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논밭에 심어 기르는 식물이니 농학에서는 '재배식물의 꽃'이라 부르지만, 그 말이 맘에 안 든다. 뭐라 부를까? 사람을 먹여 살리니 '밥꽃'도 생각해보았지만 맨 처음 부르던 대로 '곡식꽃'이라 부르고 있다. 이 곡식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글 쓸 기회를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다. 그러다 <살림이야기>와 이야기가 되어 연재를 시작했다. 연재를 하면서 사진을 남편이 맡기로 했다. 그건 참 잘한 일이었다. 같은 주제에 관해 함께 연구하고 의논할 이가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가. 남편이 함께하면서 나는 입으로는 '곡식꽃 곡식꽃' 노래를 하지만, 실상 공부도 별로 하지 않고 곡식꽃을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남편도 새롭게 발견하는 것들이 많은지 열심이다. 아침이면 사진기부터 챙겨 들고 나간다. 아침 맑은 정신에 렌즈로 꽃을 들여다보는 힘. 정말 대단하더라. 내게 툭 던지는 질문을 보면. "시금치꽃이 이상해! 아무리 봐도 두 가지야." 그러면 나는 말문이 탁 막힌다. 함께 농사지은 지 10여 년. 우리가 짓는 농작물에 관해서는 삼투압작용처럼 비슷한 농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대꾸할 말이 없으니 남편하고 같이 시금치밭에 가서 자세히 살펴도 보고, 도감이나 농진청 자료를 열심히 찾는다. 그래서 시금치는 암수딴그루라는 걸 알았다. 호박이 한 포기 안에 암꽃 수꽃이 따로 있는 건 알았지만, 시금치가 은행나무처럼 어떤 건 암놈, 어떤 건 수놈이라니…. 혼자였다면 그냥 넘어갔을 수 있는 질문들. 꽃을 이해하는 길잡이일 수 있는 질문들. 한 사람 머리에서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스리슬쩍 얼렁뚱땅 넘어가도 표시가 안 나는데 둘이서 함께하니 눈에 보일 수 있었다.

그림을 한 장 그리다
그렇게 해를 보내고 겨울을 맞아, 우리는 식물학 기초 공부가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다. 농사지은 경험만으로는 부족한 게 많더라. 도감이나 자료에 나오는 용어가 낯선 거는 그렇다 치고, 개념들이 서로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책을 보다가 식물의 계통도를 보았다. 아, 식물을 이렇게 분류할 수 있구나! 초등학생처럼 신기했다. 우리가 기르는 곡식들은 이 그림 어디에 들어갈까? '곡식꽃 시리즈'에 들어갈 곡식들을 정리해 놓은 공책을 펼치고, 하나하나 그 식물 계통도와 맞추어보다가, 달력 뒷장에 그려보기 시작했다.
○○강, ○○과가 우리네 삶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벼나 고추를 심어 기르는 농사와 이 계통도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고추와 토마토와 가지의 떡잎이 얼마나 똑같은지! 얼핏 보기엔 아무 관련 없을 것 같은 감자와 가지가 28점무당벌레에 똑같이 피해를 받는 것. 씨를 받다 보면 상추와 해바라기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단지 많이 거두려는 욕심에서 벗어나 내가 기르는 곡식들을 이해하려면 이런 생물학 공부가 필요했다. 마치 생명의 근원을 찾아가는 기분이랄까.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듯 우리가 키우는 작물들이 어떤 계통으로 이어지고 누구와 가까운가?
그냥 볼 때와 손수 그려볼 때가 다르더라. 그려보니 빠진 것도 많고 엉뚱하게 이어진 것도 생겼다.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는데 한번 발을 디디니 그림 한 편이 나왔다. 그림의 이름은 '곡식꽃(재배식물)의 계통도(2014)'.
