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읽기에 도움이 될까. 교유서가 첫 단추 시리즈 1권 ‘철학’. 그 책의 줄거리고 논거지만 그대로 인용하지 않았다. 정리자의 생각대로 추려 정리한 리메이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의 내용이 주요 골자다. 독서 다중을 위한 글이고 싶어서다. 글을 읽고 관심이 간다면 어떤 누구의 글귀에 얽매지 말고 찾아 읽고 더 깊이 스스로 알아 갔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다. 이 시리즈를 구상하고 만든 건 옥스포드대이고 교유서가에서 번역 출간하고 있다. / 편집자주
철학은 너무 넓어졌고 철학이 추구(질문)하던 탐구영역이 명확하게 합의된 지식체를 갖춘 분과들(자연과학, 전문가)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철학은 ‘모든’을 추구하는데 현대 학문은 ‘전문’을 지향하고 있다. 이는 효율성을 추구한 결과다.
과거엔 질문과 철학을 동급으로 봤다면 지금은 자연과학을 통한 개념의 새로운 해석, 사람, 주제, 맥락, 쓰임 등 철학의 현대적 의미를 재정리한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자연과학의 발달이 철학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연습, 훈련, 연마, 실험, 축적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은 없다. 사상(이념), 전문기술, 지식, 유전자, 생물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우연이든 환경적 요인이던 말이다.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정보 저장고다. 유전체나 뇌.
인류가 고민해온 일은 주로 절박한 어떤 이유나 절실한 믿음을 가질 때 일어나는 일들이나 인간의 진화 이성과 경전의 우위를 두고 다투는 일. 문명의 행로를 바꾸는 일이였다.
인지와 자각이 없던 생물에서 그러다가 어찌어찌하여 어떤 일이 발생하는 이유를 묻고 알아챔에 그치지 않고 자신과 행동을 바라보는 능력을 획득했다. 그 범위를 위안, 예상, 상황인식, 연관성으로 확장하게 된다. 그리고 위 과정의 반복하며 선택지와 불가사의를 넘으며 의문이 없이 그냥 저냥 살던 시대에서, 서서히 진행되어 갑작스레 모두가 순간에 느끼지는 못하지만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인간 종의 최대 충격의 시대를 맞아 살고 있다.
철학이란, 간절히 필요하지 않은 물음에 답하는 일종의 지적인 놀이인가?(문사철이 포함일지도 모른다)
철학은 넓게 보는 게 우리에게 이롭다. 철학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의미는 아니다. 그러다 너무 넓어서 무의미 해졌다. 그 이유는 자연과학이 발달해서다.
과거의 철학과 결별하고 철학이 추구하던 탐구영역이 명확하게 합의된 방법론과 명확하게 합의된 지식체를 갖춘 분과들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화학 물리학 지구과학 생물학 천문학 유전체학 뇌과학들로 고찰하는 문제의 범위가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남아 있다면 확신하기 어려운 문제들 탐구하기 시작할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확신하기 어려운 문제들만이 철학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다. 분과와 전문화는 이 시간에도 더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철학과 과학을 나누는 명확한 경계선은 없다
"어디에도 철학은 있지만 어느곳에도 철학은 없다."
"누구나 자기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 권리를 얻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소수만이 사유하지만 모두가 의견을 가질 것이다."
1. 철학자별
플라톤-답변을 궁색하게 만드는 질문들
소크라테스가 계속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자 결과적으로 이상하다, 젊은이를 타락 시킨다는 이유로 고소해 죽인 대중들, 자연관이나 사물 인식은 과학으로 용인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음에도 어리석음과 지혜를 가르쳐 주기위해 2400년 전 죽음을 선택한 소크라테스로 인해 철학적 국가주의와 법률이란 보수 가치의 원천이 된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매우 비과학적이고 고집쎄고 종교적이고 고지식한 철학자였다고 할까? 가족과 친구 국가를 놓고 몽매할 정도로 사회적 자신의 논리 주장을 위해 의무에 집착 국가를 선택해 도덕적 딜레마를 만들었다.
