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의 도시 전주는 판소리와 무용, 미술, 문학, 서예 등 거의 모든 장르를 아우르고 있다.
이러한 종합적 예술 전통은 전주를 K-culture의 원천이자 K-pop의 뿌리로 평가하게 만드는 중요한 기반이다.
그중 서예는 창암 이삼만 선생에 이어 유재 송기면, 석전 황욱, 강암 송성용 선생 등으로 이어지는 전통을 자랑하며, 1997년부터는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를 통해 세계화를 도모해왔다.
그러나 오랫동안 서예는 한자 중심의 예술로 인식되었고, 이로 인해 일반 대중과의 거리감, 시대성과 창의성의 부족, 젊은 세대의 저조한 관심, 국제사회에서의 낮은 인지도 등의 비판에 직면해 왔다.
특히 디지털 시대에 진입하면서 서예의 전통적 가치와 현대적 감각의 조화를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로 부상했다.
이에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조직위원회를 비롯한 서예계는 한글서예를 새로운 표현의 장으로 삼아 세계적인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시도를 본격화하고 있다.
송하진 세계서예비엔날레 조직위원장은 한글이 천지인(天地人)의 조화와 음양오행 사상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문자임을 강조하며, 다양한 예술적 표현에 유리한 구조를 지닌 문자임을 역설한다.
그는 한글서예를 대중화·현대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교육과 콘텐츠 산업과의 연계를 통한 실질적 확산 가능성도 함께 제시한다.
송 위원장은 2024년 9월과 10월 서울 한국미술관과 전주 현대미술관에서 ‘거침없이 쓴다 – 푸른돌·취석 송하진 초대전’을 개최하며 한글서예 부흥의 실천적 출발을 알렸다.

필자는 ‘K-서예의 새로운 길을 열다’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이 전시의 의미와 작품세계를 소개한 바 있다. 한글서예의 창의성과 보편성, 예술적 확장 가능성을 실험한 이 시도는 단지 개인적 작업을 넘어 K-서예의 방향성을 탐색하는 상징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한글이라는 독자적이고 유일한 문자로 무장한 K-서예는 우리만의 고유성과 창의성을 기반으로 글로벌 예술 무대에 도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국가유산청은 전북자치도의 신청을 받아들여 2025년 1월 23일 한글서예를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전북자치도는 한 발 더 나아가 203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는 전통의 보존을 넘어 한글서예를 미래형 콘텐츠로 전환하려는 전략적 행보로 평가된다. 2027년 개관을 목표로 세계서예비엔날레관 건설사업 본격 추진, 세계서예비엔날레의 국제적 확대 추진 등은 이 전략을 구체화하는 핵심 사업들이다.
특히 2월 13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의 업무협약은 단순한 협력을 넘어, 전통과 창조, 역사와 미래가 만나는 플랫폼으로 기능할 수 있다. 세종대왕이 조선 왕조의 본향인 전주에 상징적으로 정착하며 대한민국 K-culture의 미래를 견인해 주기를 기대한다.
한글서예의 세계화는 단순히 예술 장르를 넓히는 일이 아니라, 한국 정신문화의 정체성과 품격을 확산시키는 일과 맞닿아 있다. 중국이 공자학원을 통해 서예를 문화외교 자산으로 활용하듯, 우리도 해외 세종학당을 중심으로 ‘한글서예 아카데미’ 연계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외국 작가들을 대상으로 국제 콩쿠르를 개최하는 방식을 고려할 수 있다.
일본의 쇼도(書道)가 현대미술과의 융합을 통해 국제 전시를 확대해온 사례도 참고할 수 있다.
이에 따라 K-패션, K-무용, K-음악과 한글서예를 융합한 퍼포먼스 콘텐츠도 충분히 기획 가능하다. 특히 K-드라마·K-영화와 협업해 서예를 소품 디자인으로 활용하거나, 드라마 내 장면에서 문화적 상징으로 녹여내는 방식도 문화적 확산에 유효하다.
여기에 더해, 디지털 전환을 통해 서예를 메타버스 기반 갤러리에서 전시하거나, NFT 형태로 제작하여 글로벌 팬덤과 수집가층을 대상으로 유통하는 방안도 실현 가능하다.
K-팝 아티스트와의 협업도 한글서예의 외연 확장을 위한 중요한 전략이다. 가수의 이름, 한글 가사 등을 서예로 디자인하여 앨범 커버, 무대, 굿즈에 활용할 수 있다. 팬들을 위한 ‘한글 서예 키트’를 제작해 팬미팅과 연계한 체험형 콘텐츠로도 전환할 수 있다.
또한 ‘한글서예 국제 레지던시’ 운영,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내 ‘국제 초청전’ 신설, ‘글로벌 한글서예 SNS 챌린지’ 등과 같은 대중 참여형 캠페인을 통해 외국 작가 유치 및 국제 교류를 강화할 수 있다.
송하진 위원장이 직접 보여준 한글서예전은 단지 전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K-서예의 새로운 도전을 상징하는 출발점이었다.
한글서예는 단순한 예술 장르가 아니라, 한국 고유의 문자와 정신을 담는 그릇이며, 이를 통해 한국은 ‘문자 강국’이자 ‘정신문화 강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술과 전통, 감성과 창의성을 결합한 한글서예가 새로운 세계예술의 지평을 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제 우리는 한글서예로 한글르네상스를 실현하는 여정에 힘차게 나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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