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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뚤어진 러시아'의 우당탕탕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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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뚤어진 러시아'의 우당탕탕 코미디

[프레시안 books] 일리야 일프·예브게니 페트로프의 <열두 개의 의자>

피카레스크(picaresque)라는 소설 장르는 17세기 무렵에 스페인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었던 문학 장르이다. 주로 사기꾼, 소매치기 혹은 도둑, 매춘부 등 사회의 최하층 출신인 주인공을 내세워서, 별다른 줄거리나 주제의식 없이 이 주인공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귀족부터 길거리의 걸인까지 사회의 각계각층 사람들을 만나며 여러 가지 우스꽝스러운 모험을 겪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남성일 수도 있고 여성일 수도 있는데, 피카레스크 소설의 남자 주인공은 피카로(picaro), 여자 주인공은 피카라(picara)라고 한다.

▲ 오노레 도미에의 그림 <돈 키호테와 산초 판자>. ©출처 Wikimedia Commons
풍자문학이 모두 피카레스크는 아니지만, 피카레스크 소설은 풍자문학이다. 하층민과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눈을 통해, 주류계층의 인간적인 단점을 꼬집어 내며 그것을 감추려는 위선과 허위의식을 비웃는 것이 주된 목적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가 피카레스크 소설의 대표적인 예이다.

피카레스크는 스페인을 중심으로 발전한 장르이지만 러시아에도 "러시아식 피카레스크"라고 할 만한 작품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러시아 문학 전통을 좀 많이 거슬러 올라가 보면 18세기 작가 미하일 출코프(1743~1792)가 쓴 "최초의 러시아 장편소설" <아름다운 여자 요리사>(1770)를 피카레스크 소설로 꼽을 수 있다. “방탕한 여인의 모험”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소설은 과부인 여자 주인공이 당시 러시아 사회를 돌아다니며 특별한 줄거리나 주제라고 할 것 없이 각계각층의 천태만상을 풍자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제목과는 달리 여주인공의 직업은 요리사가 아니라는 점부터 시작해서 앞뒤가 맞는 부분이 별로 없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지만,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약간 산만하다는 느낌도 있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시대였던 18세기에 웃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출코프는 당대 지식인 중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인물이었다. 교훈이나 지식을 위한 문학이 아니라 “웃고 즐기기 위한 소설”이라는 발상을 처음으로 해냈다는 점에서 출코프는 해학적인 풍자문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 풍자문학의 거장으로 조금 더 잘 알려진 작가는 <열두 개의 의자>(일리야 일프·예브게니 페트로프 지음, 이승억 옮김, 시공사 펴냄) 책의 뒤표지에도 언급된 니콜라이 고골(1809~1852)이다. 고골은 단편 ‘외투’에서 주인공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에 대한 익살스럽고도 따뜻한 시선을 통해 현대적인 의미의 “소시민”을 처음으로 묘사했다. 또한 ‘외투’는 내내 사실적으로 전개되다가 (스포일러 주의!!) 뒷부분에서 갑자기 유령이 튀어나오는 장르파괴적 작품이기도 하다. 고골은 또 다른 단편 ‘코’에서 주인공 코발료프 소령이 아침에 일어났는데 얼굴에서 코가 없어졌다는 황당한 전개를 통해서 인간의 허영심과 비겁함을 드러내고 계급 체계로 이루어진 당시의 러시아 사회를 풍자하기도 하였다.

▲ <죽은 혼>(니콜라이 고골 지음, 이경완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을유문화사
고골이 단편만 쓴 건 아닌데, 장편 <죽은 혼>(이경완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은 피카레스크의 요소들이 아주 많이 들어가 있는 사회풍자 소설이며 제목과 달리 귀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죽은 혼”이란 실제로는 사망했지만 서류상 사망 처리가 되지 않은 농노를 뜻하는 당대 속어라고 한다. <죽은 혼>의 주인공 치치코프는 이런 “죽은 혼”을 거래하는 일종의 사기꾼인데, 이 사기꾼 남자 주인공이 러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사회 각계각층의 온갖 괴상한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다니는 것이 주된 줄거리이다. <죽은 혼>은 러시아 피카레스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고골이 제 1부만 쓰고 2부는 죽기 전에 원고를 태워버리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은 비운의 작품이기도 하다.

