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누구나 축제를 좋아한다. 특히 아이들은 축제를 보며 꿈을 꾸고 성장한다. 그리고 축제를 통해 휴대폰이 친구가 된 삭막한 사회에서 축제는 모처럼 ‘가족’이라는 행복한 소통의 공간이 된다.
오후 4시부터 문을 열면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마임이 시작되는 축제이다. 그 축제를 보기 위해 늦은 오후 경춘선 전철을 탔다.

나처럼 축제의 깨비(관객)가 되기 위해 춘천 가는 경춘선 전철을 타는 가족들이 꽤 많아 보였다.
경춘선 전철이 달리는 5월의 마지막 토요일 오후인 27일. 차창 밖 북한강은 내게 답답했던 일주일간의 시간들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1시간 10분 정도 걸려서 도착한 춘천역.
나는 의암호가 있는 공지천 둑방길을 걸어서 내가 쓴 소설 ‘붉은 벽돌집’의 배경이 되었던 옛 어린이 회관 산책로길로 올라갔다.
7년 만에 다시 보는 춘천 마임축제이다. 저 멀리 행사장 깃발들이 보였다. 그리고 춘천마임축제를 알리는 전광판의 광고들이 깜빡거렸다.

나는 붉은 벽돌집에 잠시 앉아 생각했다. 모든 축제들이 공장에서 대량생산되어 쏟아져 나오는 그림을 그린 앤디워홀의 ‘푸른 코카콜라병들’처럼 물고기의 소비만 너도나도 부추기는 개성 있는 축제가 없는 우리 사회에서 춘천마임축제는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축제장에 입구에 깨비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 토요일 축제를 맛있게 소비하고 싶었다.

축제가 열리는 수변공원 광장은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축제가 열리는 난장은 7년 전과 달리 규모가 다양해졌고, 유럽의 축제들고 비교해도 손색없을 만큼 웅장해졌다.
입구에는 성벽 같은 흰색 천으로 벽을 만든 조형물이 색다르다.
벌써 마임공연이 시작된 ‘마트쇼’에는 많은 깨비들이 모여 앉아서 관람을 하고 있었다.

관객과 속으로 들어와 깨비들과 소통하는 마임이스트들의 몸짓이 영화관이나 TV앞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다.
과학문명 속에서 과학과 버무려진 영화와 TV상자에 바보상자 되거나 아니면 스마트폰으로 카톡이나 게임을 하고 영화를 보는 진화하는 공간과 다른 것이 있다면 맘껏 웃음을 폭발시키며 공감하는 모습이 웬지 낯설다.
다음 공연 장소로 가기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는 길. 도로 쪽으로 기차역의 화물열차를 닮은 대형 이동식 간이 화장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춘천을 중심으로 한 이곳 강원도는 한반도 북쪽이라 겨울축제가 많다.
그 곳 축제를 다녀 온 사람들의 가장 큰 불만은 행사장에서도 아주 멀리 배치되어 효율성이 떨어지고, 손바닥만해 냄새가 심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화장실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대형화했고 깨끗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외국의 관광지에서나 볼 수 있는 멋지고 깨끗해 보이는 촘촘히 늘어선 높은 간이음식점 아래 사람들이 길게 줄을 지어 음식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축제장 풍경을 보며 다음 공연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어린아이들이 무서워하면서도 보고 싶어 하는 도깨비를 만날 수 있었다. 공연 뒤편으로 춘천이 자랑하는 의암호가 저녁을 맞이하고 있다.
나는 캠핑장의 저녁풍경에서나 볼 수 있는 바비큐 파티처럼 고기를 구워 먹는 사람들의 행복한 저녁 식사시간을 보며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학시절. 원주의 작은 소극장에서 ‘아버지의 연설’이라는 프랑스 작품의 주인공 아버지가 되어 연극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마임이스트들과 달리 대사를 외워야 했던 그 시절 나는 연극배우의 젊은 고민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한 여름. 서울에서 경춘선 기차를 타고 춘천에 내렸을 때 내가 아는 분이 소개해준 작은 레스토랑이 있었다.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레스토랑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곳에서 나는 처음 우리나라 마임이스트 1세대라 불리는 젊은 마임이스트 유진규 씨가 몸짓으로 언어 전달을 표현하는 작은 무대를 처음 보았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전람회’라는 지하 카페로 와서 커피를 마시며 마임에 대해 애기를 나눈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 젊은 나날의 경험은 대학 졸업 무렵, 나는 ‘금초’와 ‘장미의 수분’, ‘아프리카로 가는 석고상’ 이라는 희곡을 썼고, 나는 한 문학지에 희곡이 당선되면서 극작가로 데뷔를 했다.
나는 가방을 열어 집에서 준비해 온 커피 병을 꺼냈다. 그리고 한 잔을 마셨다. 오후 내내 말랐던 목젖이 커피 향에 강물처럼 녹아 흐른다. 진하다. 그러면서도 그 향이 오래 입안을 맴돌았다.
커피 한 잔을 다 마시자 나는 ‘카파’라는 도깨비 공연을 보기 위해 일어났다.

