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중2로 산다는 것
내게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다. 지금은 철이 들었지만, 이 아이들도 중2·중3 때는 속깨나 썩였다. 지금 고3인 딸아이는 중2 때 자기도 장난 아니었다면서, 그때가 병적인 시기라고 말한다. 이 시기에 아이들이 하도 짜증을 부려서 엄마인 나도 '가출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 저녁에 혼자 빈 바람 부는 동네 골목을 헤매다 집에 들어왔는데, 애들은 내가 나갔다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교복 줄여 입기, 밤새 통화하기, 컴퓨터 끼고 살기, 지나치게 멋 내기, 죽으라고 공부 안 하기, 매일 집에 친구 데려오기, 밤늦게 들어오기…. 사춘기 자녀에 관한 책으로 아들 한 권, 딸 한 권은 거뜬히 쓸 만큼 많은 일화가 있다.
교사로 25년간, 오로지 남자 중학교에서만 근무하며 무수한 '병적인 중딩'들을 만나왔다. 올해는 상담실에 근무하는데 어쩌면 이렇게 '아픈' 아이들이 많은지, 한숨이 절로 나올 정도다. 분명 세월이 갈수록 아픈 아이들이 늘어난다. 집중력도 모자라고, 예의도 싹수도 없고, 지적 능력은 점점 떨어지고, 말은 거칠어지고, 갖은 사건 사고도 저지르고…. 때로는 조울증 환자처럼 변덕스럽고, 하염없이 무례하다가 하염없이 다정다감한 게 이 무렵 아이들이다. 떼로 몰려다니며 놀 때는 하룻강아지들처럼 눈에 뵈는 게 없이 행동하다가도 조곤조곤 이야기하면 그렇게 순하고 천진한 것들이 없다.
부모에게 상처받은 아이들, 친구 사이에서 감성이 생채기 투성이가 된 아이들도 많다. 아무리 무난히 큰 아이라도 지나친 학업부담으로 대부분 우울하다. 그 우울을 달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즐거움이 컴퓨터 게임이고, 게임을 할 때만큼은 아이들은 서로 다정하다. 운동을 하고 몸 싸움을 하며 뛰어놀 때 남자아이들은 지나칠 정도로 명랑해서 저 녀석들이 우울하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울'이라는 게 결코 고즈넉하고 무기력하게 오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어른들은 잘 모른다. 명랑 쾌활한 우울은 더 무섭다. 아이들이 가면을 쓴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우울한 줄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렇게 많은 중고딩들의 '만행'을 보고 겪은 나, 점점 심해지는 그들의 증세를 안타까워하는 교사이고 부모인 나이지만 감히 말하고 싶다. 아이들에게 '병명'을 선언하지 말라고 말이다. 우리 아이들은 착하디착한 천사들인데 왜 욕하느냐고 감싸고도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거칠고 아픈 아이들을 보면서, 마치 내일모레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에게 "곧 돌아가실 거잖아요?" 하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불편한 마음이 든다. 그렇다고 시한부 목숨 앞에 천명을 전해야 하는 이의 의무처럼 분명하고 과학적인 선언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과연 '중2병'이란 게 있긴 한 걸까
국어 시간에 '우리 안의 차별과 편견 없애기'라는 주제로 만화 그리기 수업을 했다. 우리 사회의 약자들, 소수자들이 누구일까를 생각해보고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만화를 그려보자고 했다. 한 아이가 그린 만화 중에, 아이 여럿이 축구를 하려고 모였는데 어른들이 이상한 아이들인 줄 알고 와서 혼내는 내용이 있었다. 그때의 억울한 기분을 만화로 그린 것이다. 청소년들은 사회적 약자이다. 어른들은 중학생들이 몰려다니면 두렵다고 하는데, 아이들은 몰려다니기라도 하지 않으면 강하게 보일 방법이 없다. 어른들이 길거리에서 만난 청소년들을 '아름다운 우리의 미래'라고 보지 않듯이 그들도 어른의 무리를 잔소리는 할지언정 자신들에게 '좋은 가르침을 줄 사람들'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아이들에게 길에서 만나는 어른은 편견을 가진 차가운 시선의 소유자이거나, 위협적 존재이거나, 방관자인 것이다. 서로 어긋나는 시선의 잘못을 어디부터 따져야 할까? 국어시간에 했던 문학작품 쓰기에서는 한 아이가 이런 글을 썼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중학교 2학년들을 '중2병'이라며 등신 취급을 한다. 아마도 몇몇 중학생들의 행동으로 전체를 평가하는 듯싶다. 친구들이나 내가 잘못했을 때 언제나 따라붙는 수식어 '중2병'은, 중2들이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다. 도대체 중2들이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학교와 학원 또는 방과 후를 돌며 주중엔 공부의 노예로 살다가 주말에 자신들 뜻대로 하는 것? 반항하는 것? 어른들이 우리의 스케줄을 체험해 본다면 저절로 반항심이 길러질 것이다. 또한 어른들도 사춘기를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인생 선배로서 중2들을 이끌어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왜 우리를 비난하는 것인가? 대한민국에서 중2로 살기. 색안경을 끼고 사는 사람들 속에서 사는 것이다…. 부모님 뜻은 사실 좋은 대학 가라는 것이지만 그렇게 공부만 하면 친구들에게 찐따 취급을 당한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예부터 사춘기적 특성은 동서고금 비슷하게 있어 왔다. 