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든 것은 물론 박근혜 자신이다. 박정희와 최태민, 최순실 등이다. 새누리당(현(現) 자유한국당)과 재벌과 극우 언론 등 부역자들이다. 1% 기득권 지배 세력들이다. 무엇보다도 박근혜에게 표를 찍은 우리들 자신이 박근혜를 만들었다. 우리가 모두 아는 상식들이다.
그런데 여기에 추가해야 할 아주 질 나쁜 공범자들이 더 있다. 다름 아닌 대한민국의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는 명명백백한 사실을 교묘하게 비틀어 주권을 위임받는 대의 권력, 국회 권력과 청와대 권력을 당연하다고 강변해 온 가짜 민주주의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민주주의 해석과 이론 전파자들이라는 점에서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공화국을 새롭게 건설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더 나쁜 해악을 일반 인민들에게 끼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호도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못 나고, 못 배우고, 못 가진 인민들을 자립 자치의 능력이 없다고 철저하게 경멸하는 잘난 엘리트 기득권 적폐 세력들의 대변인들이다.
이른바 대의 민주주의, 정당 민주주의를 강조해 온 정치학자들과 정치인들 말이다. 최장집, 박상훈 등으로 대표되는 강단 민주주의자들은 2008년 촛불 시위는 물론이고, 2016~17 촛불 혁명에 대해서도 주저 없이 촛불 정치는 정당 중심의 의회 정치로 그 주도권을 빨리 넘겨야 한다고 재촉한다.(☞ 참고 : 3월 11일 자 <중앙일보> '"촛불의 시간에서 정치의 시간으로... 의회가 바통을 받아야"')
이들은 '적폐 청산'이란 말 자체에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면서 이런 말은 전쟁과 혁명의 용어이지 민주주의의 용어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적폐 세력과 똑같은 주장이다. 엘리트 대의제 정치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 기득권자들다운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국민주권 개헌과 국민발의, 국민투표의 확대 등을 주장한다고 해서 물론 곧바로 대의민주주의를 폐기하자는 말은 전혀 아니다. 그런 일은 현실에서는 가능하지도 않다. 또 지금 당장 현재의 대의정 체제를 폐기한다고 직접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민주주의는 주권자인 국민이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가능하다. 주권자의 민주주의 능력이란 별 게 아니다. 회의와 토론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민주주의의 주권자란 다른 주권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와 다른 의견을 경청하면서 대화와 회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차분한 논쟁과 토론을 통해 의견을 조정하고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민주주의를 지속가능하게 만든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민은 아직 그런 능력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원천봉쇄당해 왔다. 오랫동안 지속된 독재 교육은, 그리고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경쟁과 입시 위주 교육은 그런 회의와 토론 능력 자체를 키울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주권의 위임이란 없다
주권은 인권과 마찬가지로 절대로 위임이 불가능한 성질의 권력이다. 인권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당연히 부여받은 자연권이다. 그래서 흔히 인권을 천부(天賦) 인권이라고 말한다. 인권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한다면 그 개인은 즉시 자유로운 인간에서 노예로 추락한다. 주권은 민주주의 국가라면 모든 국민이 그 구성원이 되는 순간 갖게 되는 주인으로서의 권리다. 주권 또한 인권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면 그 즉시 그는 노예 신세로 전락한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전 세계 국가의 헌법에는 거의 모두 국가의 주권이 대통령이나 수상, 국회의원에게 있지 않고 인민에게 있음을 분명하게 못 박고 있다. 절대 왕정과도 같은 어버이 수령의 1인 세습 독재 체제인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도 주권은 인민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제4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노동자, 농민, 군인, 근로인테리를 비롯한 근로인민에게 있다."(통일부 통일법제 데이터베이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
대한민국 헌법 또한 누구나 알고 있듯이 맨 처음 조항인 제1조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이 인민에게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헌법 제7조가 규정하고 있듯 대통령과 국회의원, 판검사 등 공무원은 주권자인 인민에 대한 봉사자로서 인민이 주는 월급을 받으며 인민을 위해 ‘책임’지고 일해야만 하는 일꾼에 지나지 않는다. 결코 권력자가 아닌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를 지도 관리하는 사회주의 정당의 최고 권력자 자리도 그 이름만큼은 인민의 '비서', '서기'를 표방하고 있다. 레닌도 스탈린도 모택동도 모두 인민의 서기 또는 비서들 가운데 우두머리인 서기장, 총비서였다. 조선로동당의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도 총비서일 따름이다.
