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체국에 갔더니 이런 공문이 있었다. 집배원의 주 5일 근무가 시행된 지 1년 2개월 만에 다시 토요 근무가 부활한 것이다. 한국노총 산하의 '우정노조'와 '우정사업본부'가 합의를 해서 내린 조치였다. 경기도 안양시 안양 6동, 안양세무서 앞에서 집배원 윤여병 씨(47세)를 만났다.
"토요 근무요? 인력 충원도 안 해 놓고 토요 근무를 시키면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평일에도 아침 6시 50분에 출근해서 8시에 퇴근하는데…."
윤 씨는 21년째 안양 지역에서 우편물과 택배를 배달하고 있다. 경북 예천이 고향인 그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실습생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그때가 1987년 여름이었다. 윤 씨는 우체국에 취직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처음 일했던 곳이 구로공단에 있는 한 공장이었어요. 대우자동차에 고무 패킹을 납품하는 곳이었는데, 일한 지 10개월 만에 산재를 당했어요."
윤 씨는 오른손을 보여 주었다. 손가락 네 개가 없다.
"새벽 4시에 작업하다 졸았어요. 병원에 가려는데 택시도 안 다니고, 정말 끔찍하게 아팠죠."
윤 씨는 곧, 고려대학교 구로병원으로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았다. 병원 7층은 산재로 손만 잘린 환자들만 있었다. 산재 환자들은 퇴원하면 오고 갈 데가 없었다. 큰 공장도 산재보험에 많이 가입하지 않았을 때였다. 치료비와 장해를 보상받을 길이 막막했다. 자연스럽게 같은 처지의 환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고민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산재노협)를 만들었다.
1988년, 한국은 올림픽을 개최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개발도상국 중 산재발생률이 가장 높은 나라였다. 열다섯 살 소년이 수은 중독으로 사망하고, '원진 레이온'에서는 이황화탄소에 노동자들이 중독되어 죽어 갔다. 윤 씨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위에도 많이 참여했다. 맨 앞에서 전경들하고 대치하다가 갈비뼈도 여럿 부러졌다. 당시 활동에 많은 도움을 준 사람으로 하종강 <작은책> 편집위원을 꼽았다. 윤 씨의 아내도 산재노협 활동을 하면서 만났다. 아내는 '해태제과'에서 초코바를 만들던 노동자였는데, 허리가 아파 산재 신청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

퇴원을 하고 윤 씨는 일하던 공장으로 갔다. 공장은 폐업하고 없었다. 윤 씨는 중증 장애등급인 3급을 판정받았다. 장애가 생기자 취직이 잘 안 됐다. 우체국 집배원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그때가 1995년, 윤 씨가 스물일곱 살 때였다.
"일이 너무 힘들어서 한 달에 10명도 넘게 그만두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저는 장애가 있는데도 채용이 된 거죠."
집배원은 온종일 걷고 뛰면서 일한다. 궂은 날에는 눈, 비 맞으면서 일한다. 겨울에는 눈에 오토바이가 미끄러져 넘어져서 어깨도 부러지고, 다리도 부러진다. 20년 이상 일한 집배원은 두 번 이상은 부러진다고, 윤 씨는 말했다.
"보통 하루에 편지 2000통에서 4000통을 분류합니다. 그러고 나면 편지 하나 들 힘이 없을 정도로, 손목이랑 손가락에 통증이 와요."
집배원은 등기나 우편물 외에 택배도 하루 3,40개 배달한다. 윤 씨가 담당하는 구역은 오래된 주택이 밀집해 있고 승강기가 없는 건물이 대부분이다. 특히 요즘 같은 김장철에는 무게가 20킬로그램(㎏)이 넘는 절임배추를 들고 4,5층 계단을 몇 번 오르내리면 일찌감치 녹초가 된다. 이렇게 강도 높은 노동을 하루 평균 12시간을 넘게 해야 한다.
"집배원은 죽으면 무릎부터 썩어 없어질 거예요. 나보다 젊은 친구가 있는데, 한번은 다리를 절고 다니더라고요. 무릎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70대 노인처럼 연골이 다 닳아 없어졌다는 진단을 받았대요."
