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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 만에 입양 보낸 아들을 만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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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31년 만에 입양 보낸 아들을 만나러 갑니다"

[입양 당사자들이 바라는 입양제도] ③ 입양 사후서비스에서 '재회'가 중요한 이유

입양은 어떤 일인가? 사회복지의 측면에서 보면 양육이 포기된 아동을 원가정을 대신하여 새로운 가정에서 양육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아동 이익 최우선의 원칙' 중에서 최선책은 원가정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입양은 차선책으로 아동에게 양육 가정을 찾아준다는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입양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입양인, 친생부모, 입양부모, 즉 '입양삼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입양은 살아가는 일 자체이며, 입양인을 중심으로 이들은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다. 입양이 삶이기 때문에 그 안에 항상 좋은 것만도, 항상 나쁜 것만도 아닌, 희로애락이 모두 들어있다.

이번 연재는 '입양삼자'가 가슴 속에 담고 있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내려고 한다. 이를 통해 알려지지 않은 입양의 도전적 측면과 어려움, 그것을 넘기 위한 노력과 제도적 필요성 등을 살펴보려 한다. 이 글들이 입양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국내입양인, 해외입양인, 입양을 보낸 친생부모, 입양부모, 양육미혼부모의 입장에서 경험하는 입양에 대한 글을 연재한다. 편집자주

"당신 아들을 찾은 것 같아요." 

작년 10월에 한국에 거주하는 해외입양인들이 만든 연대단체에서 나에게 보낸 문자를 받았다. 미혼모로 아들을 낳아 입양으로 떠나보낸 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던 아들에 대한 소식을 31년 만에 듣게 되어서일까? 사실인지 거짓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한국에 재정착을 위해 들어온 해외입양인들을 오랜 시간 만나오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이 아닌) 경계에 선 삶을 듣고 봐오던 터라 아들 소식을 접하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살아있구나"였다. 이 장면에 대해 머릿속으로 수없이 연습한 건 온데간데없고 멍해지며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오래 전 사비를 털어 DNA 등록 선물을 해주었던 해외입양인의 얼굴부터 시작해서 나에게 아들을 찾을 방법을 고민해주던 해외입양인들의 얼굴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들이 같은 마음으로 우리 모자의 재회를 도와준 건 한국의 친생모가 입양으로 떠나보낸 자녀를 먼저 찾는다는 사실이 해외입양인들에게는 무척 용기 있는 행동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양육을 선택한 미혼모들은 여성 정책관계자들과 입양 부모와 입양인들, 자식을 떠나보낸 친생모들의 지지와 연대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이미 오래전 자의든, 타의든 낳은 자녀를 입양 보낸 친생모들은 '자식을 잃어버린, 지키지 못한, 또는 버린 엄마'라는 낙인에 더욱 위축되어 숨어야 했다. '입양을 보낸 자녀에게 유익한 행동'이라는 외부로부터 온 말을 내면화하며 살았다.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입양은 책임이다. "언젠가는 엄마도 자녀를 찾고 싶을 때가 오며 자녀도 자신을 낳은 엄마를 찾고 싶어 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라는 것을 입양을 보낼 마음을 가진 엄마들을 면접 상담하는 '모든 곳'에서 반드시 말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입양인들이 "우리가 느끼는 상실감을 부모님들이 인정하고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할 때 그들이 말하는 부모 속에는 입양 부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친생부모도 있다는 것을 입양인들을 통해 배워서이다. 세상 어느 곳보다 안전하고 따뜻한 친생모의 뱃속에서 열 달을 함께 있었던 아기가 세상에 나와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분리됨으로 인해 안전 기지를 상실한다는 것, 그 일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감정이며 아무리 감추려 해도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궁금해하기에 그 아기를 분리하는데 함께 했던 우리는 모두 회복하는데도 함께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아들과의 재회를 접하면서 어느 책에서 읽었던 글이 생각났다. "엄마, 나는 그 엄마가 나를 포기해야만 했을 거라는 게 이해가 돼요. 그런데도 기분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는 건 왜일까요?"라는 질문에 "포기했던 이유를 아는 건 열네 살의 너이지만 기분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여윈 갓난아기의 느낌이기 때문이다"라는 입양한 엄마의 대답을 읽었다. 그때 나는 입양인이 뿌리 찾기를 통해 그토록 만나고 싶던 친생 가족과 재회한 시점에서 둘 사이에 꼭 필요한 것이 '애도'라는 것을 알게 됐다.

