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의 정치이며, 진실을 둘러싼 싸움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는, 과거의 부정과 왜곡을 제도적으로 수행하는 기이한 풍경을 보여 주고 있다.
이영조, 김광동, 박선영. 이름은 다르지만 셋은 기묘하게 닮았다. 과거에 대한 시선, 역사에 대한 태도, 피해자보다 가해자에 가까운 동정심. 이들이 주도했고 현재 주도하는 진실화해위원회는 마치 '진실 은폐와 화해 요구 위원회'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이영조, 김광동은 각각 진화위 위원장직을 거쳐 갔고, 박선영은 현재 그 자리에 있다. 그런데 이들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언행을 들여다보면, 시기만 다를 뿐, 하나의 목소리처럼 완벽히 닮아 있다. 역사인식의 궤적은 기묘하게 일치하고, 그 공통분모는 한결같이 '국가폭력의 정당화'와 '피해자의 재심문'이다.
먼저 이영조 전 위원장. 그는 제주 4·3과 5·18 민주화운동을 외국 학술회의에서 "폭동"과 "반란"으로 서술했다. 유족과 시민들이 수십 년을 바쳐 바로잡은 역사적 정의를, 영어 몇 줄로 송두리째 되돌렸다. 이 발언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고도의 선택이며 국제적 메시지였다. 그는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국가의 입장에서 사건을 배열했다. 총 대신 언어를 든 또 다른 진압이었던 것이다. 미국 공공기관 심포지엄이라는 무대에서, 이영조는 명확한 목적어를 갖고, 번역과 어휘를 선별해가며. 이건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계산된 국제적 여론전이며, 역사를 향한 정밀한 재해석의 시도다. 4·3 유족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복권하고 회복해 온 정의는, 이렇게 손쉽게 외국어로 다시 짓밟혔다. 과거엔 총으로, 지금은 단어로.(관련기사)
김광동 전 위원장은 "전쟁 중엔 재판 없이 죽일 수도 있다"는 발언으로 역사 왜곡의 경지를 한층 끌어올렸다. 그 말이 정당화하는 건 무엇인가? 학살이다. 법의 절차조차 필요 없다는 그 인식은, 민주주의의 가장 밑바닥을 무시한다. 그에게 과거사 진상규명은 불편한 과거가 아닌, 불온한 현재를 지우는 작업이다. 그는 사망한 피해자들에게 "왜 증거가 없느냐"고 되묻는다. 그 질문은 사실, 우리가 왜 이토록 다시 싸워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설적 증거다. 그래서 김광동 전 위원장의 언행은 더 노골적이다. "전시에는 재판 없이 죽일 수 있다"는 발언은 단순한 법적 무지가 아니라, '국가 폭력의 정당화'에 가깝다. 국가가 정당하지 않은 재판조차 생략하고 자의로 생명을 끊을 수 있다는 관념은, 민주주의 국가에선 통용될 수 없는 위험한 인식이다. 그래서 그는 진실을 규명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이 사건은 사실 조사 대상이 아니다"라며 피해자의 입을 막았던 것이다. 진실을 밝히는 게 아니라, 진실을 선택하고 선별하고, 정치적 목적에 맞게 배열하였던 것이다. 그가 말하는 '진실'이란, 결국 권력에 편리한 진실일 뿐이었다. (관련기사)
박선영 현 위원장이 이끄는 진화위도 이미 여러 사건의 진실규명을 축소하거나 기각하며, "정치적 의도가 없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러나 이 진화위가 부정하는 사건들의 목록은, 절묘하게 '권력에 불편한 진실'로 가득하다. 그 의도는 정치가 아니면 무엇인가? 무지인가, 아니면 더 위험한 자의성인가? 박선영 위원장은 불법사찰 피해자에게 "관찰을 통해 보호한 것"이라는 발언은, 조지 오웰의 『1984』를 방불케 한다. 사찰은 보호이고, 감시는 선의이며, 권력의 일방적 개입이 마치 '위기 대응'처럼 포장된다. 피해자는 다시 의심받고, 공권력은 무죄 추정의 특권을 누린다. "당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가해자의 논리는, 모든 폭력의 출발점이다.(관련기사)
이영조, 김광동, 박선영, 이들 세 인물이 공유하는 한국현대사 인식은 명확하다. 국가는 정당했고, 폭력은 필요했고, 저항은 의심스럽고, 피해자는 입증해야만 보호받을 수 있다. 이것이 현재 진실화해위원회가 들고 있는 '진실'의 실체다. 진실은 추궁의 대상이 아니라, 가려 뽑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역사란 단지 과거를 다투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사회가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고, 무엇을 부끄러워할지를 결정하는 윤리의 문제다. 그런데 지금 잔화위는 윤리를 버리고, 정치적 편향을 '사실'로 포장하며, 국가폭력의 과거를 '오해'로 덮는다. 그들은 역사라는 무대 위에서, 과거를 다시 체포하고, 고통을 다시 심문하며, 유족의 삶을 또 한 번 지워버린다.
진화위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다. 과거의 억울함을 밝히고,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적 기억을 만드는 것. 하지만 지금 박선영 위원장의 진화위는 과거를 다시 구속하고, 고통을 다시 심문하며, 피해자를 다시 증명하게 만든다. 한 손엔 권력을, 다른 손엔 역사책을 들고 있는 이들이, 그 책의 문장을 고쳐 쓰고 있다.
이영조, 김광동, 박선영 이들은 하나같이 "정치적 의도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치란 본디 중립을 가장한 무기에서 시작된다. "양쪽 다 책임이 있다"는 말은 언제나 가해자에게만 면죄부가 되고, 피해자에겐 침묵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렇게 침묵당한 역사 위에, 또 다른 억압이 자란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반복된다. 그렇다. 그것은 망각을 발판 삼아 다시 걷는다. 우리가 침묵하면, 침묵한 만큼의 무게로. 그 반복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에 봉사하는 기억'이 다시 제도화될 때, 언제든 되살아난다. 우리가 침묵할 때마다, 침묵은 또 다른 국가의 목소리가 된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다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을 위해 감시했습니다."
"재판 없이 죽일 수도 있었죠."
"광주5.18은 폭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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