주권은 인민이 민주주의 국가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때 반드시 필요한 사회생활의 목숨이다. 목숨이 없으면 개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주권이 없으면 인민은 민주주의 국가 구성원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주권자들은 입법 주권, 사법 주권, 행정 주권, 국방 주권, 교육 주권, 식량 주권, 환경 주권, 에너지 주권 등 수많은 주권 가운데 달랑 한 가지, 오직 행정부 대표와 입법부 대표를 선출할 수 있는 투표권 하나만 갖고 있다. 그나마 사법부 대표를 선출하는 투표권은 인민에게 아예 있지도 않다. 지금 대한민국의 주권자는 4~5년 만에 단지 하루, 선거일만 반짝 국가의 주인이 인민 개개인에게 있음을 실감한다. 그 하루를 뺀 나머지 4년 또는 5년의 긴긴 세월은 5000만 명의 주권을 빼앗아 간 대통령이 제왕처럼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
주권은 양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로 대표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인민의 대의원은 인민의 대표가 아니며 대표일 수도 없다. 그들은 단지 인민의 대리인일 뿐이다. 대리인은 그 어떤 최종 결정도 내릴 수 없다. 인민이 직접 승인하지 않는 모든 법은 무효다. 그것은 절대로 법이 아니다. 영국 인민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데, 크게 착각하는 것이다. 영국 인민은 의회 의원의 선거 동안만 자유롭다. 의회 의원이 선출되는 즉시 영국 인민은 노예가 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대표라는 관념은 근대의 산물이다. 그것은 인류가 타락하고 사람이라는 이름이 더럽혀진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정부인 봉건 정부에서 유래한다. 고대의 공화국은 물론 군주정에서조차 인민은 결코 대표를 갖지 않았다. 그들은 아예 대표라는 말을 몰랐다. 호민관을 그토록 신성시한 로마에서도 그들이 인민의 지위를 가로챌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 호민관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호민관들이 자신들의 권한으로 국민투표를 건너뛰려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은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 참고 : <사회계약론 외>(장 자끄 루소 지음, 박호성 옮김, 책세상 펴냄) 114~115쪽)
슬픈 일이지만 루소의 지적 그대로 한국 인민들은 주권을 거의 다 빼앗긴 노예들이다. 아무런 실질 권력도 없이 인민은 그저 대통령과 지방자치 단체장, 국회의원과 시도의원 등 인민을 '대표'한다는 권력자들의 정치권력 놀음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한다. 대의제 극장 정치의 관객으로 일일 연속 드라마처럼 계속되는 유명 정치인들의 정치 연기를 그저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한다. 여론조작과 음모와 공작과 배신과 전략 전술이 난무하는 '내부자들'의 권력투쟁 밀실은 영화 장면으로만 잠깐 훔쳐볼 수 있을 뿐 평소에는 보지도 못한다. 그저 조작과 포장과 간접 광고 투성이의 값싼 정치 쇼만 쳐다보고 있어야만 한다.
수십조 원의 국민 세금을 4대강 사업이라는 명목 아래 대통령과 기득권자들이 나누어 먹는 잔치를 벌여도, 우리가 왜 저런 대통령을 뽑았을까 한탄하고 한숨만 내쉬면서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 어떤 주권자의 권력도 행사할 수 없다. 대통령이 국가를 사기업처럼 좌지우지해서 천문학의 국가 예산을 갈취해 가도, 대통령이 일부 비선실세라는 패거리와 공모해서 온갖 부정과 불의를 저질러도 주권자들이 직접 대통령을 해임하고 감옥에 가둘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선거라는 절차만 거칠 뿐 왕정이나 참주정, 과두정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정치 체제가 오늘날 한국의 대의제 실상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 죄와 잘못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대통령이 죄를 범했으면 당연히 수사를 받고 죗값을 치러야 한다. '불소추 특권'이란 민주주의에서는 있을 수 없는 특권이며 이런 특권과 권력을 없애기 위한 최선의 정치 체제가 바로 그 같은 특권과 권력 자체를 없앤 민주주의다. 권력자가 될 수 있다는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그 위험성만으로도 인민의 투표를 거쳐 추방해 버리는 게 민주주의다.(그리스 아테나의 도편 추방)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 국회의원의 면책 특권이야말로 한국의 정치 체제가 민주주의가 아니라 엘리트 참주정, 과두정임을 나타내는 명확한 징표이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 앞에 온갖 수식어를 갖다 붙인 '형용사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직접 민주주의와 간접 민주주의, 위임 민주주의, 대의 민주주의, 의회 민주주의, 참여 민주주의, 심의 민주주의, 인민 민주주의, 자유 민주주의, 유교 민주주의, 한국적 민주주의 등 '형용사 민주주의'는 너무나 많다. 그러나 이 모든 형용사 민주주의는 엄밀하게 말하면, 가짜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혼란스럽게 만들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엘리트 지배층들의 인민 세뇌와 여론조작 조어들이다.