10년 전 일인데, 당시만 해도 집배원들은 업무상 재해나 근골격계 질환에 대해 산재 보상 청구를 하지 못했다. 하는 방법도 몰랐고 사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재 청구를 하면 일터에서 찍힐까 봐 집배원들은 자비로 해결했다. 윤 씨는 산재노협에서 활동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동료들을 설득하고 돕기 시작했다. 직업병 전문 의사였던 공유정옥 씨를 일주일 동안 찾아가 작업 환경을 조사하는 방법을 배웠다.
"현장에서 사진 찍는데 실장, 과장부터 쫓아와서 '왜 사진을 찍느냐? 징계위 회부하겠다'느니 해서 대판 싸우기도 했죠."
윤 씨의 노력으로 안양우체국에서만 7명이 공무상 재해나 근골격계 질환으로 산재 처리를 받았다. 그러나 이 일로 윤 씨는 경고와 징계를 받기도 했다.
징계는 또 이어졌다. 2011년도에 사내 비정규직을 옹호하는 유인물을 뿌린 것을 다른 동료 집배원이 우정사업본부에 제보한 것이다. 집배원에게 몰리는 과다한 택배 업무 중 일정량을 위탁 택배 업체에 맡기는데, 이 하청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 10년간 낮은 수수료로 임금이 동결된 것이 이유였다. 파업하는 동안 택배 물량은 고스란히 집배원들이 떠안아야 해서 집배원들은 하청 노동자들을 욕했다.
"그런데 저는 꼭 반대로 나가 가지고, 위탁 업체가 안정이 되어야 우리 집배원도 좋아진다며 파업을 지지하는 유인물을 돌린 거예요. 하하하하."
이 일로 윤 씨는 우정사업본부에 일주일 동안 감사를 받는다.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신상이 털리는 조사를 받아 머리도 한 움큼씩 빠졌다.

아침마다 윤 씨는 그만두고 싶을 만큼 허리와 다리가 아프다. 다른 집배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꾸역꾸역 일어나서 우편 배달하는 이유는 단순한 배달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지역 주민들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어요. 집배원들 대부분이 동네 주민들 사정을 어느 정도 알죠. 저처럼 한 집배 구역 안에서 죽을 사람 3명 이상 구한 경우도 드물 거예요."
늘 밖에 나와 있던 주민이 안 보이면 윤 씨는 관심을 보였다. 부모님이 모두 일하러 간 사이 불이 났을 때 정신지체 장애인만이 홀로 남은 것을 발견해 구했다. 또 늘 보이던 주민이 안 보이고 인기척이 없자 119와 경찰에 신고해 문을 열고 들어가 얼어 죽을 뻔한 사람도 구했다.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사흘 동안 벌거벗은 채로 동사할 뻔한 사람을 구하기도 했다.
지역 주민들의 윤 씨에 대한 신뢰도 두텁다. 언덕길에서 무거운 시장 보따리를 집까지 날라다 주면 다음 날 꼭 사과 한 개라도 주면서 고마움을 표현하는 할머니, 평상에서 삼겹살 구워 먹을 때 윤 씨의 손을 꼭 붙들고 먹고 가라고 이끄는 주민들을 마주할 때면 보람을 느낀다.
오늘도 구불구불 좁은 언덕길을 올라가며 윤 씨는 주민들과 정겹게 인사를 하고, 길고양이도 쓰다듬어 준다. 혼자 사는 치매 어르신이 안 보이자 문을 두드려 보고 인기척이 있는지 현관문에 귀도 갖다 대 본다. 그리고 이웃 주민에게 어르신 행방도 꼭 물어본다.
"손가락이 잘리는 일이 없었으면, 저는 평생 노동 문제에는 관심도 없었을 거예요."
이제 윤 씨는 잘린 손가락으로 동료 집배원들을, 그리고 지역 주민을 구하는 집배원이 되었다. 인력 충원이 하루빨리 이루어져서 건강하게 웃으며 지역 주민을 대하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라고, 윤 씨는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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