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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원 남편의 사망, 비극은 멀고 현실은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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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원 남편의 사망, 비극은 멀고 현실은 가까웠다

[두 바퀴 배달 인생의 죽음] ① 남편 대신 가장이 된 아내

2018년 6월 20일, 성남에서 오토바이 배달을 하던 50대 배달원이 사망했다. 무리하게 차선변경을 하다가 차량과 부딪혔다. 통상 배달하다, 즉 일하다 사망할 경우 산업재해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이 50대 배달원은 그러지 못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프레시안>에서는 '두 바퀴 배달 인생'이라는 기획을 통해 배달 플랫폼 구조 속에서 속절없이 죽어 나가는 배달원들을 조명하고자 한다.

김성연(가명, 44) 씨가 이주성(가명, 53) 씨를 처음 만난 곳은 경북 경주에 있는 외국인 전용 식당에서였다. 당시 이 곳 식당 매니저로 일하던 이 씨의 친절하고 책임감 있는 모습에 반했다. 스물세 살이었던 김 씨는 당시 열두 살 많은 이 씨와 결혼했다.

성실히 일하는 남편이기에 사장에게도 인정받았다. 그러다 첫째 아이가 돌을 지날 무렵, 서울 서대문에 있는 식당으로 직장을 옮겼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돈 들어갈 곳이 많아졌다. 경주 식당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세 식구 살기는 빠듯했다. 남편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서울에서의 삶은 힘들었지만, 점차 자리도 잡게 됐다. 서대문 식당을 그만둔 뒤로는 동대문 시장에서 김밥 장사를 시작했다. 이 장사가 대박나면서, 성남 친정엄마 집에 아이를 맡기고 김 씨도 거들었다. 이후 남편은 옷가게, 신발가게 등 사업을 하나둘씩 늘려나갔다. 그 사이 둘째도 태어났다.

기울어진 사업, 배달 일을 시작한 남편

인생이 피는 날이 있으면, 지는 날도 있다고 했던가. 동대문 상권이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남편 사업도 기울어졌다. 알게 모르게 빚도 쌓이는 듯했다. 혼자 끙끙대는 남편에게 "모든 걸 혼자 짊어지지 말라"고 했으나 "걱정하지 말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남편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를 데리고 장모님에게 결혼한다고 했을 때, 너 고생시키고, 걱정시키지 않는다고 했어. 내가 알아서 할게. 걱정하지 마."

'알아서 할게'라는 말의 의미를 나중에야 알았다. 사업을 하느라 살던 집은 처분하고, 성남 친정집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사업이 잘 될 때는 친정엄마에게 얼굴 비추는 게 좋았는데, 사업이 기울어지면서 남편이 친정엄마 얼굴 보기를 민망해했다. 친정엄마는 "편하게 생각해라"라고 했지만 남편은 그러지 못했다.

동대문 사업을 접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남편은 김 씨에게 넌지시 자신이 얼마 전부터 오토바이 음식 배달 일을 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한지는 꽤 되었지만, 아내인 김 씨가 반대할까봐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고 했다. 김 씨는 펄쩍 뛰었다. 결혼한 이후 처음으로 크게 싸웠다. 남편은 김 씨에게 "조심히 다치지 않게 일하겠다"고 설득했다.

"배달일 솔직히 괜찮아. 내가 이 나이에 어디에 들어갈 수 있겠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더라고. 게다가 여긴 일하는 만큼 돈도 많이 줘. 그동안 동대문에 있으면서 졌던 빚도 갚고, 그래서 어느 정도 돈을 모으면, 다시 가게를 해보려고. 여보, 너무 걱정하지 마. 곧 그만둘 거야."

그간 사업이 기울어진 뒤, 여기저기 취업을 해보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이거 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쓰러웠다. 가장의 무게가 남편 양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말릴 명분이 없었다.

남편은 김 씨에게 배달 일을 한다고 알린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집이 외진 곳이어서 배달 일을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1시간 가까이 걸렸다. 배달앱에서 일하는 남편에게 시간은 곧 돈이었다. 음식점들이 모여 있는 인근에 원룸을 얻었다. 남편은 조그마하지만 괜찮은 월세방이라고 설명했다. 김 씨는 남편 말만 믿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괜찮다던 월세방이 얼마나 열악한 곳이었는지.

남편은 이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 집에 왔다. 나머지는 모두 배달의 시간이었다. 오전 11시에 나가서 새벽 2~3시까지 일했다. 월세방에서는 잠만 잤다.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했다. 명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한 달에 400~500만 원을 벌었다. 고1과 고3인 두 딸 학원비, 그리고 대학에 갈 때 내야 하는 등록금도 생각해야 했다. 빚도 갚아나가야 했다.남편이 몸이 부서져라 오토바이로 성남 일대를 돌아다닌 이유다.