1년 뒤 다시 그림을 그리다
다음 해에 '전북 생태교실'을 들었다. 공부 마지막에 책을 한 권 추천받았다. 이상태 박사의 <식물의 역사>(지오북 펴냄)로, 평생 식물분류학을 연구하신 분이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쓴 책이란다. 식물의 탄생부터 이야기하니 지구별의 역사를 공부하는 기분이었다. 바다의 녹조류가 육지로 올라와 드디어 피자식물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식물의 진화과정을 훑는다. 일반인도 읽을 수 있게 썼다지만, 읽는 나는 암호 해독문도 이런 암호 해독문이 따로 없다. 게다가 이 책에 나오는 식물학 용어는 사전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 읽다가 잠들다가 대충 넘어가다가 드디어 136쪽에 이르러 속씨식물의 분류와 계통-식물의 분류가 나온다. 초겨울에 잡은 책을 입춘이 지나서야 이 대목에 접어든 거다. 관심이 있어서일까? 어렵긴 마찬가지지만 이 대목부터는 한달음에 읽을 수 있었다. 모르는 단어는 건너 뛰어가면서.
모든 학문이 그렇듯, 사람에 따라 분류체계가 달라지더라. 새로운 분류체계가 나오니 그걸 이해하려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리 논밭 곡식들의 계통도(2015)'. '곡식꽃(재배식물)의 계통도(2014)'를 그려 벽에 붙여놓고 들여다보기를 1년. 그리고 새로 2015 버전을 그려놓고 다시 보니, 나를 먹여 살리는 곡식들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 기분이다. 꽃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며 기뻐하는 순간이 진주알이라면, 이 그림은 진주알을 쭉 꿰어준다. 그래서 귀농인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귀농통문>에 싣고 싶다고 자청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내가 삶에서 얻은 거라기보다는 공부를 통해 이해한 내용이다. 게다가 나는 식물학 전공과는 한참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러니 얼마나 어설프랴. 게다가 이 모든 그림을 뒤흔드는 유전공학 연구가 지금도 진행 중이란다. 혹시 잘못 이해한 부분이 눈에 보이면 알려주시기 바란다. 여러분의 에너지가 모여 이 그림이 좀 더 좋아져, 누가 봐도 대번 알 수 있는 그림이 되길!

식물계는 진화과정에서 겉씨식물문과 속씨식물문으로 나뉜다. 진화상 오래된 겉씨식물에는 잣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은행나무가 있다.
나머지 우리가 먹는 재배식물은 다 속씨식물이다. 속씨식물은 외떡잎식물과 쌍떡잎식물로 나뉜다. 지구별의 사람들과 짐승들이 먹고사는 식량이 되는 벼, 보리, 밀, 수수, 옥수수, 기장, 조, 율무가 다 벼과다. 이 벼과는 외떡잎식물이다. 외떡잎식물은 꽃이 볼품없거나 심지어 잘 피지 않는 경우도 있다. 벼과도 되도록 꽃에 에너지를 적게 쓰고 모든 에너지는 열매에 쏟는다. 그래서 꽃이 볼품없지만, 우리를 먹여 살리는 없어서는 안 되는 꽃이 바로 벼과 꽃들이다. 내 공책에 곡식으로 분류된 것 가운데 메밀만은 쌍떡잎식물 마디풀과다. 아마도 사람은 메밀만 먹고는 살 수 없을 듯하다.
외떡잎식물
외떡잎식물의 특징은 잎맥이 나란히맥. 또 씨방의 벽 바깥에 나 있는 꿀샘(격벽밀선)이 주요 특징이란다.
1) 택사아강
사람이 먹는 재배식물은 여기에 없다.
2) 종려아강
○ 천남성과(토란)
3) 닭의장풀아강
닭의장풀이 식물의 분류 체계에서 중요한 식물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이 아강은 꽃잎이 사라지고 충매화에서 풍매화로 가는 과정을 나타낸단다. 과연 뭐가 있을까? 여기에 씨방은 한 개. 열매에 터지는 선이 없어 열리지 않는 열매인 벼과가 여기에 들어간다. 사람이 먹고사는 곡물이 모두 닭의장풀아강이었다니….
