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가 엄마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니는 부처다, 부처!" 성실한 천주교 신자인 이모가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한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을 터. 그 까닭이란, 다름 아닌 '나(당시 19세)'다. 그렇다고 내가 뭐 대단한 사고를 친 것은 아니다. 그저 책을 읽었을 뿐이다. 시험 기간에 교과서 대신 다른 책을 읽었다는 게 (약간의) 문제가 될 수 있겠으나, 예나 지금이나 나는 이모의 책 핀잔에 몹시도 의연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엄마는 내게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수학 시험이 다섯 시간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도 나는 유유자적 인생을 즐길 수 있었다. 돌이켜보니 엄마를 부처에 비유한 이모의 심정도 이해가 가지만, 어쨌든!
시간을 더 거슬러 초등학교 때 일기를 들춰보면 선생님께 혼이 난 이야기가 시리즈로 등장한다. 그중 대다수는 수업 시간에 '딴짓'을 하다 걸렸다는 내용인데, 여기서의 '딴짓'이란 교과서 외 책 읽기다.
제임스 본드 뺨칠 작전이 내게도 필요했던 것은, 쉬는 시간에 읽던 스펙터클하고 다이내믹한 책 속 장면을 수업 종이 울렸다는 이유로 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모두 밝히겠어요! 진실은…" 하고 말했을 때 엔딩 음악이 흐르며 다음 회 예고가 나오는 것만큼이나 찝찝한 일인 것이다. 이런 찝찝함을 견디지 못한 나는 위와 같은 작전을 실행할 수밖에 없었고, 본의 아니게 요주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왕따? 요즘은 책따!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다. 학생 누군가 수업시간에라도 책을 읽으면 그 용기를 격려하고 칭찬해줘야 할 마당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용기란, 선생님 눈을 피할 작전 실행 용기도 아니고, 입시 전쟁의 복판에서 다른 데 눈을 돌릴 용기도 아니다. 친구들에게 '찐따'로 비칠 수 있음을 감수할 용기다. '왕따'라는 말은 나 어릴 적에도 있었지만 '책따'라니! 이 황망한 신조어의 뜻을 풀이하는 일은 잠시 뒤로 미뤄 두고, A고등학교 정은영(가명, 18) 양의 독백을 먼저 들어보자.
"왜 너는 책을 읽니?" 책을 펼치면 친구들의 목소리가 귀에 맴돕니다. 처음에는 '내가 예민한가'라고 생각도 했지요. 어쨌든 교실에서 책 보기가 꺼려집니다. 스트레스받는 것 같아요. 단지 독서를 좋아할 뿐인데…. 중학교 때는 교실에서 책을 읽는 친구가 한두 명은 있었는데. 고등학교 올라오니 쉬는 시간에 교과서, 참고서 외의 책을 보는 학생이 아예 사라졌어요. 그래서 친구들이 책 보는 저를 보면 신기하게 여기고 간혹 비아냥거리고 싶은 걸까요?
- <동아일보> 3월 17일 자 '요즘 교실, 기막힌 '책따' 중
청소년들이 '입시 준비로 시간이 부족해 책을 읽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옛말이다. 요즘 청소년들이 책을 읽지 못하는 것은 또래 집단의 은근한 비아냥거림과 무시하는 분위기 때문이라는 것이 현장의 목소리. 이른바 '책따' 현상이다.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구닥다리처럼 낡은 행동이라는 통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통념이 어디에서 기인했는가에 관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자꾸만 드는 이런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책 '못' 읽는 아이들, 괜찮을까?"
"내인생의 발여자"?
"진짜 더 이상은 한개다… 나는 아직도… 니가 내인생의 발여자라고 생각하는대…."
사랑하는 그 혹은 그녀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았다면, 인생의 '발여자'로서 감동을 받아야 할까, 화부터 내야 할까?
잠시 다른 이야기로 눈을 돌려보자. 사실 위 문장은 어느 SNS에 올라온 게시글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머리를 대여섯 번쯤 긁적이며 옮긴 것이다. '발여자'라니! 그 혹은 그녀가 전하고 싶었던 말은 "진짜 더 이상은 한계다. 나는 아직도 네가 내 인생의 반려자라고 생각하는데…"라는 진지한 마음이었을 테지.

'대학내일 20대 연구소'가 지난해 7월 전국 대학생 389명을 대상으로 한글에 대한 인식과 한글 맞춤법 이해 실태를 조사했다. 그 결과, 응답자의 91%가 '맞춤법을 빈번하게 틀리는 이성에 대한 호감도가 감소한다'고 답했다. 남성은 86.7%가, 여성은 95%가 '호감도가 감소한다'고 답해 여성이 남성보다 맞춤법 오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득 옛일이 떠오른다. 사랑에 빠지면 콩깍지가 씐다지만, 콩깍지만으로는 지킬 수 없던 아, 너의 호감도! 그가 보낸 문자를 읽을 때마다 나는 손톱 끝을 잘근거렸다.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세 번을 연달아 읽고 나서야 아하! 깨닫고는 잘근거림을 멈추던 나날이었다. 엄마처럼 관대하지 못했던 나는 그를 놓쳤다. 그리고 그 후에야 비로소 창의력 퀴즈 같은 맞춤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씁쓸한 옛이야기.