이를 논리의 시발로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와 결합하여 도덕, 인성, 신념, 국가, 법률의 보수적 가치들을 튼튼하게 구축한다.
데이비드 흄-기적의 역할이 종교적 믿음을 지탱하는 것이다,
기적은 비개연적인 사건이다, 기적과 우연, 그냥은 다르다. 역사적 기적은 대부분 목격자의 증언과 전언에 근거한다, 증언과 전언이다. 강력한 진술은 실제인가? 실수와 기억의 문제, 의도적 속임 등 이런 증언들이 재판장에 선다면 어떻게 될까?
흄은 말한다. "그렇다고 역사 기록이나 사실에 대해 샅샅히 훑을 필요가 없다고 기적은 극히 비개연적인 것만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기적은 틀림없이 불가능하다, 기적은 자연 법칙의 위반이다"
나가세나(밀린다 팡하)-나의 본질, 자아와 인격적 개체는 존재하는가? 물질인가 비물질인가의 물음에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플라톤은 자아를 마차(바퀴 굴대 채찍 고삐 말을 합한 것이 적절한 구조를 이룬 것)에 비유했다. 나가세나는 물질을 이룬 기본 성질 (당시는 5온(색 수 상 행 식)을 세상을 이루는 기본 성질이라고 여겼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전체는 전체를 이루는 부분들보다 덜 실질적이고 덜 객관적이며 관습적인 문제에 가깝다, 부분들은 전체와는 다른 방식으로 독립적이다, 마차는 존재하지 않아도 굴대는 존재할 수 있지만 굴대가 없으면 마차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럼 전체는 무엇인가? "우리 자신과 우리 목표가 어느 정도인가에 달렸다. 부분들의 집합은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과 비교할 때만 불완전한 것이다." 우리가 믿는 것이 태도에 영향을 미치고 태도를 통해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신, 윤리, 번뇌들도 마찬가지다. 자아집착, 과대평가, 믿음, 번뇌에 대한 목표가 악업과 비애를 낳는다. 그러나 입증되지 않음이란 한계를 지닌다. 윤회와 환생같이.
2.주제별
윤리적 결과주의
결과가 좋으면 좋은 것이고 결과가 나쁘면 나쁜 것이다. 특정한 상태 그 자체가 좋은 것이면 어떻게 되나? 쾌락은? 그럼 행복, 지식, 아름다움, 사랑은? 때로 두 가치들이 충돌할 때는 장려할 것인가?
에피쿠로스의 행복(쾌락)은 술과 연회, 휴식과는 거리가 멀다, 신체적·정신적 고통의 부재를 말한다. 에피쿠로스의 행복론을 바탕으로 근대에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가 나온다. 에피쿠로스는 쾌락과 평정을 얻는 방법을 조언하고 밀은 모두의 행복을 위해 윤리적 원칙의 목표를 제시한다. "다른 사람의 행복은 당신 자신의 행복만큼이나 당신의 목표이고, 한 사람의 행복과 다른 사람의 행복은 그 가치가 동일하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모두에게 교육, 정치적, 사회적 자유를 제공해야 한다. 행복의 보편성이 자신의 행복과 직결된다. 탄복할 일 아닌가.
통합성
선택의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통합성이란 일련의 단절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서 살아가는 삶이다. 다른 새로운 근거가 나타나지 않는 한 (통합성)의 원칙과 견해를 확고부동하게 고수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 외의 방식은 스스로 불화하는 상태인 자기기만과 위선으로 통합성에서 배제된다.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우리가 정말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의심한다. 그들은 결과주의자들일 경우가 많다. 행복의 척도로 결과를 평가하지 않는 생각 때문이다. 행복 대신 다른 것을 써 넣은 것이다.
