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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잡년'이다 어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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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잡년'이다 어쩔래?"

[프레시안 books] <혐오 발언>

명절이면 오랜만에 일가친척이 모여든다. 안부의 말들이 오간다. 덕담만 오가는 것은 아니다. "그사이 살쪘네." "취직은 했어?" "결혼은 언제쯤?" 이런 말들은 비수처럼 날아와서 가슴에 꽂힌다. 전 국민이 결사적으로 다이어트 하는 시대에 살쪘다는 말은 악담에 가깝다. 젊은이들은 프레카리아트로 내몰리고, 삼포 세대를 넘어 n포 세대가 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취업, 연애, 결혼 여부를 묻는 것은 당사자들에게 잔인하게 들릴 수 있다. 이런 말들을 듣는 사람은 졸지에 자신을 비만, 백수, 비혼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다.

한 신문은 명절에 '말로 인한 상처'를 경험한 사람들이 70%라는 통계까지 제시한다. 혐오 발언이 상처와 모멸감을 주는 발화라고 한다면, 이런 일상어 또한 혐오 발언이라고 해야 하는가? 인터넷상의 끔찍한 혐오 발언은 물론이거니와,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말들이 어느 틈에 자극적인 말이 된다면? 냉정하고 '합리적'인 말들도 상대를 격분하게 만들 수 있다. 말은 발화자의 의도를 벗어나서 끊임없이 미끄러져 나가면서, 고통과 상처를 유발한다. 최상의 칭찬이 맥락에 따라 최악의 모멸감이 들도록 만든다. 언어에는 발화자가 의도하지 않은 과잉과 오독의 가능성이 언제나 남아 있다. 그렇다면 상황에 따라 혐오 발언이 아닐 수 있는 언어가 과연 있을까? 혐오감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혐오 발언을 규제하는 것은 가능할까?

"빨갱이", "검둥이", "잡년", "호모"와 같은 말을 내뱉는 사람은 자신이 상대방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이 있는 것으로 상상한다. 그렇다면 혐오 발언은 J. L. 오스틴이 말한 발언 내적(illocutionary) 발화인가? 오스틴의 발언 내적 발화는 말이 곧 행위가 되는 발화다. 결혼식 주례가 "갑순이와 갑돌이를 아내와 남편으로 선언하노라"라고 말하는 순간 결혼 행위의 효력이 발생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잡년"이라고 하는 순간, 호명 대상이 비천한 잡년이 된다면, 그것이 발언 내적 발화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발언 내적 발화가 가능한가? 혐오 발언의 주체는 무소불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혐오 발언 생산자들을 법으로 규제하고 솎아내면 혐오 발언은 사라질까? 악플을 견디다 못해 상처입고 우울증과 공황 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한국 사회에서 혐오 발화자들을 찾아내서 그들만 처벌하면, 한국 사회는 '살아볼 만한' 사회가 되는가? 혐오 발언을 끊임없이 재생산함에도 불구하고, 국가법은 어떻게 자신을 공정하고 중립적인 위치에 세울 수 있는가? 국가권력은 어떻게 개별 주체들에게 혐오 유발의 책임을 전적으로 전가하는가? 혐오 발언이 어떻게 '마법적으로' 주권적 주체를 구성해 내는가?

이런 물음에 버틀러는 토니 모리슨이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1993년)에서 제시한 우화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아이들이 맹인 여성에게 잔인한 장난을 친다. 아이들은 자기들 손 안에 든 새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맞혀보라고 묻는다. 맹인 여성은 아이들의 질문에 에둘러 말한다.

"글쎄,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니? 내가 알 수 있는 건 새의 목숨이 너희 손에 달렸다는 것뿐이란다."

맹인 여성, 아이, 새는 무엇의 비유일까? 맹인 여성은 작가, 새는 언어, 아이들은 폭력적인 국가권력으로 비유된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이므로 상황에 따라 새는 언어, 취약한 타자, 혐오 발언의 희생자, 버러지 취급받는 난민 등으로 얼마든지 연상될 수 있다. 언어는 새처럼 생명을 가진 것이어서 생성, 소멸한다. 새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천진한' 얼굴의 아이들처럼, 국가법은 언어의 삶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국가권력을 상징하는 아이들은 자신들이 새에게 가한 폭력을 맹인 여성에게 전가시키려고 한다. 우화 속 아이들처럼 국가는 천연덕스런 얼굴을 하고서 자신의 폭력성을 은폐하고 혐오 발언의 책임을 개별 발화자에게 떠넘긴다.

