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에는 한국과 독일, 서로 다른 두 나라의 현대사가 나란히 응축되어 있다. 간호사 파견, 반공주의와 독재, 80년 광주의 참상과 같은 한국 현대사는 이와 동시대에 일어난 독일의 근대화 과정, 68혁명과 파스빈더 감독, 뉴 저먼 시네마의 등장, 오일쇼크 이후의 경제위기와 극우인종주의의 발생,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 등 독일의 현대사와 겹친다.

이러한 현대사의 교차적 체험의 한복판에 재독한인여성모임(이하 여성모임)이 있었다. 여성모임은 오일쇼크 이후 경제 위기에 직면한 독일 사회가 이주 간호사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려 하자, 이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운동 속에 체류권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이후 모임의 주축을 이루는 여성들은 독일 사회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군부독재와 반공주의, 끔찍한 여성 억압이 지배하던 한국 사회에 대해 갖게 된 의구심을 자신들의 정기 세미나 모임을 통해 발전시켜나간다.
1980년 5월에는 광주항쟁을 다룬 ARD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보도를 접한 뒤, 아직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던 한국인을 대신해 최초로 신군부를 규탄하는 시위는 베를린 시내에서 조직했으며, 이후에는 힌츠페터의 다큐멘터리를 한국으로 보내기 위한 시도를 감행한다. 마침내 한국에 도착한 이 다큐멘터리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방아쇠가 된다.
이러한 활동의 중심에는 이 연극이 다루고 있는 고 유정숙 선생의 중추적인 역할이 있었다. 유 선생은 이화여대에 재학 중 적극적으로 박정희 독재에 맞서면서 정부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는다. 필자와의 대화에서 고인은 그 당시 집에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마음이 철렁했을 정도로, 당국의 감시와 탄압에 시달리던 중 독일 유학을 결심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녀에게 독일에서의 생활은 독재의 억압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의 활력을 의미했다.
독일에서 정치학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 재독 한인여성들의 이주 경험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간호사로 일하는 한인여성들과 교류하게 되었고, 유학생 지식인 신분으로 독일에 와 있는 자신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노동자 계급 여성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재독한인여성회를 결성하면서 특히 이 모임의 이론적, 사상적 중추를 형성한다.
필자가 유학생 시절 만난 유 선생은 이미 만년의 나이였음에도 여전히 이러한 사상적, 실천적 영역의 한복판에 서 있고자 했다. 그녀는 베를린에서 열리는 사회과학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유학생, 예술가, 교민들과 함께 치열하게 현시대를 설명하기 위한 지적 담론들과 한국사회의 현주소에 대해 토론했다. 그리고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방독 당시 열렸던 항의 시위와 국정원 대선 개입 항의 시위 등이 열릴 때마다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서구 사회에 알리는 활동에도 개입했다.
생애 말기 그녀는 세월호 참사와 어린 생명의 죽음이 주는 상처 속에서도 이 죽음을 추모하고 항의하기 위한 실천에 앞장섰다. 유 선생은 한국 언론에도 여러 차례 보도된 베를린 세월호 행동과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해외의 노력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교민사회 속에서 다양한 지원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다. 독일 사회 내에서 한국 민주화 운동과 위안부 진상규명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던 재독한인여성모임의 멤버들 역시 세월호 모임에 대해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유 선생은 말년에 본인을 그토록 탄압했던 박정희의 딸 박근혜의 집권, 그리고 세월호 참사를 경험하면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좋아하던 와인을 마시고 나면 눈물을 보일 때도 있었다. 울화통이 터진다는 말도 자주 했다. 그러던 와중에 암 진단을 받고 1년여 동안 투병 끝에 숨을 거둔다.
필자는 투병 중이던 유 선생의 집에 찾아가 선생과 독대할 일이 있었다. 누군가는 이해를 못할 수도 있지만, 선생은 암투병 중에도 좋아하는 와인과 담배를 끊지 않으셨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소 좋아하던 것을 가까이하면서 남은 인생을 축제처럼 기쁘게 살아야 한다는 신념의 반영이었다. 그날도 필자와 와인을 함께 마셨다. 담담하게 병을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유학생인 필자의 삶을 걱정하고 조언해주는 고인의 모습은 필자의 머리에 아직도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군부독재와 한평생 대결했던, 그리고 한국과 독일, 두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형태의 불의에 맞섰던 인물만이 가질 수 있는 당당함이었다.
유 선생이 돌아가시자 베를린의 지인들은 고인의 집에서 한국식 삼일장을 치렀다. 고인의 유언을 따라, 슬피 우는 3일장이 아니라 함께 고인이 좋아하던 와인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즐겁게 인사하는 가족모임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함부르크에서 열린 공식 장례식에서도 추모객들은 고인의 유언대로 검은 정장이 아니라 초록색 옷을 입고 고인을 애도했다. 장례는 고인이 생전의 바람대로 이 세계와 '기쁘게' 작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축제였다. 여기서 고인과 재독한인여성모임에서 함께 활동한 지인들은 '우리는 왜 이 땅에 왔나'로 시작하는 노래를 합창하며, 고국을 떠나 독일에서 숨을 거둔 유 선생과 한인 여성들의 삶을 노래했다.

이 책의 출간과 연극 <병동소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의 흥행을 계기로 국내에서 유정숙 선생과 재독한인여성모임, 간호사 여성들의 삶과 실천이 갖는 역사적 의미에 관한 관심이 살아나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 지난여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 전시회와 여성모임에서 활동한 교민들의 증언에 사회적 관심이 쏠린 것은 이러한 삶을 기억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표현된 긍정적인 신호였다.
이들의 삶은 단지 '유학생', '파독 간호사'라는 타이틀로 환원할 수 없는, 두 사회를 교차하는 역사의 체험이자 생생한 투쟁의 경험이었다. 한국과 독일이라는 두 국가의 현대사를 교차적으로 체험하면서 반독재 민주화, 위안부 진상규명 활동 등을 벌여나간 재독한인여성모임, 그리고 독일 교민들의 삶은 여전히 발굴되고 기억되어야 하며, 그것이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미친 성과와 기여 역시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나아가 '여성'이자 '이주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그들의 생애는 오늘날의 소수자 정치, 그리고 각각의 정체성이 이루는 교차성을 이론적으로 사유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전승되고 기억되어야 할 유산으로 남아 있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듯이, '어떤 전승을 계승할 것인가' 하는 물음은 바로 현재의 우리를 규정짓는 본질적 조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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