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2일, ‘인문학의 생각읽기 강연’ 시리즈 마지막 시간은 철학자 강신주의 강연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의의 사정으로 부득이하게 당일 강연을 취소하는 상황이 발생해, 대신 <이야기 인문학>의 조승연 작가가 강사로 나섰습니다. <프레시안>을 통해 강연 신청을 하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인문학이 ‘서구의 교양을 배우는 것’으로 협소하게 규정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혹은, 인문학을 창의력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 이들 역시 많을 것이다. 그러나 ‘교양’을 쌓는 것의 유용성을 설명하기 위한 근거의 하나로 제시된다면, 가능하면 쉽고 재미있게, 충실하게 공부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무조건 외우기’의 한국식 공부법과 다른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지난 3월 12일 저녁 숭실대학교 형남공학관에서 열린 '인문학의 생각읽기' 시리즈 출간 기념 강연 다섯 번째 시간으로 조승연 작가의 인문학 공부법 강의가 펼쳐졌다. 쉽고 재미있게 인문학을 공부하는 하나의 방법론을 제시한 <이야기 인문학>(김영사on 펴냄)의 조승연 작가의 강연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의 토론이 즉석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인문학의 생각읽기'는 앨빈 토플러를 포함해 노암 촘스키, 토마스 만 편이 출간되었고 향후 피터 드러커, 제레미 리프킨 등으로 이어지는 인문학 해설서 시리즈로, 다양한 분야에서 인류 문명의 정신사에 큰 영향을 미친 현대 명사들의 저작을 중심으로 그 생애와 사상을 다룬다. 출판사 김영사on과 <프레시안>, 숭실대학교 교육개발센터는 본 시리즈와 함께 기획된 5회의 특별 강연을 진행 중이며, 그 주요 내용을 간추려 <프레시안> 지면에 싣는다.

인문학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국어나 수학 같은 하나의 과목으로 받아들여서 인문학을 따로 ‘공부’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인문학은 우리 삶에 녹아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언어학을 공부하다 보니 그 안에 스며든 인문학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께도 그런 식으로 인문학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전 이걸 ‘그물망 공부법’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이미 배운 것들이 하나의 맥락으로 꼬여있다는 걸 보게 해주는 배경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기하학의 창시자 유클리드는 그리스인입니다. 그런데 유클리드가 아마사 직물인 ‘리넨(linen)’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한다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시죠?
유클리드가 살아있던 당시의 그리스의 수학 능력이라는 건 보잘 것 없었습니다. 당대 수학은 이집트나 페르시아에서 발달했어요. 유클리드도 수학을 배우기 위해 이집트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리스에서는 양털이 워낙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옷도 죄다 양털로 만들었어요. 그 옷을 입고 이집트에 가니 얼마나 더웠겠습니까. 가만히 보니까 이집트인들은 얇은 천으로 된 옷으로 시원하게 더위를 나더란 말입니다. 유클리드 역시 그 옷, 그러니까 리넨으로 짠 옷을 즐겨 입게 되었어요. 그리스에 돌아와서 수학을 가르칠 때에도 리넨 옷을 입고 있으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해했어요.
유클리드는 직선의 개념을 가르칠 때도 리넨을 응용했습니다. ‘두 점을 잇는 무한한 점의 가장 짧은 점의 집합체’라고 설명하는 건 어려우니까, 마직 옷에서 튀어나온 실 한 가닥을 뽑아 팽팽하게 당겨서 보여주며 직선을 가르쳤습니다. 리넨(linen)에서 n이 빠지면 선(line)이 되지 않습니까? 리넨 옷 안 쪽에 모직을 덧붙이면 그게 바로 ‘안감(lining)’이 되고요.
또 더위에 땀을 많이 흘리다보면 옷을 자주 빨아야 하는데, 사실 귀찮죠. 과거의 유럽인들은 목욕을 잘 안 했다는 사실 알고 계시죠? 그 땀과 피지를 대신 흡수해줄 옷이 필요해졌죠. 마직 속옷을 착용하다가, 목욕 대신 그 속옷을 빨게 됐어요. 불어로 속옷이 ‘랑제리(lingerie)’인데요, 그 발음이 변형되어 ‘속옷을 빨다(laundry)’라는 단어가 생겼어요. 이런 식으로 유클리드로부터 몇 가지 단어들을 한꺼번에 배울 수 있게 되었죠?