만약 사춘기를 '병적인 시기'로 봐 그와 같이 명명했다면, 나는 사춘기 옹호론을 펴고 싶다. 아이들이 대체로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예민한 것은 감성이 최고조로 순정한 시기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 있다. 어른에게 반항하고 걸핏하면 짜증을 내는 시기이지만, 한편으로 인생에서 가장 많은 음악을 몰입해서 듣는 시기이기도 하다. 친구들과의 관계를 통해 울퉁불퉁하게나마 사람 귀한 줄을 배우는 시기이다. 삶과 죽음, 영적 세계와 신비로움에 대해 민감하게 눈 뜨는 시기이기도 하다.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 태반이 이 시기에 자신의 예술성을 발견했고, 사회 정의를 삶의 기조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 시기에 세상에 눈을 뜬다. 그냥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사춘기 때만큼 맑은 감수성의 시기를 이후에 별로 누리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지금 힘들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시기를 보내는지 감사히 여기고 자신을 잘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복합적인 감정을 모두 '짜증 난다'고 표현한다. 어른들은 "넌 '짜증 나' 말고는 할 줄 아는 말이 없니?"라고 묻지 말고, "아냐, 지금 넌 슬픈 거야" "지금 많이 졸리지?" "아들, 오늘 화난 일 있었어?" "딸내미, 용돈 필요해?" "우리 친구들, 운동하고 와서 상당히 덥구나?"라면서 어른들이 감정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반영적 경청'을 실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 뭐래?" 하면서 시큰둥하던 아이들도 속으로는 '그래, 지금 난 슬픈 건지도 몰라' '아, 이럴 땐 화가 난다고 말해야 하는 거구나' '맞아, 난 지금 더워서 짜증이 나는 거야', '지금 졸리니까 한숨 자면 기분이 괜찮아지겠구나'라며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배운' 표현을 쓸 줄 알게 되면서 아이들은 성숙하고 성장한다.
당신 안의 '중2병'?
다음은 한 책에서 소개된 소위 '중2병' 진단 문항이다. 내 아이가 '중2병'인지 아닌지 체크해보라고 목록이 나와 있다.
'중2병' 체크 리스트△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어른에게 반항한다 △충동적이다 △감정 조절이 안 된다 △친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좋은 친구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부모와 멀어진다 △외모에 대한 관심이 높다 △자신의 외모에 불만족스럽다 △감정 기복이 심하다 △군중심리가 있다 △성(性)과 이성에 관심이 높다 △아무 이유 없이 우울하다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희망이 있다
나는 이 항목을 보면서 웃음이 좀 나왔다. 어른들에게 확인해 보라고 하면 어떨까? 특히 아빠들, 혹은 주변에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있는 '남자 어른'이 있다면 그 사람을 여기 비추어보라. 갱년기 즈음의 정서가 불안정한 어른이나, 나이는 많지만 삶에 대한 긍정과 너그러움을 얻지 못한 노년에게도 표시할 항목이 많은 목록일 것이다. 예전에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 행동은 경박하지 않고 생각은 깊어지는 어떤 단계를 뜻했지만, 요즘의 어른들은 꼭 그렇지만도 않으니 말이다. 세상은 전반적으로 경박해지고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간다. 나는 '어른들'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저런 양상을 보일 때 '사춘기라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이것도 다 지나가리라' 생각하면 그나마 조금 위안은 되지만 어른들은 잘 변하지도 않으니 이 얼마나 가슴 답답한가 말이다.
아이들은 잘못을 반복하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고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 세월호가 침몰할 때 가장 가슴 아팠던 상상은, 저기서 죽어간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존나, 씨바"를 입에 달고 다니던, 어른들 몰래 숨어서 담배도 피우던, 치마도 짧게 줄여 입고 몰래몰래 화장을 하던, 그런 아이들이었을 수도 있으리라는 상상이었다. 길에서 만나면 "요즘 것들은…" 하고 쯧쯧 혀를 찼을지도 모를 그런 아이들이어도 좋으니 살아만 돌아온다면, 담배 좀 피운들, 치마 좀 줄여 입은들, 공부 좀 안 한들 어떻겠는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더 미어졌다. 삶과 죽음의 운명 앞에 그런 잘못들 따위는 기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작 어른들이 보기에 어설퍼 보이던 그 아이들은 자기가 입던 구명조끼를 벗어 친구에게 건네고, 자기가 있던 안전한 곳을 버리고 위험을 알리기 위해 돌아올 수 없는 아래층으로 친구를 부르러 내려갔다. 수업 시간에 야단친다고 교사 뒷담 까던 아이들이 "선생님은?" 하고 교사의 안위를 걱정했다. 우리는 과연 저 아이들의 어설픈 사춘기를 흉볼 자격이 있는가?