○ 벼과(벼, 밀, 보리, 기장, 조, 옥수수, 수수, 율무…)
4) 생강아강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생강과 식물은 제주도와 남해안에서 나는 양하 말고는 없지만, 인도네시아에 가보니 참 종류가 많더라. 그리고 바나나, 파인애플이 생강아강이다.
○ 생강과(생강)
5) 백합아강
백합이나 난초와 같이 꽃이 예쁜 식물도 많지만, 꽃의 중심에서 방사대칭인 백합과와 마과가 여기에 들어간다. 마와 고구마가 친척인 줄 알았는데, 마는 외떡잎식물 백합아강이고, 고구마는 쌍떡잎식물 국화아강 메꽃과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 백합과(파, 부추, 달래, 마늘, 양파, 부추, 아스파라거스)
○ 마과(마)
쌍떡잎식물
1) 목련아강
진화의 역사상 목련이 가장 원시식물에 가까운 나무란다.
○ 목련과(오미자)
○ 수련목 연과(연)
2) 조록나무아강
뽕나무과와 참나무과, 가래나무과가 여기에 들어간다. 꼬리 모양의 꽃을 피우며 꽃대가 연하여 늘어지며 꽃가루가 발달하지 않아서 암꽃과 수꽃이 따로 핀다. 한마디로 원시적인 특징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아강이다. 참나무와 밤나무는 우리 사람에게 식량이 되는 나무다. 밤나무는 본디 ‘밥나무’였다는 설이 있고, 참나무 열매 도토리는 산간지대 사람들에게 겨울 식량이 되어 아직도 경북 산간지대에는 꿀밤(상수리나무 도토리)시루떡, 도토리찰편, 도토리콩단자가 별미음식으로 남아 있다.
○ 참나무과(떡갈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밤나무속 밤나무)
○ 뽕나무과(오디)
○ 가래나무과(호두)
이제 식물은 진화하여 쌍떡잎식물의 특징을 갖추기 시작한다. 꽃도 예쁘고 여러 가지 다양성의 세계가 펼쳐진다. 우리 들판을 울긋불긋 물들여준다.
쌍떡잎식물은 꽃잎의 특징에 따라 갈래꽃과 통꽃으로 나뉜다. 꽃잎이 낱낱이 떨어지면 갈래꽃, 꽃잎의 일부 또는 전부가 붙어 있으면 통꽃. 갈래꽃보다는 통꽃이 더 진화한 꽃이란다. 꽃들을 갈래꽃이냐 통꽃이냐로 나눌 수 있을 만큼 서로 다른 규칙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분류체계에서는 ‘통화식물목’이라는 분류체계를 두기도 하더라. 그래서 갈래꽃과 통꽃으로 나누어 그려보았다.
3) 석죽아강
메밀 싹을 나물로 잘 먹는데, 메밀이 외떡잎식물 벼과가 아니라 쌍떡잎식물인 걸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 명아주과(시금치, 비트)
○ 마디풀과(메밀)
4) 오아과아강
'오아과'는 어떤 식물인지 모르지만 인도, 중국 윈난 성에 많이 자라는 나무란다. 이 아강은 수술이 많은 특징이 있다는데 여기에는 갈래꽃과 통꽃이 섞여 있다.
오아과아강 갈래꽃에는
○ 차나무목(찻잎),
○ 아욱과(아욱),
○ 십자화과(무, 배추, 갓, 열무, 알타리무…)
오아과아강 통꽃에는
○ 박과(박, 호박, 오이, 수박, 참외, 수세미오이…)
○ 쪾감나무과(감)
○ 진달래과(블루베리)
박과에는 달고 맛있는 열매들이 줄줄이 달린다. 오이잎벌레가 오이 잎만 갉아 먹는 게 아니고 호박과실파리가 호박에만 구더기를 쓰는 게 아니다. 박과인 수박, 수세미오이, 박, 오이, 참외 이 모든 것에 피해를 준다. 사람은 몰라도 벌레는 안다.