민주주의는 그냥 민주주의 하나만 존재한다. 물론 민주주의의 각종 실질 제도와 그 실행 방식은 각 나라의 전통과 문화, 정치 현실에 따라 다양하고도 수많은 변형과 변종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몇 가지 뚜렷한 원칙과 지표를 기준으로 민주주의는 그냥 민주주의일 뿐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간접 민주주의'라는 말은 정말로 민주주의의 참뜻을 완전히 거꾸로 왜곡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기의 형용사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란 그리스 아테나처럼 국가를 구성하는 인민의 수가 소수일 때나 가능한 정치 체제이며, 수백만 명, 수천만 명, 수억 명의 인민으로 구성된 근대 국민국가에서 실현 가능한 정치 체제는 그런 ‘직접 민주주의’가 아니라 주권을 대리인에게 위임하는 간접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한국의 대다수 인민들도 이런 주권 위임의 대의 민주주의, 위임 민주주의야말로 현실성 있는 민주주의라는 주장을 정설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나고 똑똑한 엘리트 기득권자들의 교묘한 선동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기득권자들의 하수인으로 민주주의의 실현을 지체시키는 고등 사기꾼들인 이른바 교수, 정치학자들이 벌이는 교언영색(巧言令色), 성형술 언어일 뿐이다. 선거 민주주의, 위임 민주주의는 사실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다. 대의정은 오히려 민주정과 선명히 대비되는 엘리트 통치 체제이다. 직접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스위스와 간접 민주주의로 잘 포장된 대의정 체제의 미국, 영국 정치 현실을 주권자의 관점에서 조금만 비교해 보아도 이는 금방 드러난다.
간접 민주주의란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가짜 개념어다. 위임하는 민주주의, 대의 되는 민주주의, 대표자 민주주의란 없다. 그 실체는 위임 독재, 대의 독재, 대표자 독재다. 독재를 거꾸로 민주주의로 포장한 것과 같다. 간접 민주주의란 구소련과 북한 등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민주집중제와 똑같이 엘리트 관료 독재 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교활한 지록위마(指鹿爲馬)의 형용 모순 용어이다. 인민으로 하여금 엘리트 소수 독재 정치를 민주주의 체제로 믿게 만드는 체제 홍보 용어이다.
선한 의지의 대통령을 새로 뽑았다고 해서 빼앗긴 주권을 되찾고 제대로 된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도 대통령 권력을 거의 없애다시피 하고 주권을 인민들에게 모두 되돌려 주는 인민주권의 실현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그들에게는 그런 개념조차 없었다. 그들의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 위임 민주주의, 선거 민주주의, 의회 민주주의라는 가짜 민주주의였다.
1948년 대한민국을 '재건'할 때 제헌헌법 자체가 국가 정치체제 구조를 그렇게 주권자들이 직접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막아 놓고, 강제로 인민의 주권을 대표자들에게 위임하게끔 구조화해 놓았다. 집을 다시 지을 때 아예 주인이 사는 안방을 없애 버리고 대궐 같은 사랑방, 청와대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는 청와대가 애초부터 필요 없다.
주권재민은 민주주의 국가의 염통이다. 염통이 없다면 사람은 죽는다. 주권이 주권자에게 없다면 민주주의는 죽는다. 그럼에도 한국 인민들은 처음부터 시체였던 한국 민주주의를 되살려내는 위대한 인민의 힘을 보여주었다. 결코 위대한 수령이나 좋은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되살려 내는 것이 아님을 생생하게 증언해 왔다.
민주주의와 주권은 좋은 대통령이 선물로 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좋은 정당과 좋은 국회의원들이 주는 것도 아니고 좋은 판사가 판결로서 국회의원과 대통령으로부터 빼앗아 양도해 주라고 명령해서 얻는 것도 아니다.
결국 민주주의는 주권자인 국민들 스스로의 힘과 능력에 달려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