 년 세월…'을 강조하며 전승되었던 봉건적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산뜻한 반격이다.

만화책 <무민의 모험>은 성인 독자 대상 신문에 연재되었던 내용이므로 동화책 무민 시리즈보다 풍자의 강도가 높다. '도덕성'을 앞세우며 파행을 일삼는 기득권층은 무민에게 비웃음과 무시의 대상이다. 귀족처럼 보이려고 잠시 '드 무민'으로 개명한 무민 가족이 고급 리조트에 갔다가, 손님들의 폐쇄적 행각을 보면서 '우리 도덕성에 저건 별로'라는 핀잔을 날리거나 정치가의 조각상을 강에 내다버리면서 '멍청해보여서 그랬다'고 일갈하는 장면은 직설적이면서 유쾌하다.
무민 골짜기에 자유로운 삶을 설파하는 '하얀 예언자'와 그에 맞서 죄책감과 의무를 설교하는 '검은 예언자' 같은 캐릭터는 오늘날의 자기 계발서 붐과 견주어 '하얀 힐링'과 '검은 힐링'으로 바꾸어 생각해봐도 무리가 없다. 구석구석 짚어 읽다보면 옛 무민의 현재적 의미를 발견하는 재미가 상당하다.
아동문학에서 플롯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토요일 아침의 만화영화'라는 비유가 있다. '평범한 옷을 입은 부드러운 남자가 안에는 멋진 옷을 숨기고 있다가 비밀스러운 무기를 써서 적을 때려눕힌다'거나 '힘없는 어린 소녀의 누더기 안에 대단한 미모가 숨어 있는데 마력을 가진 보조자가 도움을 줘서 소녀는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승리한다'는 식의 얘기들을 뜻한다. 양차 대전이 끝난 지 몇 십 년이 지났지만 디즈니가 장악하고 있는 세계 각국의 어린이 콘텐츠들은 대부분 이런 낭만이 삶의 전부라고 말한다.
<무민의 모험>은 그 낭만에 대한 솔직하고 경쾌한 부정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럼에도 우리를 전혀 우울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혹적이다. 어느 작은 컷의 모서리에서 묵직하게 뒤를 돌아보고 무민 골짜기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다시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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