‘카파’ 공연은 장난기가 많으면서도 상냥한 도깨비가 아이가 있는 가족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너도 나도 폰만 만지작거리는 가족들의 개인주의적인 모습과 달리 무서워하는 아이, 그러면서도 도깨비와 말한다는 사실에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며 이 축제는 기계문명과 친구가 되어가는 사회에서 그들을 인간과 대화로 소통시켜주는 또 다른 의미를 주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저녁 해가 의암호로 풍덩 빠질 무렵. 도깨비는 맥주병을 꺼내 솜방망이를 적시더니 입으로 불을 뿜었다.
그 순간 강물 속으로 풍덩 빠지는 저녁 해와 달리 도깨비는 어두워져 가는 축제장 하늘에 빠알간 해를 닮은 불을 하늘에 올려놓았다.

깨비들의 ‘와!’하는 탄성이 호수주변에 울려 퍼진다.
나는 깨비 가족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바로 옆의 ‘세탁반장’ 공연을 준비하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세탁공장 옷을 입은 사람들이 빨래를 널고 있다.
그들이 만드는 공연을 기대하며 나는 두 명의 마임이스트가 나와 ‘깨비쇼’라는 공연을 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 마당극처럼 관객인 깨비들과 소통하는 그들을 본다. 다만 우리의 전통 마당과 달리 두 명의 마임이스트들은 언어의 소통이 아닌 몸짓의 소통으로 웃음을 절로 나오게 하는 이미지가 닮았다.

모두가 즐거워하는 축제. 이런 축제가 진정한 축제가 아닌가 싶다.
7년 전. 그때 나는 에스토니아의 논그라타(Nongrata) 마임이스트들이 실험적인 공연을 보고 감명 받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발생하는 기후 온난화와 체르노빌,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으로 방출되는 방사능 오염 물질 때문에 밖으로 나오지 않고, 비닐 속에서 생활하는 비닐벽 안의 동물들로 연기를 했다.
그들이 실험을 하는 것은 마임이라는 예술이 그 자체의 순수예술의미를 뛰어 넘어 우리가 사는 사회의 문제까지 비판하며 깨끗한 지구에서 살 권리가 있는 지구로 변화시키려는 그런 의미전달까지 있어 내겐 지금도 기억이 남아있다.
예술이 위대한 건 그런 의미까지 소비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서울로 가는 마지막 전철을 타기 위해 축제장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축제장을 떠날 준비를 하는 사이. 풍선을 든 한 어린 소녀가 하얀 천으로 만든 벽 아래 길을 걸으며 풍선을 날리며 집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그 어린 소녀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가는 엄마 아빠를 보며 생각했다.
저 어린 소녀도 나처럼 어른이 되어 다시 이 축제장을 다시 찾을 때 오늘 내가 그날의 ‘논그라타’를 떠올리며 성숙해 가듯이, 점점 진화하는 마임축제 여행을 다시 보며 성숙해 있을 어린소녀의 모습을 상상하며 축제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전철 칸에 앉아 또 다른 내일로 달려가는 전철 속에서, 나는 피곤이 몰려오는 잠 대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긴 시간. 그리고 긴 오후의 저녁하루를 소비했다. 그러나 길지 않고 지루하지 않게 함께 소통하는 축제장의 하루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과거의 서커스 공연 같은 진화하지 못한 일부 공연들은 현재의 시간만큼 변화하는 작은 노력이 이 축제의 내일을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내가 깨비가 되어 소비한 시간 속에서 오래 묵은 도깨비라는 방망이가 하늘의 빠알간 해를 하늘에 올려놓는 색다른 상상을 만들어 관객의 탄성을 절로 나오게 하듯이 말이다.

오늘 나는 축제장을 돌며, 축제를 본 많은 깨비(관객)들이 종이봉투에 자기 얼굴을 그려놓고 촛불을 키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투명 플라스틱 컵 안에 촛불을 켜서 물위에 띄우고 각자의 소원을 비는 순수한 아이들도 보았다.
나는 순수한 꿈을 비는 그들의 소원처럼 다음 축제가 더 진화해 주길 기대하며, 달리는 경춘선 전철 속에서 오늘 내가 본 어린 소녀의 풍선처럼 꿈을 꾸며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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