자녀를 낳았지만 기를 수 없다는 것은 수시로 죄책감을 느끼게 하며 경계선에 서 있는 것 같다. 뱃속에서는 나와 한 팀이고 생명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배에서 나와서는 나와 닿을 수 없다는 것을 늘 자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만난 기쁨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아이와 만날 수 있는 시공간은 오직 상실이란 지평 아래서만 가능했던 친생모가 자신의 그것을 딛고 일어나야 할 지점이기도 하며 재회한 자녀를 위해 버텨주어야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재회 이후, 마치 친생모를 다시 갖고 싶고 친권 포기로 잘린 공생관계를 획득하고 싶어 신생아로 돌아간 듯 퇴행하거나 재회한 친생 부모의 책임을 다시 시험하는 입양인에게 친생모는 자기 마음속의 '버려진 아이'가 비명을 질러도 인내심을 가지고 관계 속에서 성숙한 사람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되새긴다.

재회를 생각하면 친생모는 끝도 없는 감정이 올라와 당황스럽고 불안해서 피하고 싶기도 하다. 가난한 자신의 현재 상황, 키운 적 없는 다 큰 자녀를 만나야 하는 두려움, 다른 가족이 아기가 죽었다고 말해서 입양된 줄도 몰랐거나,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해외로 입양되어 다른 부모의 자식으로 사는 경우, 가난해서 밥이라도 굶지 말라고 매몰차게 내 손으로 보낼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어떻게, 무슨 면목으로, 만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를 버린 남자와 비슷한 모습을 보게 될까 봐, 과거와 연결되는 불안이 끝도 없이 올라와 현재의 발목을 붙든다. 입양을 보냈던 자녀가 친생모를 먼저 찾을 때는 더욱 두렵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이 상황을 '혼자서 비밀스럽게' 감당해야 하는 것에 대해 수치심과 자책감이 마구 누른다.

잊힌 여인의 유령이 현재에 생생하게 환생하는 순간이다. 자식을 보낸 후에는 사라졌어야 하고 재회할 때는 꼭 나타나기를 강요받는 부당한 처지라고 느껴도 말이다. 내가 낳은 자녀를 돈을 받고 보낸 입양기관도, 그 일에 침묵하며 동조했던 이 나라도 재회를 요구받는 고통의 순간에는 내 곁에 없다. 비난과 멸시는 그때처럼 또 혼자 감당해야 하는 비참한 순간이다. 그러나 아이를 위해 버텨내야 하는 순간이다. 그때는 신체적으로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견뎌내어 해산했다면 재회의 시간에는 심리적으로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견뎌내어 성장해야 한다. 자식을 떼어 보내는 고통이 얼마나 크고 오래 가는지 이미 배웠기 때문이다.

입양은 이처럼 개인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개인을 둘러싼 가족의 이야기이고 가족이 속해져 있는 공동체의 이야기이다. 한국에서 해외로 입양된 아동의 숫자가 20만 명이라는 건 적어도 낳은 주체가 40만 명(임신은 남녀의 관계이므로)이며 생각보다 훨씬 입양의 서사로 둘러싸인 가족이 많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친생모로서 재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곳은 한국 사회에서 무척 제한적이다. 굳이 드러낼 필요 없는 가족 비밀이며 개인의 일이라고 치부한다.