정치적 권위- 계약이론(홉스)
국가의 적당한 권위는?. 개개인의 삶의 모든 측면을 지배하는 권력을 국가에 주는 전체주의, 국가는 평화를 유지하는 필요한 일만할 수 있을 뿐 그 이상해도 안된다는 최소 국가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국민으로서의 개인들과 국가가 맺는 일종의 계약이나 합의에서 국가의 권위가 생긴다는 이유가 개인 간의 자발적인 서로 이롭다고 생각한 합의에 도달한다는 것처럼 유일한 답일까? 강자와 약자도 정의로운가? 그런가? 약자에게 그 합의가 이로운지 판단하래도 그럴까? 국가 권력은 이런 측면이 다분하다. 우월의 힘이 권위를 정당화한다. 힘이 곧 정의다. 신이 특정인에게 단체에게 권위를 부여했다. 도대체 누가 누구와 계약을 맺는가?
개인 간의 계약은 어떤 상황에서 무효가 된다, 주권자와 주권자와의 계약 국가도 개인의 생명보호라는 유일한 계약이 실패하면 무효가 된다. 그렇지 않고 성공하면 개개인은 주권자에게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외부의 적에 대한 두려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장 잘 알았던 사람은 자신이 장악한 모든 피조물을 한 가족으로 만들었다" 홉스도 만인과 만인의 투쟁에서 자연스런 예외는 가족임을 인정한다. 플라톤은 이상사회에서 가족을 폐지했다. 더 나아가 국가를 모든 사람이 부모로 생각하는 상황이 가장 좋다고.
상대가 가족이 아니라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 게 홉스의 자연 상태인가?
증거의 합리성
추론의 합리성이다. 그것이 참일 가능성이 있는 다른 것들을 알아내는 능력(조사 능력)과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 알아내는 능력이 있다(선택 능력)면 합리성을 갖춘 것이다.(흄). 이성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 지까지 말해준다. 이성에 그런 능력이 칸트는 있다고 흄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믿는 근거는 참일 가능성을 믿는 것에 근거한다. 믿음이 참이길 바라는 것 이것이 더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믿음에 근거해 전진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근거와 믿음은 과거의 철학적 인식론이 아니라 과학적 증거와 증명이어야 한다. 오로지 믿음과 이성만으로는 생각(추론)이란 강력한 장애물을 넘지 못한다.
자아
자아는 뇌와 감각의 복합체로 대상은 없으나 경험과 실패를 통한 판단이 너무나 개별적이어서 자아라는 언어로 표시 될 뿐이다. 경험과 실패들의 묶음들의 교집합(유전체)과 합집합(뇌) 모두를 공유하는 전체집합이다. 자아 인격 정신을 어떠해야 하는가?
3. 철학과 맥락의 이해
인터넷과 SNS나 개인이 오래된 문헌에서 문장 하나를 훔치고 그 문장이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막을 것이 없다.
저자가 그 문장의 의미를 확정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조심하지 않거나 얼마간의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훔친 문장은 저자를 폄훼할 수도 있다.
또 저자나 학자의 사상이 자라난 지적 정서적 환경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성취를 이해하는데 저해가 된다. 발견하는 일과 납득 시키는 일이 별개가 된 세상이다.
작기의 동기에 관심이 없으면 우리는 그들의 말을 잘못 이해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지적·정서적 환경을 고려하지 않으면 저자의 성취에 대한 이해가 심각하게 저해되기도 한다는 점을 유의하자.
인식과 믿음. 주의와/론에 관하여
주의와 론은 어떤 학설의 일반적인 유형을 가리키는 폭 넓은 용어다. 폭이 넓어 유연성이 많아 많이 오르내리지만 그 폭 덕문에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표지판 같은 역할을 한다. 근대 과학 이론과 결합하기 힘들다. 역사 깊은 이원론 유물론 관념론 경험론 합리론 같은 것들, 그리고 회의론 '보통 상식과 일반의 인식에 대한 주장들에 반대하거나 일군의 믿음을 의심하는 방법'으로 회의론자의 주장이 성공하고 나면 더는 회의론자가 아니다 그들은 옳은 주장을 펼쳤던 비판자가 된다. 회의론자의 유통기한이 더 길다
피론학파, 피론주의는 관점과 입장 고집으로부터 마음의 평온 근심이 없는 상태 아락타시아를 얻는다. 특히 정치와 종교 영역에서 대립한다. 상대주의의 근원이다.