법은 발화 가능한 주체와 발화 불가능한 타자들의 경계를 설정한다. 자극적인 말(excitable)은 흥분하여 제정신이 아닌 말이므로 인용할 수 없는(ex-citable) 소음이다. 법은 역설적이게도 그런 소음에 의미를 부여하여 반복적으로 인용 가능한 발화로 만들어준다. 그로 인해 발화 가능한 주체는 자신이 주권적 주체인 것처럼 상상한다. 개별 주체에게 그런 지위를 부여해 주는 것이 다름 아닌 법이다. 법과 관행이야말로 주체가 반복적으로 인용하고 참조할 수 있는 역사적 맥락이자 사회적 퇴적물이다. 그런 법의 경계 짓기 자체가 폭력적인 것이다. 국가법은 자신의 폭력성을 은폐하고 법을 인용하는 개인에게 자율성을 부여해 주면서 책임을 전가한다. 혐오 발언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묻는다면 국가법의 폭력성은 은폐된다. 이렇게 본다면 혐오 발언을 규제하기 위해 법을 제정하자는 호소는 아이러니하게도 혐오 대상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국가와 공모하게 된다.

우리는 악플로 도배되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언어 폭력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쓴다. 하지만 버틀러는 언어가 곧 폭력인가라고 되묻는다. 버틀러에게 말은 곧 칼이 아니며 언어가 곧 행위는 아니다. 언어 폭력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발화자의 의도가 대상을 완벽하게 구속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언어와 행위 사이에서 발화자의 의도는 언제나 실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별과 혐오의 역사에서 인종 혐오,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에 관해 버틀러는 어떤 주장을 하고 있을까?

인종 차별을 연구한 마리 마츠다는 인종 차별적인 혐오 발언은 따귀를 얻어맞은 것 같은 모욕이자 위협이며 상처라고 말한다. 인종 차별 발언은 억압받는 집단을 비하하고 박해한다. 흑인에 대한 혐오 발언은 표현의 자유라는 점에서 허용되어야 할 '단지 말'이 아니라 영혼의 상처이자 차별 행위가 된다. 따라서 인간의 평등과 존엄에 위배되는 인종 차별은 당연히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마츠다의 주장이다.

인종 차별 발화에서도 버틀러는 오스틴의 언어 이론에 바탕을 두고 발화가 곧 행위는 아니라고 말한다. "검둥이"라고 내뱉는 백인의 등 뒤에는 흑인들을 인종적으로 억압하고 계급적으로 착취해온 역사가 있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최인자 옮김, 문학동네 펴냄)에서 보다시피, 300년에 걸쳐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왔던 아프리카 흑인들 중 6000만 명이 수장되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으로 취급받았다. 긴 항해 동안 살아남은 자들은 노예로 팔려나갔고 백인 농장주의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KKK단은 해방을 꿈꾸는 흑인들을 위협하고 린치를 가하고 교수형에 처하고 십자가를 불태웠다. KKK단이 지나간 자리에는 흑인들의 주검이 늘어진 나뭇가지처럼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검둥이"라는 발언 뒤에는 이런 잔혹한 역사가 퇴적되어 있다. "검둥이"라는 말은 한 개인이 내뱉은 욕설이 아니라 잔인한 역사의 합창이다. 그런 역사가 개인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왔을 때, 그것은 모욕이 되고 위협이 되고 상처가 된다. 이처럼 한 사람의 독창이 아니라 오래 세월 축적된 역사적 합창이 "검둥이"라고 호명된 흑인들을 비참한 노예의 지위로 추락시킨다고 버틀러는 주장한다.

한 백인 10대 소년이 흑인의 집 앞마당에서 십자가를 불태우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로 인해, 진보주의자들은 혐오 발언에 대한 법의 심판을 요구했다. 이런 요구는 사법부가 공정한 판단을 내릴 것으로 전제한 것이다. 하지만 사법부는 법을 해석하면서 혐오 표현에 인종 차별 발화뿐만 아니라 동성애 표현까지 포함시켰다. 그로 인해 사건의 발단이 된 인종 차별 문제는 점차 희석되고, 혐오스런 동성애가 적극적인 규제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급진적인 성애를 금지해야 할 것으로 규정하고 처벌하려는 성적 보수주의가 인종 차별 폭력에 대한 정부 검열과 나란히 작동하게 되었다는 것이 버틀러의 비판이다.