현재 친생 가족 찾기를 시도하는 해외입양인들의 출생 시기가 폭발적으로 해외 입양을 보냈던 80년에서 90년 초반인 것을 고려해보면 입양기관에 대한 신뢰 부족, 한국 정부가 관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 등 이들이 친생 가족 찾기를 하면서 느끼는 심리적, 제도적인 것에 대해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추측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친생 가족을 찾아서 자신이 무엇 때문에 입양을 가게 되었는지, 자신을 낳은 아버지와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정체성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은 게 가장 큰 욕구다. 친생 가족과 관계를 이어갈지는 그 다음에 결정한다. 그래서, 친생 가족을 찾는다는 것이 친생 가족과 재결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해외입양인들에게 친생 가족의 확대 의미에는 '한국'이라는 나라도 포함되기에 친생 가족을 못 찾아서 힘들수록 이들을 정부에서 따듯하게 맞아주는 것은 정말 중요하며 정체성 확립에 큰 영향을 끼친다. 한국을 왜 모국이라 부르겠는가. 자신의 친생모가 아니어도 입양을 보냈던 친생모들과 만나 대화를 한 경험이 있는 입양인들은 재회에 대해 훨씬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경향이 있다. 친생 가족을 찾는 입양인들이 입양을 보낸 자녀를 자발적으로 찾고 있는 친생모들이 있고 그들을 만났다는 것만으로 친생 가족을 찾는 노력에 대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를 종종 봤다. 친생 가족들에 대한 공공기관의 입양 이후 재회와 관련한 교육과 인식 개선 노력은 입양인들의 친생 가족 찾기에 중요한 자원이다.

입양제도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기에 입양 친생모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 좋겠다. 여성이 자신이 낳은 자녀를 출산과 동시에 영구 보호 대리 서비스제도에 아기를 위탁함으로써 친권과 양육권을 모두 상실 해야 하는 것을 이해하는 입양 상담가의 전문적인 지식과 태도에 따라 아이의 미래가 결정되는 힘이 있다는 것을 마음에 담고 윤리적이고 책임감 있게 미혼모와 이야기해주면 좋겠다. 그 태도가 친생모로 전달되어 아기의 장래를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게 하면 좋겠다.

아동 영구 보호 대리 서비스가 신뢰롭고 타당한 제도로 자리를 잡으려면 그 제도 관련 당사자들이 신뢰하고 타당하게 느낄만한 공공기관이 반드시 이 일을 기능적으로 수행하기를 바란다. 더하여 입양 숙려기간이 친생모의 출산한 몸을 추스르는 시간임과 동시에 아이의 장래를 위한 고민의 시간으로 충분히 주어지기를 바란다.

재회를 앞둔 친생모는 불쌍하고 가련한 복지혜택 수혜자가 아님을 밝힌다. 낳은 자녀가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싶어 입양 관련 기관들을 통해 재회 서비스를 신청할 때 입양인, 친생모, 입양 부모들이 조금이라도 느꼈던 수치심, 불안감이 공공기관 어느 한 곳에 상설된 공간이 있어서 언제라도 입양 당사자들이 편안하게 묻고 들을 수 있는 문턱 낮은 따듯한 곳에서 다시 만난 기쁨을 축하해주는 일로 바뀌기를 바란다.

지금의 입양제도는 더디지만 바뀌어 가고 있고 입양 당사자들의 권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갈 길이 멀다. 바뀌기 전에 보냈던 아이들이 바람대로 잘 자란 어른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잘 컸기에 당당히 뿌리를 캐고 싶어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 손에 곡괭이를 쥐여 줄 만큼 넉넉한 어른으로 성장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의 입양을 주선했던 입양기관에서는 아직도 나와 아들의 재회 소식을 모른다. 재회에 애써주지 않은 곳에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아서 알리지 않았다. 입양을 주선해야 할 아기가 내 몸 안에 있을 때 그들이 쏟던 열정은 어디로 가고 재회를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에 실망했다. 입양기관의 입양 사후서비스에 친생모를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게 우리는 '잊힌 여인들'이다. 나는 11월에 아들의 잃어버린 한 조각을 가진 유일한 사람의 자격으로 아들을 직접 보러 미국으로 간다. 입양은 끝이 아니라 끝없는 이야기의 시작이며 재회는 중요한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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