서양 언어들만 배우다보니까 제 자신의 정체성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즘은 한자를 새로 공부하고 있어요. 어렵긴 한데, 서양과 동양의 동일한 사고의 지점들이 보이는 부분들이 재미있습니다. 이를테면 학교 ‘교(校)’자와 아카데미(academy)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재미있어했어요. ‘교’자는 나무 ‘목(木밑)’에 사람 ‘인(人)’이 두 개 붙어 있죠? 아카데미 역시 나무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플라톤이 헤카데모스(Hecademos) 숲에 학당을 지었는데 그 이름이 ‘아카데미’로 통하면서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지요.
견줄 ‘교(較)’에는 왜 수레(車)가 들어있을까요? 이것 역시 라틴어 기원과 비슷한 의미라고 이해했습니다. 영어에 ‘나란히 놓다’라는 뜻의 ‘juxtapose’라는 단어가 있죠. 거기서 ‘juxta’는 멍에입니다. 어원은 ‘jugos’고요. 소나 말에게 쟁기를 매달 때, 목에 멍에를 묶고 거기에 밧줄을 늘어뜨려서 소에게 연결시키잖아요. 그런데 두 마리 소를 멍에 하나로 묶을 땐, 두 마리의 힘이 똑같지 않으니 밭이 비뚤게 갈립니다. 두 마리 중 누가 더 힘이 센지 비교해본다는 의미에서 ‘juxtapose’라는 단어가 생겼습니다. 비교할 ‘교’도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죠.

누군가 평생 동안 읽어온 책, 들었던 음악, 보았던 미술 등의 총량, 즉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문학적 배경 시직의 총량을 저는 ‘토포스’라고 부릅니다. ‘취향은 각자 다른 거다’라고 외면하기보다, 그동안 배운 게 다르기 때문에 취향이 다르게 형성된다고 봐야 합니다. 아는 사람들끼리 공감대를 형성하는 문화적 레퍼런스가 분명 있거든요.
예를 들어 유명한 자동차회사 알파로메오의 ‘줄리에타’라는 차를 아신다면,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이 있습니다. 즉 <로미오와 줄리엣>의 셰익스피어죠. 게다가 알파로메오 사는 광고의 핵심 카피로 “우리는 꿈과 같은 소재로 만들어졌다(We are such stuff as dreams are made on)”를 내세웁니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지요. 유럽인들에게는 셰익스피어가 토포스의 일부기 때문에, 셰익스피어의 구절이 광고에 사용되면 희열을 느낍니다. 문장의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디서 왔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프랑스의 의류 브랜드 중 ‘자딕앤볼테르’라고 있죠? 이건 볼테르의 소설 <자디그>를 응용한 이름입니다. 고등학교 때 대학입시를 준비하며 공통적으로 배우는 텍스트기도 해요. 대학생 대상 의류다보니, 그 이름을 통해 확실하게 스스로를 인지시키죠. 영화 <007스카이폴>의 제목은 어디서 온 걸까요? 로마법전 1장 1절을 보면 “Let justice be done, may sky fall”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구현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셰익스피어의 <헨리5세>에서 가져온 제목이에요. 적은 수의 영국 군인들과 함께 프랑스의 막강한 군대와 싸워야 하는 헨리5세가, 우리들의 이름이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며 영국군을 격려하는 연설을 하죠. “우리 소수의 사람들, 행복한 소수의 사람들, 형제의 무리여.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라고요. 그 맥락을 아는 이라면,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제목을 듣는 순간 ‘소수의 군인들이 힘겨운 임무를 맡는 내용이겠구나’하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맥락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에게 전혀 다르게 보이는 언어들이 있죠. 그걸 아는 사람은 창의력의 레벨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공부하는 목적이 ‘문화인’이 되는 것이라고들 하죠. 문화는 ‘culture’, 즉 무슨 밭을 경작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 인류가 어떤 과정과 고민을 통해 여기까지 왔는지를 알아야만 내 머릿속도 골이 잘 파인 밭처럼 준비될 수 있겠죠. 어떤 상황이라는 씨앗이 뿌려졌을 때 아이디어라는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잘 경작해두어야 합니다.
인문학을 인간의 스토리로 이해하는 것, 그것이 문화입니다. 문화를 잘 다져놓는다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갈 때까지 쓸모가 있을지 아닌지를 확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새로 바뀌는 지식을 남들보다 더 빨리 습득할 수 있는 토양이 생겨요. 볼 줄 아는 사람과 볼 줄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그렇게 큽니다. 여러분도 인문학을 공부할 때, 그런 점을 염두에 두신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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