'중2병'이라는 말 대신, 살아있는 기도를
요즘 아이들이 예전 아이들보다 정신적으로 어려지고 산만해지고 어른들에게 함부로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게 좋은 현상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런 변화의 원인은 당연히 어른들에게 있다. 치마를 줄여 입고 화장을 한다고 여학생들을 나무랄 게 아니라 다 벗다시피 하고 나오는 TV 속 걸그룹에 홀린 적은 없는지, 아이들이 쌍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고 혀를 차기 전에 인터넷에서 얼굴을 감추고 잔인한 욕설을 날리는 어른은 아니었는지 돌아볼 일이다.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은 나쁘지만 가슴이 답답해 담배라도 피우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만든 게 누군지 생각해봐야 한다.
어른들은 직장에서 자기보다 직급이 낮거나 비정규직이거나 나이가 어리거나 행동이 굼뜬, 조금이라도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는 상대도 하지 않으면서 자기 아이가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무시당한다고 '열폭'한다. 어른들은 살기 힘들다는 말을 달고 있으면서 아이들이 나약해서 옥상에서 뛰어내린다고 질타한다. 세상이 소용돌이라 어른들이 같이 휘말리면, 그 품에서라도 아이들이나마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을 하지는 않고 아이들 탓만 한다. 세상이 후져서 아이들이 다 같이 후져진다면, 후진 세상을 비판하는 나는 과연 이 풍진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했는지 돌아볼 일이다.
'중2병', 그래, 정말 그런 게 있다고 치자. 고작해야 이 세상에 나와서 14,5년 산 아이들이다. 사춘기라 몸과 뇌가 미쳐서 그런 거라면 21세기 대한민국 아이들만이 아니라 3000년 전 이집트의 아이들도 그랬을 것이다. 몰랑한 찰흙 같은 이 아이들은 촉촉하고 따스한 손길로 어루만지고 어루만져 곱디곱게 키워가야 하는, 손 많이 타는 귀한 것들이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좋은 말 고운 말을 들려줘도 부족할 터인데, 아직 다 여물지 않은 아이들에게 '병'이라니…. 설령 병이 있는 아이라 할지라도 "너는 병이래, 그래서 이렇게 미쳐 날뛰는 거래, 앞으로 한 7,80년 후에 죽는대"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중2병'이라는 말 대신, 아이들을 위한 살아 있는 기도를 올리자. 저기 걸어 다니는, 죽지 않은 싱싱한 생명에 감사하고, 그들이 싹 틔울 세상이 건강할 수 있도록 좋은 말들로 그들의 테두리를 감싸주자.
우리들의 아기는 살아 있는 기도라네고정희밤과 낮 오고가는 이 세계는 / 하늘과 땅으로 짝지어졌다네 / 하늘과 땅은 서로 한 몸 이루어 / 곡식과 나무와 들풀을 키우며 / 생명을 이어가는 원으로 산다네하늘과 땅의 원 속에서 / 한 아기가 태어나네 / 아기는 자라서 무엇이 될까 / 딸은 자라서 처녀가 되고 / 처녀는 훗날 어머니가 된다네 / 아들은 자라서 총각이 되고 / 총각은 훗날 아버지가 된다네 / 사람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되지만 / 여자와 남자 한몸 이루어 / 그리움 이어받는 원으로 산다네보시오 / 그리움의 태에서 미래의 아기들이 태어나네 / 그들은 자라서 무엇이 될까 / 우리들의 아기는 살아 있는 기도라네 / 딸과 아들로 어우러진 아기들이여 /우리 아기에게 해가 되라 하게, 해로 솟을 것이네 / 별이 되라 하게, 별로 빛날 것이네 / 우리 아기에게 희망이 되라 하게, 희망으로 떠오를 것이네 / 그러나 우리 아기에게 폭군이 되라 하면 폭군이 되고 / 인형이 되라 하면 인형이 되고 / 절망이 되라 하면 절망이 될 것이네, / 오 우리들의 아기는 살아 있는 기도라네길이 되라 하면 길이 되고 / 감옥이 되라 하면 감옥이 되고 / 노리개가 되라 하면 노리개가 되기까지 / 무럭무럭 자라는 아기들이여 / 그러나, / 여자 남자 함께 가는 이 세상은 / 누구나 우주의 주인으로 / 태어난다네 / 누구나 이 땅의 주인으로 / 걸어갈 수 있다네
*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민들레>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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