시대를 ‘빨리 감기’해서 20세기에 접어들면, 초기 소비에트 작가들 중 미하일 조셴코(1894~1958)나 미하일 불가코프(1891~1940) 등을 대표적인 풍자문학 작가로 꼽을 수 있다. (이름이 ‘미하일’이면 풍자에 능하게 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풍자 소설이라고 해서 모두 피카레스크는 아니다. 조셴코는 단편이라기보다 엽편이라고 할 만한 아주 짧은 작품들에서 사회의 어느 한 단면과 여기에 속한 사람들의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을 묘사하였다. 불가코프는 이보다 줄거리나 등장인물, 사건묘사가 훨씬 길고 풍성한 작품들에서 소비에트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시선을 드러냈는데, 대표 장편 <거장과 마르가리타>(정보라 옮김, 민음사 펴냄) 혹은 SF 성향이 강한 중편 <개의 심장>(김세일 옮김, 창비 펴냄)이나 <비운의 달걀>(<불가코프 중편선>(정연호 옮김, 신아사 펴냄)에 수록되어 있다) 등이 그런 작품들이다. 조셴코와 불가코프의 작품들은 작품 길이나 등장인물, 줄거리 등 “피카레스크”라는 구체적인 장르의 여러 요건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물론 피카레스크가 아니라도 이 두 미하일의 작품들은 무척 재미있다.

서론이 매우 길었는데, 러시아 문학에서 사회풍자의 전통과 익살스럽고 해학적인 문학의 전통이 상당히 오래되었다는 점을 미리 설명하고 싶었다. 그런데 20세기 현대문학에서 고전적인 피카레스크의 요소들을 충실히 갖추면서 동시에 작가가 (혹은 작가들이) 살았던 시대를 현실적으로 비판하고 풍자한 작품은 사실 좀 찾기 힘들다. <열두 개의 의자>는 그런 측면에서 러시아 풍자문학뿐 아니라 17세기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유럽 풍자문학의 계보를 잇는 독보적인 작품이다.

▲ <열두 개의 의자>(일리야 일프·예브게니 페트로프 지음, 이승억 옮김, 시공사 펴냄). ©시공사
<열두 개의 의자>는 두 명의 주인공이 제목에 나온 “열두 개의 의자”를 찾아서 러시아 사회를 누비고 다니는 일종의 소비에트 풍자 활극이다. 등장하는 순서대로 소개하자면 첫 번째 주인공 이폴리트 마트베예비치 보로뱌니노프는 혁명 전에 귀족 출신이었고 지금은 한국의 구청 정도에 해당하는 작스(ZAGS: 출생, 사망, 결혼신고 등을 주관하는 관청)에서 일하는 관료이다. 두 번째 주인공 오스타프 벤데르는 “아버지가 터키 국적자”라는 사실(이것조차 사실인지 불분명하다)만 제외하면 신원도 직업도 출신도 알 수 없는 사기꾼 떠돌이이다. 이 두 명의 주인공이 보석이 숨겨져 있다는 의자를 찾으러 떠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 두 명 중에 한 명이 확실한 사기꾼인데다, 둘이서 러시아 전역을 떠돌며 온갖 괴상한 사건들에 휘말리기 때문에 이 작품이 어째서 “소비에트 피카레스크”인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부연설명을 조금 더 붙이자면 <열두 개의 의자>는 1928년 작품이므로 공산혁명 이후 10년이 지난 초기 소비에트 러시아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공산혁명은 “노동자와 농민에게 모든 주권을”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일어났기 때문에 소비에트 사회에서 공식적인 주역은 (공장) 노동자, 농민, 군인이었다. 바꿔 말하면 노동자, 농민, 군인, 그리고 공산당 당원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소비에트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비주류에 속했다는 뜻이다.