십자가 소각을 통해 흑인 가족에게 가해진 상처는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 것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반면, 동성애 표현은 혐오를 유발하는 도발적 행위가 된다는 것이 법적 판단이다. 그로 인해 KKK단의 십자가 소각이라는 인종 차별적인 역사는 부인되고, 오히려 그로부터 촉발된 흑인들의 위협적인 폭력 시위가 부각된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 흑인은 가해자가 되어버린다.

법은 인종 차별에 대한 '도발적인' 항의 집회로부터 (백인) 시민, 경찰, 공무원, 공공 기물, 사유 재산 등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판단으로 진행된다. 흑인 가족에게 가했던 위협의 불은 격분한 흑인들의 폭력적인 시위와 방화의 불길로 해석된다. 흑인들의 폭력 시위를 들먹이면서 법원은 로드니 킹을 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네 명의 백인 경찰관에게는 무죄를 선고한다. 그것이 공평무사한 것으로 전제한 법의 판단이다. 이렇게 본다면 법의, 법에 의한, '자의적' 해석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대단히 힘들어 보인다.

버틀러는 포르노그래피 논쟁에서도 말이 상처가 되고, 언어가 곧 행위임을 주장하게 될 때의 문제점을 일관되게 지적한다. 포르노가 곧 혐오 발언인가? 포르노 재현은 발언 내적 행위 효과를 갖게 되는가?

혐오 발언은 그런 발언을 들은 청자에게 모멸감과 더불어 계급적 위치를 떠맡긴다. 그 결과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성들은 상처 입는다. 그런 발언들은 '지배적인 구조적 관계를 재인용하고 재기입'함으로써 (남성) 지배 구조를 재생산하는 계기가 된다고 캐서린 매키넌은 주장해 왔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혐오 발언은 사회 내 지배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포르노와 같은 혐오 발언은 계급 사회에서의 여성들을 열등하고 종속적인 위치로 전락시킨다는 것이다.

매키넌은 혐오 발언으로서 포르노그래피의 법적 규제를 요구해 왔다. 포르노 논쟁에서 반포르노 진영의 선봉이었던 그녀에게 동성애, BDSM과 같은 급진적 성애는 혐오를 단지 재현한 것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다. 그녀는 포르노그래피는 여성을 인격적으로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성의 평등권을 억압한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매키넌은 표현 산업의 자유보다는 여성의 평등권이 더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버틀러가 보기에 포르노 재현이 곧 포르노 실천은 아니다. 흑인 갱스터랩이 도시 범죄와 여성 비하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처벌을 요구하게 되면, 갱스터랩의 재현은 곧 행위가 되어버린다. 여성 혐오적인 노래 가사에 분노하면서 법적인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것이 보수적인 페미니스트의 입장이지만, 버틀러가 보기에 이런 주장은 성적 보수주의와 페미니즘이 공모함으로써, 인종 차별을 희석시키고, 국가의 검열과 처벌을 강화시키는 데 일조하도록 만든다. 특히 미국에서 혐오 발언은 인종적 상처의 결과는 축소시키고 성적인 상처의 영역은 가능한 확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버틀러는 지적한다. 갱스터랩에 재현된 여성 혐오 발언에 대한 단속은 인종 차별로 전이되고, 성차별 단속이라는 이름하에 인종 차별은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매키넌은 포르노그래피가 일종의 혐오 발언이며, 그것이 세계를 포르노적인 장소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포르노 세계에서의 현실과 그것에 대한 경험 사이에 아무런 간극이 없는 것처럼 주장함으로써 포르노를 보는 것만으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본다면 포르노의 시각적 재현은 자신이 묘사하는 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신적 수행문과 유사한 효력을 가진다.

하지만 포르노의 시각적 재현에 여성의 행위가 언제나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포르노적인 재현에 여성들이 희생자로서 복종하는 것만도 아니다. 포르노가 여성에게 신적인 발언 내적 행위 효력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버틀러는 비판한다. 그런 포르노적 명령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불가능한 수행성이다.