5) 장미아강
오아과아강에 견주어 이름만 들어도 익숙하다. 식물학에서 말하는 장미는 지금 우리가 보는 장미처럼 겹꽃이 아니라 야생 장미로 찔레에 더 가깝다고 한다. 장미아강의 대표 주자인 장미과에는 사과, 배, 살구, 자두, 복숭아, 매실, 앵두와 같은 과일나무들이 다 들어가고 나무는 아니지만 딸기도 여기에 들어간다. 그리고 뜻밖에도 콩과가 여기에 들어간다. 아니, 딸기와 콩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어? 콩꽃이 그래서 모두 다 그리 예뻤구나. 다만 장미꽃과 달리 꽃보다는 열매에 에너지를 쏟아부으니 꽃이 작아 눈에 잘 안 띄고 또 금방 지고 말 뿐.
○ 장미과(사과, 배, 살구, 자두, 복숭아, 매실, 앵두, 딸기, 모과)
○ 콩과(콩, 완두, 팥, 강낭콩, 녹두, 동부, 땅콩)
○ 갈매나무과(대추)
○ 포도나무과(포도)
○ 미나리과(미나리, 당근)
○ 운향과(귤, 유자)
6)국화아강
국화아강은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나타난 그러니까 진화의 맨 꼭대기에 있는 식물군이다. 국화꽃이 그렇게 대단한 꽃인 줄은 내 정말 몰랐다. 국화과에는 국화꽃만 있는 게 아니다. 먼저 상추와 쑥갓이 국화과의 대표적인 채소다. 그리고 우엉, 야콘, 돼지감자가 있다. 국화과 꽃들은 작고 가는 꽃들이 한 군데 빽빽이 모여 피는 머리꽃차례를 특징으로 가진다. 해바라기꽃을 보면 테두리에 노란 꽃잎처럼 보이는 건 가짜 꽃으로 시선을 잡아끌기 위한 장식일 뿐 암술도 수술도 없다. 암술, 수술이 있는 진짜 꽃은 가운데 빽빽이 모여 있어 꽃 한 송이에 해바라기 씨 하나가 열린다. 혼자서 살기 어려운 현대의 아파트나 빌딩과 같지 않은가!
○ 꿀풀과(들깨, 박하 그리고 새로 들어온 민트, 오레가노, 박하, 로즈마리)
○ 참깨과(참깨) 참깨도 꿀풀과로 넣기도 하고 따로 참깨과로 나누기도 한다.
○ 국화과(상추, 쑥갓, 우엉, 야콘, 해바라기, 돼지감자)
○ 메꽃과(고구마)
○ 초롱꽃과 (도라지, 더덕)
○ 쪾가지과(가지, 감자, 고추, 토마토)
우리에게 가지과의 감자, 고추, 토마토가 없었으면 어찌할 뻔했을까! 고추와 감자는 원산지에서 한번 나오더니 세계를 금방 석권한 식물이다. 가지, 토마토, 고추는 떡잎 모양까지는 거의 똑같고 본잎이 나와야 구별이 될 만큼 가까운 사이다. 한번 꽃이 피기 시작하면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쉬지 않고 꽃을 피워내고 그 꽃마다 열매를 달아낸다. 그 열매도 울긋불긋 아름다운 색을 띠고 향기로운 맛을 낸다. 농사를 처음 지을 때 고추도 토마토도 가지과인 게 신기하고 재미있었는데…. 또 이들은 비슷한 특징을 띄어 한번 농사지은 곳에 연이어 농사를 지으면 잘 안 된다. 해마다 농사계획을 짤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지난해 지지난해 가지과를 어디다 심었는지 확인하는 것. 가지과를 위해 우리는 돌려짓기의 고수가 되어간다.
귀농통문은 1996년부터 발행되어 2015년 11월 현재 75호까지 발행된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계간지입니다. 귀농과 생태적 삶을 위한 시대적 고민이 담긴 글, 귀농을 준비하고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귀농일기, 농사∙적정기술∙집짓기 등 농촌생활을 위해 익혀야 할 기술 등 귀농본부의 가치와 지향점이 고스란히 담긴 따뜻한 글모음입니다. (☞바로가기 : 전국귀농운동본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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