이폴리트 마트베예비치처럼 전직 귀족이었던 사람들은 혁명 때 숙청당했어야 할 전제국가의 찌꺼기였다. 게다가 이폴리트 마트베예비치는 현재 공무원인데, 위에 언급한 작스는 관료주의적이고 행정편의주의적인,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복지부동’에 주민들의 편의는 전혀 고려해주지 않는 일처리로 악명이 높았으며 관료주의자는 열심히 일하는 착한 노동대중을 방해하는 욕심꾸러기 게으름뱅이로 종종 매도되곤 했다. 귀족 출신에 공무원인 이폴리트 마트베예비치는 그러므로 현대 한국의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 엘리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당대 소비에트 사회에서는 노동자와 농민 계급의 적이었으며 절대로 환영 받지 못할 인물이었다.

그리고 오스타프 벤데르의 경우 “아버지가 터키 국적자”라고 주장하는데, 소비에트 사회에서 외국인은 전부 다 잠재적인 스파이로 여겨졌기 때문에 벤데르는 이 한 마디만으로 이미 소비에트 사회의 변방에 있는 인물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그 외에 표도르 사제, 점쟁이 옐레나 보우르 부인, 협동조합 대표 키슬랴르스키, 채권상환부서 소속 공무원들(은 곧 관료주의자들)과 “갈킨, 팔킨, 말킨, 찰킨, 잘킨” 등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가진 극단의 배우들 등 수많은 주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런 사람들 중에도 제대로 인정받을 만한 어엿한 소비에트식 노동자나 농민은 하나도 없다.

▲ 1970년 미국의 멜 브룩스 감독이 연출, 각본, 출연을 겸한 영화 <열두 개의 의자>. ©Crossbow Productions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비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련을 포함한 공산국가에서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표도르 사제 또한 구시대의 잔재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공산혁명 당시 많은 정교 성당들이 혁명군에 공격당하여 성물 등을 압수당했고, 신실한 사제들은 잔혹한 핍박을 받고 살해당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소설에 등장하는 표도르 사제는 혁명 후에도 멀쩡히 살아남아서 투기 사업으로 번 금은보화를 숨겨두고 비현실적인 사업 구상이나 하며 한탕을 꿈꾸는 저열한 인물이다. ‘사제’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인물인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점쟁이 보우르 부인은 미신을 전파하는 사기꾼에 가깝다. 한편 협동조합 대표 키슬랴르스키의 경우 협동조합은 국가의 명령대로 생산량을 할당 받아 채우는 방식이 아니라 조합원들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기 때문에, 협동조합의 조합원이란 소비에트 식으로 판단하자면 자본주의자였다. 그리고 “갈킨, 팔킨, 말킨” 등등 라임이 살아있는 배우들의 이름은 러시아어 사용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온갖 잡놈들” 정도의 어감으로 느껴질 것이다. “갈킨”의 갈카(галка)는 조그만 까마귀라는 뜻이고, “막대기”라는 뜻의 “팔킨”은 실망이나 부정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욜키-팔키”(елки-палки)라는 속어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하나하나 설명하기에는 지면상의 한계가 있지만, 어쨌든 독자들도 이제 감을 잡으셨을 것이다. 당대 소련의 독자들, 그리고 현대 러시아의 독자들은 이러한 인물들의 이름과 직업 혹은 신분이 언급되자마자 아하, 이 사람도 풍자와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생각하며, 또 어떤 방식으로 등장인물이 골탕을 먹게 될지, 얼마나 황당하고 괴상한 사건에 연루되어 저열한 본성을 드러내게 될지 눈을 반짝이며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열두 개의 의자>는 발표된 지 거의 90년이 지났으나 러시아 사회와 러시아인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흥미진진한 전개, 그리고 풍성하고 재치 넘치는 작가들의 입담 덕분에 아직까지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책을 놓을 수가 없다”라는 서평이 끊이지 않으며 러시아에서 최고의 해학 풍자소설로 사랑 받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러나 소비에트 러시아 사회를 풍자하는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진실한 사회주의적 관점을 담고 있다. 비판 받는 인물들은 모두 정직한 노동자와 농민을 제외한 소비에트 사회의 비주류들뿐이며, 특히 다분히 예상을 벗어나는 충격적인 결말에서 (다시 스포일러 주의!!!) 주인공들이 찾아다니던 보석은 개인의 부귀영화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공 대중의 이익과 교양을 위하는 방향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책을 아직 안 읽으신 독자들을 위해서 어떻게 끝나는지 더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이러한 결론은 주인공이 저지른 죄에 대한 간접적인 처벌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열두 개의 의자>는 예상 외로 대단히 도덕적이며 교훈적인 측면이 있는 소설이다. 게다가 넘치는 해학과 스릴을 통해 그러한 교훈적 결론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작가들에게 찬탄을 금할 수 없다.