매키넌에게서 보다시피 진보 세력은 혐오 발언의 대상자들을 순전히 희생자로 규정해 왔다. 버틀러가 보기에 희생자 담론은 진보주의자들의 명분과 실천에 편리하고 손쉬운 전략에 불과하다. 희생자 담론은 혐오 발언 주체를 절대적인 지배의 입장에 세우고 타자를 무기력한 수동적 존재로 만든다. 그렇다면, 주권적 주체의 권력에 복종하는 타자가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버틀러가 그토록 주권적 주체의 불가능성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버틀러는 주권적 주체되기의 실패에서 저항의 틈새를 열어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주체는 결코 주권적 주체가 될 수 없으므로 타자를 자기 의도에 완전히 종속시킬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어떤 혐오 발언도 상대를 완벽하게 복종시키는 데 실패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버틀러는 군대에서의 동성애와 관련해서도 재현이 곧 행위가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동성애 재현이 곧 동성애 행위는 아니라는 것이다. 동성애자가 주권적 주체라고 한다면, '난 동성애자'라고 선언하는 순간 동성애 행위를 마법적으로 전염시키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동성애자들이 그처럼 마법적인 힘을 과연 갖고 있는가?

언=행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버틀러가 주권적 주체의 실패를 그토록 강조한 것은 동성애 혐오에 맞서기 위한 하나의 전략임이 드러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버틀러의 군대 비판은 격세지감이 들 수 있다. 미국은 2011년 동성애자 군 입대 전면 자유화를 결정했다. 하지만 버틀러가 이 책을 저술하고 있었을 무렵만 해도, 클린턴 행정부는 군대에서 동성애자임을 '말하지도 말고, 묻지도 말라'는 제한적 동성애자 군 입대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에 따라 군대에서 시민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동성애자들은 자기 성적 정체성에 관해 침묵해야만 했다. '나는 동성애자'라는 발언이 곧 동성애 행위로 곧장 등치되기 때문이다. 동성애 탄압의 부당함을 지적하기 위해 버틀러는 말이 곧 행은 아니라고 그토록 강조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버틀러는 동성애 혐오를 사회적 편집증으로 분석한다. 이런 편집증적 관점에서 보자면 "난 동성애자"라는 선언 자체가 성적 유혹 행위가 되어버린다.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은 마법적으로 전파되고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간다. 동성애자의 존재 자체가 에이즈, 질병, 오염, 얼룩으로 다가온다면, 그것이야말로 편집증적인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퀴어 축제에 대해 공연 음란 행위 금지 가처분 신청이 제출되고 있다. 버틀러 이론을 인용하자면, 퀴어 축제의 '음란한' 공연을 보는 것만으로 내가 그런 퀴어가 될 것이라는 편집증적인 공포가 있는 셈이다.

<혐오 발언>(유민석 옮김, 알렙 펴냄)을 통틀어 버틀러는 국가가 혐오 발언을 생산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국가에게 혐오 발언의 규제를 요청할 것이 아니라 국가 폭력을 심문하고 길들이는 것이 우선이다. 그녀의 전략대로라면 금지법을 제정하여 자승자박을 할 것이 아니라, 해체함으로써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게다가 혐오 발언을 내뱉는 주체가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주권적 주체는 아니다.

그러니까 온갖 자극적인 혐오 발언과 마주치더라도 모멸감으로 상처 입지 말라. 저들이 나에게 상처 줄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주문을 외면서 되받아치라는 것이 버틀러의 전략인 셈이다. 그런 전략 중 하나가 다름 아닌 혐오를 자부심으로 바꾸는 것이다. 게이 혐오를 게이 자부심으로 되받아치고, 잡년이라는 호명에는 그래 잡년이다 어쩔래, 라고 하면서 보란 듯이 잡년 축제, 잡년 행진을 전파하는 것이다.

자극적인 발언 전반에 대한 수사학적 분석을 하겠다고 못 박은 버틀러에게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성 혐오, 피해자 혐오와 같은 약자 혐오에 관한 직접적인 대답을 찾기는 무리다. 버틀러가 무슨 신적인 발언을 하는 것은 아니다. <혐오 발언>은 읽는 수고에 비해 얻는 것이 많지 않다 하더라도 격분하여 정신줄 놓지는 말라는 것이 버틀러의 조언이라면 조언일 것이다. 대답을 찾는 것은 언제나 독자의 몫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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