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린’에서 느낀 리더의 무게
지난달 30일에 개봉한 영화 ‘역린’은 준비했던 모든 홍보를 중단하고 23일 언론 시사회에서 영화 상영만을 진행했습니다. 상영 후 기자간담회가 없었던 탓에 어떤 해명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언론의 혹평을 그대로 받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관객들의 머릿속은 매우 복잡했습니다. 영화에 관한 평가와 함께 우리 사회 리더들의 모습이 겹쳐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역린’의 소재가 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죄인의 자식’이라는 적이 만든 명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세력은 그를 해치기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고, 거처하던 존현각에 침투해 사사로운 일까지 하나하나 염탐했습니다. 왕좌에는 앉아있으나, 왕의 대접은 받지 못한 셈입니다. 하루하루 마음 졸이며 삶을 살아 내야 했던 불운의 군주였지만, 정조는 조선의 ‘리더’이기도 했습니다.
노골적인 위협 속에서 불면증에 시달리며 정조는 밤새 책을 읽었습니다. 서얼 신분의 인재를 등용하고 자신을 위협했던 세력들까지도 감싸 안습니다. 이로써 정조는 후대 ‘개혁군주’로 기억되기에 이릅니다. 정조가 ‘역린’에서 가슴에 새기고 늘 외우고 다녔던 문장, 신뢰하는 신하 상책의 입을 빌려 읊기도 했던 ‘중용’ 23장의 한 구절입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 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
응당 넘치게 옳고 바른 탓에 공허할 수도 있는 문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조의 입을 통해 전달됐습니다. 마치 영화 ‘변호인’에서 송우석 변호사가 민주주의의 원칙을 읊을 때 느꼈던 그런 울림이었습니다. 진정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면 세상은 변할 수 있는지, 그리고 세상은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변화시키는 건지, 그렇다면 ‘작은 일’이란 무엇을 뜻하는지 의문이 들 법했지만, 리더의 입을 통한 것이었기에 그 무게가 가슴을 눌렀습니다.

#2. 자기비하로 위안 얻는 ‘이상한’ 사람들?
19세기 초 프랑스 철학자 메스트르는 “모든 나라는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민주주의에서 국민들은 그들 수준에 맞는 리더를 가진다”고 말했습니다. 히틀러의 최후를 그린 영화 ‘다운폴(감독 올리버 히르비겔)’에서는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한 국민돌격대가 소련군에게 학살당하는 것을 본 몬케 소장은 괴벨스에게 돌격대의 퇴각을 요청합니다. 그것에 괴벨스는 이렇게 답합니다. “우리는 국민들에게 강요하지 않았어. 그들이 우리에게 위임했지. 그리고 그들은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야.”
이 두 글은 지난 몇 주 동안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널리 인용됐습니다. 메스트르가 이미 오래전 했던 말이고 꽤 지난 영화였지만, 새삼스레 사람들은 이를 열심히 퍼 날랐습니다. 이를 통해 일종의 위안을 얻은 것일까요? 나를 욕해야만 너를 욕할 수 있는 이상한 구조 속에서 말입니다. 분명 스스로 낮추고 헐뜯는 자기비하로 얻은 이상한 위로였습니다.
“국가가 외상을 입었을 때 사회의 개개인은 극심한 무력감을 느낀다. (중략)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 속에서 그저 운명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하는 무력감보다는, 그래도 ‘우리가 못나서’라는 생각이 견디기 수월하기 때문이다.”
최병건 정신과 전문의는 한겨레신문에 ‘최병건의 ‘자학의 거울’’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윗글은 그것의 일부를 인용한 것입니다. 한국인은 왜 퍽 하면 “한국 사람들은 왜” “한국 사람들이 싫다”고 ‘한국인 타령’에 시간을 쏟는지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분석하는 글입니다. 최병건 전문의는 외상을 입은 사람들은 자기비하를 통해 무력감과 공포를 없애며, 외상은 사회와 국가에도 노출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지난 16일 국가적 외상을 입었고, 국가의 구성원인 우리는 나름의 방식으로 외상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내 탓’하며 참사의 공포에서 잠시 벗어나기도 했습니다. ‘우리 수준’을 들먹거리고,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등의 무서운 말을 내뱉었습니다. 일어날 수 없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이 닥치니 겁이 났던 탓입니다. 리더의 책임의식을 묻기보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기가 더 쉬웠습니다.
#3. 사전이 정의한 리더 ‘결정에 책임을 지는 사람’
21세기 정치학대사전을 보면 리더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어떤 조직이나 단체 등에서 목표의 달성이나 방향에 따라 이끌어 가는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 그 외의 구성원에 관해서 결정의 책임을 진다. 또한, 집단과 외부와의 조정 기능의 역할도 하고 있으며 이 역할이 결여되면 그 집단의 외부 환경에 대한 적응의 실패 여부와 관계하게 된다. (출처 21세기 정치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리더는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나 봅니다. 구성원 결정의 책임지는 사람, 즉 리더는 다스리는 사람들이 내린 결정의 결과가 어떻든 그것에 막중한 책임의식을 지녀야 하는 사람입니다. 밑에서 리더를 돕는 작은 리더들과 구성원들의 결정에도 책임을 진다는 말입니다.
지난달 24일 격월간지 ‘말과 활’의 발행인인 홍세화 선생은 이번 참사와 관련 한겨레신문에 낸 특별기고문에서 “무릇 못난 자일수록 자신의 무능을 탓하기에 앞서 남 탓을 한다.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에게 그에 맞는 능력과 책임의식이 요구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말하며 우리 사회의 한 리더를 비판했습니다. 리더의 역할은 죄를 벌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죄를 저지른 이유를 고민하고 그 구조를 개혁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우리는 ‘남 탓’을 많이도 들어왔습니다. 배를 움직이는 선장에게, 배의 소유주에게, 배에 갇힌 사람들을 구출할 임무를 지닌 해경에게, 그리고 대통령에게서조차 말입니다. ‘말들이 소용없었던, 할 말이 없었던’ 지난 시간과는 다릅니다.
1달여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우리의 주특기였던 ‘잊어버리기’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 그리고 ‘리더’의 자리는 책임의식이 지닌 무게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곳임을 ‘기억하기’입니다. 오늘은 이런 배경음악(BGM)을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바로가기)
“얼음들이 녹아지면
조금 더 따뜻한 노래가 나올 텐데
얼음들은 왜 그렇게 차가울까
차가울까요
붉은 해가 세수하던 파란 바다
그 깊이 묻힌 옛 온기를 바라본다
too late get it out
얼었던 세상 추위도 풀렸으면 해
얼었던 사랑이 이젠 주위로 흘렀으면 해”
뉴스컬처=프레시안 교류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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