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을 말하면 무조건 약육강식 승자독식이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틀렸다. 극단적인 생각이다.
모든 생물과 자연의 관계는 환경과 적응의 상호관계다. 적자생존, 약육강식, 자율경쟁, 승자독식 등 과거 유물이고 극단적 이기주의로 표현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자연선택은 그런 극단적인 관계가 아니다. 자연은 약육강식의 무자비한 전쟁터가 아니다. 낡은 사고다. 관계의 나눔과 경쟁 두 측면을 보는 훈련이 중요하다. 이런 극단의 사고는 다름은 나쁘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무지와 편견은 이들과 동료다.
과학계나 사상계는 개인적으로는 지혜와 명성을 차지하려 투쟁하지만 이들은 공유된 지식 자원을 재료 삼아 사상과 과학을 전개하고 이러한 사상은 다시 공유된 지식을 풍성하게하므로 결과적으로 지적 경쟁자들도 함께 발전하게 된다.
자연계의 경제에도 악덕 자본가 못지않게 많은 노동조합이 있고, 개인주의적 창업가 정신 못지않게 왕성한 연대가 있으며. 인간계의 경제와 사회에도 공동선과 사회적 가치들이 있다.
진화의 엔진에 불을 당긴건 이기적 유전자지만, 이 과정은 외로운 이기주의와 더불어 협력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우리가 알고 있거나 알게 되는 지식이란, 사실 지금이 아니라 우주와 태양, 지구 생성때부터 동.식물이 있어온 수십억년 전부터 있어온 것들이다. 단지 지금 인간 개인은 이순간 알게 되거나 이해한 것일 따름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거나 늦게 알았다는 것일 뿐이고 앞으로도 스스로 알아(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과거의 잘못된 사고들에서 벗어나야 한다.
19세기 영국의 사회철학자 하버트 스펜서에 이르러 다윈의 진화론의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을 극단적인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 ; 스펜서가 만든 말이다)'이란 단어로 바꾸어 버린다. 잘못된 해석과 이런 인식 확산은 인종주의, 제국주의, 파시즘, 나찌즘을 만들고 옹호하게 된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자유경쟁, 승자독식이라는 편향된 공부가 협력없는 무한 자율경쟁이 자연계의 법칙인 것처럼 오해하게 했다. 이런 사회경제에서 자유와 경쟁 합리화를 위한 극단 논리가 무한경쟁 승자독식으로 나아가 사회진화론으로 나치는 게르만의 우월성과 유대인 학살, 흑백인종차별등 우생학의 그릇된 과거를 남겼다.
극단 경향의 철학과 이념은 더 나아가 경제행위에서 여러 금융파생 상품들과 주식시장에서 공매도라는 없는것, 소유하지 않은것, 카지노 등 보다 사회적 공적 가치가 높은 직업과 행위들이 비하 또는 저평가 되며 자신의 위험까지 판매하는 거짓 상품들이 일반인들은 모르는 사이에 법률로까지 만들어지는 극단적인 허상 경제행위들로 넘치게 된 것이다.
방향을 말하는데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받아들이면 안된다. 진화론은 현재를 설명하는데서 중요한 방향을 제시한다. 더 결정적인 것은 환경과 여건에 관한 과학적 설명이다. 경쟁을 확인하지만 사회적 가치와 공동선을 고민하는 적응과 조화가 관건이라는 말이다. 원인을 관계와 연관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자연선택(진화론)이다.
다윈의 진화론 자연선택이 경제와 사회이론을 만난 19세기부터 극단적인 자유경제와 무한경쟁 승자독식을 합리화하며 20세기 후반까지 이어져왔다. 그동안 인류에게 축적된 사회적 가치와 공동선이 마치 무효인 것처럼 잘못된 해석을 휘둘러왔다.
경제학을 전공한 나도 과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을땐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무한 자유와 경쟁에 대한 고민은 큰 숙제였다. 아마 지금도 대부분의 정치 경제 사회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과학을 학습하므로써 그에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게됐다.
지금도 과거의 대결과 무한자율과 무한경쟁, 승자독식 교육을 배운 사람들이 정치를 하고 경제를 말하고 사회와 기업을 운영하고 평론하고 기사를 작성하며 넓게 퍼져있다. 근본은 인식과 참교육(과학적)의 문제다.
"보는 눈이 드물면 이해하는 마음도 드물다. 관찰과 지식이 없어서 세상은 막대한 손실을 입는다." (칼 린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