주의/론의 폭 넓음보단 개인에 촛점을 맞춰 유리하게 작동한다. 도덕, 문화, 역사적 시대, 개인, 경험, 지적수준에 따라 그러나 상대주의는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위기가 닥칠 때 곤경에 처한다.
4. 흥미로운 저작들
르네 데카르타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예로부터 신성시 되어온 오류 체계로 봤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식을 가로막는 걸림돌이었다.
데카르트 '방법서설'
공부하면 할수록 무지하다는 것만 점점 더 발견될 뿐이라고 했다. 생활인은 사람의 잘못된 판단은 실제로 그에게로 되돌아가는 반면 학자의 사색은 실질적인 결과를 낳지 못하거니와 판단을 잘못해도 벌을 면할 수 있어서 활동하는 사람이 학자보다 진리를 더 많이 찾아 낼 수 있다고 보고 공부를 집어치우고 여행을 하고 전쟁에 가담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사회개혁가 정치개혁가 종교개혁가로 보이지 않으려고 애쓴다. 내 자신의 생각을 개혁하고 내 소유의 땅에 건물을 세우려고 한 것 외에 나는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살 집을 다시 짖는 동안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선문답과 어정쩡한 그러나 사려 깊고 온건한 견해와 행위에 따라 살아가고자 한다. 조금이라도 의심할 근거가 있는 믿음은 보류하라 충고한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악명 높은 '신체와 정신은 별개다'의 이원론을 주장한다. 당시 악명 높은 종교 재판의 영향을 받아서다.
헤겔 '역사철학 강의'
헤겔의 이념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비슷하나 사유의 자연스런 순서를 구현한다.
플라톤의 이념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나 헤겔의 이념은 무언가를 구현하는 한에서 존재할 수 있다. 자연의 변화하는 패턴 안에서 겉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시공간적으로 구체적이다.
헤겔이 말하는 정신이란 자각과 의식의 탄생을 말한다. 고로 역사는 이성 즉 이념에 의해 추동된다고 주장한다. 유전자(유기체)가 성장하고 발달하는 과정을 통하듯. 헤겔의 철학은 비판적으로 보면 자신의 말대로 유전자(유기체)는 개인 없는 덜 성장한 집단 유기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신은 인간을 사랑하기라도 하지만 이념은 우리중 일부가 존재하고 본분을 다하는 한 개개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점 때문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대중화 되지 못했다.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철학과 과학을 나누는 명확한 경계선은 없지만 다윈의 종의 기원은 역사에서 과학과 철학을 합리적으로 나누는 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준 저작이다. 당시로서는 경악할 만한 놀라운 저작이다.
철학과 과학 사이에서 어려운 균형 잡기를 시도하는 이들과 무지하거나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려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
다윈이 자연선택 이론을 처음 제시한 사람은 아니지만 신중하게 쌓아 올리고 사려 깊게 평가한 수많은 평가와 풍부한 증거들로 그 이론을 뒷받침 한다.
수많은 증거로 난관과 정직하게 대결한 사람. 인간이란 논란의 여지 때문에 인간이란 말은 두어 번에 그치고 언급하지 않았지만 인간 종을 뜻한다는 함축을 담은 저작이다.
자연은 인간이 도덕률에 맞추어 세계를 건설하는 일과 무관하다.
성에 대한 도덕적 몽상은 걱정 안해도 된다, 카사노바는 그를 내쫒을 만큼 공격적인 다른 남성들이 없는 곳에서만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같은 과학(철학)을 우주에서 새로 발견된 행성처럼 그저 받아 들였다.