▲ 배달 라이더. ⓒ프레시안(최형락)

남편의 사망, 비극은 멀고 현실은 가깝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했던가. 남편이 그렇게 일하던 어느 날. 김 씨는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받았다. 경찰에게 연락이 왔는데, 남편에게 일이 생긴 듯하다고 했다. 00병원 응급실로 빨리 오라고 했단다. 불안한 마음에 급히 택시를 타고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남편이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김 씨를 기다리는 건 혼수상태인 남편이었다. 의사는 수술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했다. 건강하던 남편의 온몸은 부어있었다. 오토바이 배달을 하고 나오는 길에 자동차와 부딪혀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고 했다. 응급실에 올 때, 이미 가망이 없었다.

남편이 마지막 가는 길에 두 딸이 두 손을 잡고는 "사랑해요" 하면서 울었다. 그 말이 들리는지 남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이틀 전, 잠시 집에 온 남편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남편을 허무하게 보내야 했다.

장례를 어떻게 치렀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김 씨였다. 막상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당하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장사를 치르고 나니 닥친 현실의 무게에 짓눌렸다. 이제는 남편 대신 김 씨가 가장이 되어야 했다. 아직 고등학생인 두 딸이 자기만 쳐다보고 있었다. 남편이 떠난 비극은 멀어지고 먹고살아야 하는 현실은 가까이 다가왔다.

당장 돈을 벌어야 했다. 남편이 사업하다 진 빚이 1억 정도 남아 있었다. 평소 아르바이트 식으로 도와주던 식당에 정식 직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저녁 9시에 퇴근했다. 휴일은 1주일에 단 하루였다. 주말엔 휴가 자체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일해서 한 달 230만 원 받았다. 이 돈으로 세 식구가 생활해야 했다. 남편의 빈자리를 느끼는 김 씨였다.

김 씨가 못내 마음 아픈 건, 아이들이다. 남편이 떠나고 난 뒤, 어른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안쓰럽다. 한창 사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지만, 일절 김 씨에게 돈 달라는 말을 안 하는 아이들이다. 스스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해결한다.

특히 남편과 비슷한 성격인 둘째가 눈에 밟힌다. 힘들어도 잘 티를 내지 않는다. 속내도 잘 드러내지 않는 둘째다. 둘째 딸은 남편 장례식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학교 친구들도 장례식에 부르지 않았다.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게 더 안쓰러운 김 씨다.

그런 작은 딸이 남편 장례를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 씨 생일날 반지를 선물했다. 장수를 뜻하는 반지라고 했다. 남편이 떠났을 때, 작은 아이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어 마음이 더 아팠다. 악으로, 그게 안 되면 깡으로라도 버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안 되는 일이 있기 마련이었다.

▲ 배달 라이더가 사용하는 앱에 뜨는 콜. ⓒ프레시안

도로교통법 위반 넘나들어야만 하는 배달라이더들의 삶

김 씨 남편은 배달 일을 하다가 사망했다. 이는 산업재해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남편의 죽음에도 김 씨는 아무런 보상금을 받을 수 없었다. 산재 승인을 심사하는 근로복지공단에서는 남편이 불법으로 차선 변경을 하다 사망했기에 산재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일하다 사망한 남편의 죽음이 산업재해가 아니라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재심을 청구했으나, 마찬가지로 불승인이 떨어졌다.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까지 제기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남편은 일하다 사망한 '노동자'가 아니라 불법을 저질러서 사망한 '범죄자'가 됐다.

남편은 고의로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밀린 배달을 소화하려면 어쩔 수 없이 급박하게 차선을 변경하고 유턴 등을 해야 한다. 게다가 심각한 불법도 아니었다. 범칙금을 내야 하는 수준이었다. 경미한 불법을 저질렀다고 산재를 인정 못 받는 현실이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렇지만 김 씨는 분노하지 않으려 애써 노력한다. 남편이 먼저 간 것도 남편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숨을 쉴 수 있다.

"분노요? 분노하지 않으려고 해요. 인생이란 그럴 수 있다, 하늘의 뜻인가 보다 생각하려 해요. 아빠가 먼저 간 것도 아빠의 운명인가보다 그렇게 생각해요. 오토바이 사고로 죽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잖아요. 운명이라 생각해요. 그래야 살 수 있는 듯해요. 누굴 원망하면, 살수가 없더라고요. 살아야 하니깐요. 누군가를 원망하면서는 살수가 없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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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환주

2009년 프레시안에 입사한 이후, 사람에 관심을 두고 여러 기사를 썼다. 2012년에는 제1회 온라인저널리즘 '탐사 기획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2015년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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