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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가 지나간 시대를 소비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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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가 지나간 시대를 소비하는 방식

[김이석의 올드&뉴] 〈광식이 동생 광태〉 〈사랑해 말순씨〉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보면 "옛말 하고 산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소설에서는 삶의 끝자락에서 겨우 안정을 찾은 노인네들이 지난날을 회상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곤 한다. 최근 우리 영화에도 이 '옛말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소설과 다른 점은 그들이 주로 삼사십대 감독들이라는 점이다.

한국영화에서 '옛말 하기'의 효시격인 영화는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다. 이 영화에 등장한 롤러스케이트장, 하얀 색 목폴라 등의 소품들은 영화 자체와는 무관하게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 뒤 〈해적, 디스코왕 되다〉, 〈품행제로〉, 〈말죽거리 잔혹사〉, 〈효자동 이발사〉를 거쳐 최근의 〈광식이 동생 광태〉에 이르기까지 이 복고적 취향은 때로는 영화의 소품으로, 때로는 이면의 정서로, 때로는 핵심적인 이데올로기로 우리 영화 속에 자리잡게 된다.

그런데 이 젊은 감독들이 자신이 경험한 시간을 지금, 여기서 반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들이 끄집어낸 시간들은 지금, 여기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 대부분의 영화들은 이런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새우깡이 400원 하던 시절'의 연애 이야기**

얼마 전 개봉한 〈광식이 동생 광태〉 역시 영화 곳곳에 이런 복고적인 장치들을 배치해놓고 있다. '새우깡이 400원 하던 시절'의 연애 이야기에서 출발하는 이 영화에서 '아날로그' 사진 동아리 출신이자 '삼풍백화점 사고'로 부모를 잃은 광식이는 10년 동안 한 여자만을 짝사랑해 왔지만 끝내 연애에 실패하고 사랑하는 이의 결혼식장에서 비통하게 80년대의 히트곡 '세월이 가면'을 부르게 된다.

이 영화는 '여자들이 연애 할 때 알고 싶은 남자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해 말해준다고 스스로를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지난 시대의 사랑법에 대한 노스탤지어에서 벗어나지 못한 복고 취향의 영화다. 이 영화에서 사랑은 이런 부류의 영화들에 등장했던 이소룡, 롤러스케이트, 통기타, 곰보빵과 같은 파편화된 기호들일 뿐이다. 이 기호들은 정확한 시대 재현의 근거로 작동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기호들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그저 영화의 빈곤함만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부류의 영화들이 그저 지나간 삶의 한 순간을 있는 그대로 재현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영화에는 대개 자신들의 세계가 옳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감추어져 있다. 또 이런 영화들은 쉽사리 '남자란…' '여자란…' '사랑이란…' 하는 식으로 일반적인 결론을 끌어내곤 한다. 〈광식이 동생 광태〉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들이 제시하는 근거들이란 대부분 '과장되고 변형된 거짓기억'들이다. 빈약한 근거를 토대로 한 결론은 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를 위험을 안고 있다.

***과거는 현재의 삶을 담는 그릇**

그에 반해 다른 방식으로 지난 시절을 이야기하는 영화들도 존재한다. 이 영화들에서 과거는 현실을 성찰하기 위해 환기되며, 그 환기된 시간들은 다시 지금, 여기의 문제로 남아 있게 된다.

최근에 나온 영화들 중에는 박흥식 감독의 〈사랑해, 말순씨〉가 좋은 예일 것이다. 이 영화 속에서 과거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소환된다. 감독은 자신이 이 영화를 만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1979년과 1980년이라는 격변의 시대를 설정한 이유가 있다. 1년 동안 대통령이 세 번 바뀌는 혼란스러운 시대에도 아이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누가 이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막을 수 있나? 아무도 막지 못한다. 전두환이 아무리 하늘을 날 기세로 권력을 누렸어도 이 아이의 성장은 막지 못했잖아. 보라 우리는 성장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사랑해, 말순씨〉의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과거는 단절된 기억이 아니라 현재에 그 흔적을 드리우며 남아 있다. 박정희의 사진을 떼낸 자리에 남은 흔적과 그 흔적을 감추면서 그 자리에 들어서는 최규하, 전두환의 사진들은 과거의 한 순간을 파편적으로 재현하는 소품이 아니라 어느 한 때 우리 사회를 지배하던 시간의 흐름을 환기시키는 환유들이다.

***작정하고 추억을 파는 영화**

〈사랑해 말순씨〉가 〈광식이 동생 광태〉 류의 영화와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영화가 과거의 기억들을 올바른 맥락 속에서 불러내고 올바른 지점에 그것들을 위치시킨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이 형제가 삼풍백화점 사고로 부모를 잃은 것으로 설명되지만 이 비극적인 사고는 관객들이 주인공을 이해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는다. 반면 〈사랑해 말순씨〉에서 '광주사태'는 소년의 사춘기적 몽상을 좌절시키고 소년의 가정을 더없는 적막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이런 방식으로 박흥식 감독은 역사가, 시간이 개인의 삶에 개입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광식이 동생 광태〉는 (영화 속 표현을 빌리자면) 20세기적인 정서를 간직한 21세기적인 영화가 되기를 원한 것 같지만 결국에는 어떤 시간의 흔적도 영화 속에 담아내지 못했다. 박흥식 감독의 영화 속에서 소년이 성장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안, 김현석 감독의 영화 속에서는 새우깡 가격만이 변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가로이 옛말 하는 영화들 숫자는 당분간 줄어들 것 같지가 않다. 우리 관객들은 이 한가로운 잡담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를 보며 손뼉치고 웃는 관객들 틈에 있다보면 어쩐지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가 된 것 같은 생각도 들지만, 어쨌건 일차적인 책임은 이런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게 있을 터이다.

여전히 작정하고 추억을 팔아치울 준비를 하고 있는 감독과 제작자들에게 홍상수 감독의 표현을 빌어 이렇게 말해주어야 할 것 같다. "재미봤죠! 그만 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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