그런데 출간 당시 이 책에 대한 정치문학계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왜 “정치문학계”라고 표현했냐고? 소비에트 사회에서 문학은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도구로 인식되었으며, 모든 문학 작품은 검열을 당했고, 그리하여 정치와 문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을 포함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의 공식적인 문화예술 기조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었는데, 이 정치적인 예술사조에 따르면 주인공은 노동자나 농민 출신(노동자가 낫다)의 공산당 당원으로, 당의 명령을 받고 출동하여 댐이나 도로건설 등 거대한 프로젝트를 맡아서 적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과업을 완수하는 위대한 공산주의 영웅의 모습으로 묘사되어야 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소비에트의 공식적인 문학사조라고 선언이 된 것은 1932년의 일이니까, 1928년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아직은 “공식 기조”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혁명 전부터 막심 고리키 등의 작가들이 사회주의 리얼리즘 성향이 아주 강한 작품들을 발표했으며, 문학계에서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사조 혹은 그 특성에 대해 모두들 알고 있는 분위기였다. 그러니까 주인공부터 사기꾼에 귀족 출신 관료주의자이고 그 외에도 등장인물이라고는 “온갖 잡놈들”뿐이며 당에서 지시한 과업 완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열두 개의 의자> 같은 소설은 환영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 1971년 러시아의 레오니드 가이다이 감독이 연출한 <열두 개의 의자> 중 한 장면. ©Mosfilm

<열두 개의 의자> 작가들인 일리야 일프와 예브게니 페트로프를 포함하여 소비에트 시대, 특히 스탈린 시대의 작가들은 당의 검열과 싸우고 지도층 수뇌부와 싸우고 소비에트 작가연맹과 싸우고 당에 아부하는 비평가들과 싸우고 가끔은 자체적으로 검열을 하는 잡지사나 신문사 혹은 작품 출간을 안 해 주려고 질질 끄는 출판사와 싸우면서 매우 피곤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 결과 <열두 개의 의자>를 포함하여 소비에트 시대의 여러 사회풍자적인 작품들에선 언론출판계가 몹시 황당하고 기괴하고 우스꽝스럽고 비겁하며 부패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열두 개의 의자>에도 일간지 <공작기계>의 편집국장과 기자, 시인 등 언론, 문학, 출판 분야에 관련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명색이 시인이라는 작자는 여자 타자수의 엉덩이나 쫓아다니고, 전차 탈 돈 10코페이카를 얻으려고 회사 안을 구걸하며 돌아다니는 인물로 묘사된다. 기자나 편집국장의 경우 본 리뷰 또한 담당기자에게 전달되어 언론사에 의해 출판될 예정이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1920년대 소비에트의 모습에 대하여 매우 길게 이야기했으나 사실 이런 부가적인 설명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러시아문학 전문가인 번역자의 각주와 해설이 매우 충실하므로 이해가 잘 안 될 만한 부분은 미리 친절하게 안내되어 있다. 번역에 있어 고유명사나 당시의 용어들, 예를 들어 영어식으로 “코카서스”라고 하는 지역 이름을 러시아어식 원어 발음으로 “캅카스”라고 표기한 부분 등이 한국 독자들에게 약간 낯설게 보일 수도 있으나 러시아식 발음이 원래 옳은 것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무엇보다 보석을, 일확천금을 쫓는 인간의 탐욕과 자기 몫을 어떻게든 챙기려는 비겁하고 이기적인 본성이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인류공통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자질구레한 세부사항에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웃고 즐기면서 두 주인공을 따라가시면 좋겠다. 정신 없이 빠르게 전개되고 참을 수 없이 재미있는 소설이다. 해설을 보시면 번역자도 무척 즐기면서 번역한 것 같다. 러시아 사람들은 본래 약간 비뚤어진 유머감각을 보유한, 무척 재미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열두 개의 의자>를 통해 현대 러시아 문학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증명하고, 그리하여 러시아 문학은 심오하고 철학적이고 지루하다는 편견을 깨뜨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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