니체 '도덕의 계보학'
철학자는 모든 것을 위험에 빠뜨리는 폭약이다.
가치의 기원에 지평을 넓힌다, 전통에서 선은 사회를 원할히 운영에 이로운 어떤 행동의 유형이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이로운 행동이 선이라 여겼다. 또는 자기에게 이로운 이득을 이유로 선이라 선언하기도 한다. 사회는 이로운 것을 강화한다는 논리다.
니체는 이런 말은 허튼소리다라며 그런 것은 선이 아니라 지배계층 귀족들의 힘과 생활방식 자신들을 선이라 불렀고 평민 노예 종속민들을 저급한 악이라 불렀다 머리엔 이가 씻지 않고 헐벗은 몸 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낫다고 반대로 하층 계급들은 폭력 반란을 넘어서 분노와 좌절을 억압하고 억압자들은 상반되게 살아가는 수많은 방식이 선이고 억압자들이 악이라며 선의 가치 체계를 발달시키며 좌절과 분노를 달랬다고 말한다.
이런 가치 체계는 신이 준 것도 직관적 인식의 결과물도 아니며 본질적인 올바름도 아니며 강자들의 약자에 대한 분노에서 유래한 복수심에 불타는 보복 수단이며 약자들을 자선 연민 사랑에 헌신하도록 해온 것은 증오였다고 뒤집어 버린다.
이것은 도덕에 대한 불신은 아니다. 자신의 생활 방식에 대한 긍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생활 방식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생겨난 것이다.
하층 계급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활기차고 자유롭고 자신만만하고 자부심과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들을 보고 분개하며 그들의 자질은 악이고 반대로 수동 굴종 겸손 이타심 같은 정반대 자질이 선이라고 선언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고로 무리 도덕은 삶을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배 계급과는 달리 그런 의지를 발산할 방도가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에겐 가난 겸손 순결을 철저히 지키고 극단의 고행도 마다하지 않는 성직자를 친구로 두고 있어 성직자는 무리와 마찬가지로 병들었을지언정 무리보다 훨씬 강하다.
이 힘은 연약한 무리를 이끌고 지시할 권력을 주고 신비한 분위기와 비밀스럽게 내려오는 지식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필수적인 본능에 등을 돌린 고통을 받는 사람이 무리에게서 고통을 줄여준다는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고통의 이유를 이해하는 경우에만 상당한 고통을 견뎌 내리라는 것이다.
성직자는 자신에게도 강자들에게도 등을 돌린 채로 성직자의 지도를 받으며 자기 규율과 자기 개선이 힘과 동기가 된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다 그들이 뿌리 뽑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 속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강자 특유의 태도와 행동이라는 것을 이로써 무해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니체에 대한 주요한 사유의 몇 가지 분석이다.
반전의 매력은 또 있다. 유대인을 공격하는 기독교인에게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을 존경해야 한다, 기독교의 성공은 유대인 덕분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늘 어렵다 니체철학은 반전의 설파가 논리 프렉탈 차원이다.
5. 사유하는 이유
자연을 통제하는 법이나 스스로를 통제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서 또는 천국에 가거나 지옥을 피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대로의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주거나 모진 삶을 견딜만한 삶으로 바꾸기 위해 정치적 도덕적 지적 제도를 뒷받침하거나 허물어뜨리기 위해서 일수도 있다. 자신의 이해를 증진하거나 다른 이들의 이해를 증진하기 그런 경우도 더러 있다. 또는 참을 수 없어서 직업상 필요해서 호기심 때문일 수 있다.
철학자들이 실질적인 관심사를 제기하거나 어떤 실질적인 개선책을 제공한다는 의미는 거짓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이 존재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와 믿음은 삶의 자존감을 강화할 수 있다. 철학, 이념, 론은 지지자가 많아야 오래 살아 남는다
6. 철학의 몇가지 측면
개인
에피쿠로스는 행복하게 살기 위한 철학이다. 개인들이 이 방법을 삶에 적용하는 것은 삶을 방해하는 사회적·정치적 제도는 부당하다. 에피쿠로스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고 권유한다. 사유하는 방법을 스스로 추구하는 방식이다. 소박하고 쉽게 얻을 수 있는 행복이 최고의 사치스럽고 이국적인 쾌락보다 즐거움을 덜 주지 않는다. 만찬, 무희, 사치의 쾌락은 에피쿠로스의 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것이다.
