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와 광인은 어떻게 다를까? 혹은 어떻게 구별될까? 일견 엉뚱해 보이고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이 질문에 러시아의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1922~1993)은 '현자'라는 중간항을 넣어 대답한다. 바보-현자-광인의 삼원구도로 바라볼 때, 바보와 광인은 현저히 상반된 인간행위의 유형들이란 것이다.

그럼 바보란 누구일까? 결혼식장에 가서 울고 장례식장에 가서 웃는 게 바보다. 때와 장소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 즉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의 관례를 제대로 인지하여 행하지 못하는 자가 바보이다. 마땅히 기대되는 행위에 어긋나기에 바보짓은 당황스럽지만, 일단 바보짓으로 인지되는 순간부터 그것은 예상할 만한 것이 되기에 위험하지는 않다. 바보가 예식장에 오면 어떤 짓을 할지 미리 알고 있다면 그걸 저지하거나 심지어 역이용하는 일도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측 가능한 일탈과 비정상을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보자면 '오류'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오류는 교정이나 회피의 대상이란 점에서 실상 현자의 은밀한 짝을 이룬다. 현자가 된다는 것은 바보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기 때문이다.
로트만이 흥미롭게 바라보는 유형은 광인이다. 정의상 미치광이는 일상의 분별을 상실한 자이고 따라서 정상적 규범을 일탈한 자다. 타인의 기대를 벗어난다는 점에서는 바보와 같지만, 광인의 행동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드러나기에 위험스럽다. 장례식장에서 그가 울지 웃을지, 결혼식장에서 축하를 할지 저주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면 딱히 세워둘 방비가 없는 탓이다. 예측불가능한 일탈로서의 광기는 정상적 규범 '너머'에 있으며, 교정이나 회피로는 근본적인 대책을 세울 수 없다.
광인을 막는 유일한 방책은 철저한 봉쇄, 감금뿐일지도 모른다(푸코에 따르면 17세기의 '대감금'은 광기에 대한 이성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광인은 커뮤니케이션의 '바깥'에 있으며, 광기의 발호 아래 정상성과 규범성은 파괴된다.
재미있긴 하지만 바보와 광인의 대립이, 현자와의 관계가 대체 무슨 이야기냐는 반문이 들리는 듯하다. 로트만이 풀어내는 문화기호학적 분석이 본격적으로 메스를 들이대는 지점이 여기부터다. 이 유형들은 커뮤니케이션 모델의 작동과 고장, '폭발'의 세 축을 보여준다.

기호학의 정상성과 규범성은 이러한 메시지 전달과 해독의 예외('소음')를 줄여가는 식으로 발전했는데, 로트만이 학문적 이력의 초기(1960년대)부터 관심을 기울여왔던 영역은 놀랍게도 이 '예외'의 영역이었다. 즉 문학과 예술이 그것이다. 작품은 의미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을수록, 모호성의 안개에 둘러싸일수록 더 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며 감동도 증폭되는 까닭이다.
이 관점은 로트만이 문화사 연구로 관심을 옮긴 후에도 남아있었다. 문화는 커뮤니케이션의 정상성을 통해 작동하는 체계인데, 여기엔 언제나 예외가 존재하며 그 예외야말로 문화의 규범성을 가능케 하는 근거이다. 후기 로트만의 관심은 예외가 예외로 남지 않게 되는 지점, 곧 임계점을 넘어서서 문화의 전면적인 변형을 촉발시키는 지점이 언제인가, 변형의 폭발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현자는 규범의 틀 내에서 살아가는 자이며, 그런 한에서 그의 삶은 안전하게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재생산에 적합한 삶이지 새로움을 창달하는 모험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바보의 예측 가능한 일탈은 그 자체가 체계의 정상적 작동을 보완한다는 점에서 전혀 생산적이지 않다. 현자나 바보나 정상적 커뮤니케이션의 일부로서 규범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것이다.
광인의 사례는 특별하다. 스칸디나비아 서사시에는 베르세르크라는 전사집단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전투적 광기'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거의 벌거벗은 채 전투에 나서는 베르세르크는 고통이나 연민, 공포 등 온갖 인간적 감정을 벗어나 싸움에 몰두하는데, 흡사 짐승과 대적하는 듯한 두려움을 적군에게 안겨주었다고 한다.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이런 존재의 개입은 흔한 전쟁의 규범을 완전히 무너뜨리며 적에게 대항할 방책을 세우지 못하게 함으로써 궁극적인 승리를 몰고 온다. 대체 어떻게 나올 지 전혀 예상할 수 없으니 적들이 아예 싸움을 포기하더라는 말이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는 정상성과 규범성의 복합체다. 성문화된 제도들과 관습적 불문율 등이 얽히고설킨 문화는 쉽게 와해되지도, 변형되지도 않는다. 내적 모순이 겹겹이 쌓여 질곡에 빠진 문화일수록 변화되기 어렵다. 소소한 개선들이 취해지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는다(최근 십년을 격하고 벌어진 대형 참사에서 바뀐 게 아무것도 없다는 비판을 떠올려보라).
폭발은 최고도로 누적된 문화의 모순을 해소시키는 유일한 대안이며, '새롭거나' '다른' 문화를 배태시키는 혁명적 사건이라는 게 로트만의 분석이다. 정치와 문화, 과학과 기술의 모든 변혁은 실상 이전의 체제를 급진적으로 전복시키는 방식으로, 폭발의 형태로 등장해 점차 정상성과 규범성을 획득해 갔던 것이다. 물론 베르세르크의 예가 보여주듯, 폭발은 예측가능성 너머에 있으며 광기로 가득 찬 혼돈의 장이기 쉽다. 그래서 사람들은 폭발을 두려워하고 곧잘 보수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하지만 폭발이 없다면 그 어떤 문화도 부패와 질곡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
그렇다면 폭발의 때와 장소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마치 혁명가가 혁명의 최적기를 알아채듯 폭발의 적기를 알아낼 수 있을까? 그건 광인이 장례식장에 가서 울지 웃을지를 알려는 것과 마찬가지의 질문 아닐까? 정의상 알 수 없는 것을 알려는 시도처럼.
하지만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어떤 문화의 정상성과 규범성에 대한 연구는 그것의 성립조건들에 대한 탐구이며, 동시에 정상과 규범이 탈구되는 조건들에 대한 탐색이다. 미래의 지각변동에 대한 예측이 과거 지층에 대한 관측의 연장선에 있는 것과 같다. 폭발 자체는 돌발적인 사건이어서 예언할 수 없으나 폭발의 조건들은 학문적으로 예견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문화기호학은 그렇게 문화의 연속과 불연속, 지속과 폭발의 잠재성을 관찰하고 서술하는 작업인데, 어쩌면 로트만은 그렇게 하여 낡은 문화의 종말과 새로운 문화의 폭발을 예측하는 지진계가 되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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