"멘토로 삶기 좋은 인물"(멘토로 삼기 좋은 인물)
"삶과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힘들면 시험시험 하라고"(힘들면 쉬엄쉬엄 하라고)
"장례희망"(장래희망)
"부랄이던 눈"(부라리던 눈)
"곱셈추위라고 아무도 안 나오나?"(꽃샘추위라고 아무도 안 나오나?)
- <디스패치> 4월 6일 자 '[D컷] 기발, 황당, 경악 수준의 '맞춤법 테러' 총정리' 중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설마, 저렇게까지 틀리겠어?' 싶은 사람들도 많겠지만, 사실이다. 몇 년 전 대학교 신입생들의 작문을 첨삭할 일이 있었는데, 그들이 써 내린 창의적 원고와 마주하고는 빨간색 볼펜을 분홍색으로 바꿔 쥔 적이 있다. 붉은 비보다는 분홍 비가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들은 원고지에 "어의없는"(어이없는) 일과 지문에 "들어난"(드러난) 저자의 생각 등을 써내려갔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한 마디. 이게 "왠일이니!"(웬일이니!)
물론 모두가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예상치 못한 다수 대학생들의 기괴한 맞춤법, 비문 습격에 나는 몹시도 좌절했다. 왜? 그야 일거리가 그만큼 불어났으니까! 60여 장의 원고지를 펼쳐놓고 어마어마하게 창의적인 한글(혹은 문장) 탄생 원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니, 유레카!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이들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쓰기'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읽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당시 신입생들이 받은 과제는 제시된 지문을 읽고, 본인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서술하라는 것이었다. 요컨대, '논리적으로 서술하라'가 아니라 '제시된 지문을 읽고'에서 이미 문제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다. 지문의 내용을 제대로 읽지 않았으니 본인의 견해 또한 제대로 밝힐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학생들에게 나는 수필가 J.B. 프리스틀리의 말을 전하곤 했다.
"애당초 글을 쓰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꼭 써야 한다면 무조건 써라. 재미없고, 골치 아프고,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그래도 써라. 전혀 희망은 보이지 않고, 남들은 다 온다는 그 '영감'이라는 것이 오지 않아도 그래도 써라. 기분이 좋든 나쁘든 책상에 가서 그 얼음 같이 냉혹한 백지(白紙)의 도전을 받아들여라."
하물며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사람도 백지를 '도전'으로 표현할진대, 우리 같은 범인(凡人)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러니까 그냥 무엇이든 써보자. 그런데 바야흐로 나의 상투적 격려 말을 바꾸어야 할 때가 도래했다. 이제는 '백지의 도전'이 아닌 '글씨(혹은 문장, 글, 책)의 도전'에 대해 설파해야 할 듯하다. "얼음같이 냉혹한 글씨의 도전을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책따', 너희가 필요해
요즘 청소년들은 '영상 세대'다. 오직 흑백이 존재하는, 온전히 정적인 '글'(그것이 책이든, 사용설명서든, 신문이든)을 읽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고역과 다름없다. 화려한 영상에 익숙해져 글 읽기를 기피하는 풍토인데 '책따'까지 유행한다니. 그야말로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불과 15년 전만 하더라도, 엄마들은 아이를 재울 때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동화책을 읽어줬다. 그렇게 잠이 들면 책 속 장면들이 간혹 꿈으로 이어졌고, 책은 머리맡이나 발치에 있는 흔한 것이었다. 엄마의 회상을 빌리건대, 어릴 적 나는 한글을 몹시 늦게 깨우쳤다고 한다. 따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글은 몰라도 책 읽는 것은 좋아했다. 스스로 읽을 수 없으니 엄마 무릎에 자리 잡고 앉아 음성 지원 서비스를 받거나, 동화책에 딸린 테이프를 들었다. 수없이 반복하자 나는 본능적으로 책장이 넘어갈 때를 알게 되었다. 해부하듯 읽던 동화책을 통해 본의 아니게 한글을 익힌 모양이었다. 내게 제대로 된 한글을 가르쳐준 것은 책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스마트폰 화면을 보며 잠이 든다. '뽀통령'도 나오고 '타요'도 나오는, 엄마들이 꼽은 세기의 발명품! 하지만 빠르고 화려한 영상보다 느리고 투박한 글이 더 필요할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때'가 바로 요즘이라고 생각한다. 영상과 더 친한 다수가 책과 친해져 보려는 나에게 '썩소'를 날리더라도, 굴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책따'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면 좋겠다. 느긋한 마음으로, 한 박자 천천히. 손대면 모두가 '툭' 터져버리는 요즘, '책따'들이 더욱 절실해지는 밤이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바로가기 :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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