정신적 혼란의 원인은 대부분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떨쳐 버리기 위해 물리학 천문학 화학 지구과학 생물학 등을 충분히 배워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물질의 모임과 흩어짐일 뿐이다. 그리고 마음을 무장하라, 개인과 소수집단에 대한 다수의 횡포는 언제나 잠재적인 위험이다. 사회는 반대 의견이 없으면 진리는 입에만 오르내리는 죽은 공식이 된다. 진리는 반대 의견 속에서 줄곧 살아남았다, 진리는 반대 의견이 있어야 한다. 개인을 억압하면 모두가 손해를 본다.
국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인 자연 상태를 넘어서는 것은 주권자(합의체)의 권위에 동의해야 한다. 주권자는 개개인과 다른 이들을 위협으로부터 보호 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 되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전권을 가지고 행사할 수 있는데 동의해야 한다. 주권자의 권위와 전권은 주권자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이뤄진다.
그런 그들이 국민들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때는 국민들은 저항할 수 있다. 아테네의 법률과 국가는 생명의 위협에 저항하는 것조차 소크라테스에게 허용하지 않으면서 그런 극단적인 주장에 근거를 내놓지 않았다. 플라톤은 청년기는 아테나와 스파르타가 전쟁을 치렀고 홉스는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을 공격하는 시기에 태어나 영국은 내전을 치르는 종교 전쟁의 참혹한 시기에 있었다. 강력한 질서를 유지할 통치체계를 필요로 하는 시기였다는 점이다.
성직자
세상에는 성직자들의 권위와 지위를 향상 시킬 글은 남아돈다. 성직자를 대하는 것, 신학은 유효하다 등등 그들의 전문 지식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정치적이기도 하다.
성직자만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의사, 청소부, 토론의 진행자, 철학교수도 그렇다. 이들은 모두 사람들의 믿음과 가치 소망과 두려움 때문에 존재한다.
노동자
소수에게 부가 다수에게는 비참한 생활 조건에 마르크스의 저작은 세상 모든 곳에서 정치 외향을 바꾸어 놓았다. 이 이론은 자신이 거둔 성공의 희생물이었는지도 모른다. 팔 것이라곤 자신의 노동력 밖에 없던 그들은 판 노동 대신 받는 임금으로 노동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수준 이상을 유지하는데 임금을 지급하는 이들은 관심이 없었다. 노동이 사실상 그들의 노동이 아니었다. 노동의 본질은 없어지고 어떤 욕구의 만족 수단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나아가 공동체의 일원일지라도 공동체의 이해관계와 자신의 이해관계를 동일시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특히 국가 노동을 할 때는 더 심했다. 회사보다 어머니나 가족을 위해서 일할 때 조금 더 견딜만할 것임에도, 좀 나아져 오늘 날에는 직무 만족을 말한다. 그러나 문제가 아직 없어지지는 않았다.
여성
오늘 날 인간의 개선을 가로막는 주된 장애물중 하나가 여성에 대한 법적 종속이다. 여성 전체의 조건을 개선하려면 여성의 자유뿐만 아니라 행복과의 연관성이 중요하다. 남성과 동등한 존재다. 여성 차별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남성과 여성을 나누는 언어들에 뿌리 깊이 박혀있다. 여성 차별의 반대하는 사람조차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 속에서 차별한다.
동물
인간과 동물은 가깝다. 비정상적인 사육과 도살은 자연환경을 파괴한다, 동물 복지를 다루지 않는 것은 오히려 지구 환경의 비효율적인 사용일 수 있다. 채식주의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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