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9일(이하 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통화 뒤 휴전 중재에서 한발 물러설 수 있다고 태도를 바꿨다. 지난주 미·러 정상 접촉만이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시사한 데서 사뭇 달라진 것이다.
이번 통화가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 가운데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 체결할 각서를 준비 중이라고 밝혀 의문을 자아내기도 했다. 러 국영 통신은 각서의 의미가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추진하는 즉각 휴전과 배치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 CNN 방송,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을 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푸틴 대통령과 2시간 가량 통화 뒤 백악관에서 취재진에 휴전 협상에 진전이 없다면 "난 그냥 물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건 내 전쟁이 아니다"라며 "이는 유럽의 상황이었고 유럽 상황으로 남았어야 한다"며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통화 뒤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바티칸이 협상을 주최하는 데 관심을 표명했다"며 미국 대신 레오 14세 교황의 적극적 중재 역할을 기대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즉시 휴전 및 전쟁 종식을 향한 협상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어 "그(휴전) 조건은 양쪽(러·우)만이 협상할 수 있는데, 누구도 알지 못하는 협상 세부 사항을 그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라며 역시 한발 물러서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며칠 전과 사뭇 달라진 태도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주 튀르키예(터키)에서 열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3년 만의 직접 협상에 대한 기대를 낮추며 "푸틴과 내가 만나기 전까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지난 16일 이뤄진 러·우 직접 협상은 휴전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포로 교환 합의에 그쳤다.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 통화 뒤 러시아 제재 관련 태도도 완화했다. 그는 취재진에 현재 협상 진전 "가능성"이 있는데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면 "상황이 훨씬 악화될 수 있다"며 추가 제재를 부과하지 않을 것을 시사했다. 또 이번 통화에서 지난달 우크라이나 민간 지역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던 것을 재강조하지 않았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키이우 공습에 대해 소셜미디어를 통해 "블라디미르, 멈춰!"라고 비판하며 휴전 합의를 촉구했고 제재 경고도 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 통화 뒤 유럽 지도자들과도 통화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이 대화에 정통한 복수의 소식통이 유럽 지도자들과의 통화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양자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 쪽에 추가 압력을 가하지 않을 의향을 내보였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미 스탠포드대 국제안보협력연구소의 스티븐 파이퍼 선임연구원이 "휴전이 조만간 이뤄지지 않을 것이고 추가 제재도 부과되지 않을 것"이라며 "이번 통화는 푸틴의 승리"라고 평가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가 "아주 잘 진행됐다"고 자평했지만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푸틴 대통령이 통화에서 즉각적 휴전에 동의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지적하며 결국 별다른 돌파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푸틴, 트럼프에 "각서" 명분만 주고 '즉각 휴전 거부' 입장 고수 …유럽, 러 추가 제재 합의
푸틴 대통령도 이날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가 "매우 생산적이고 유용했다"고 평가했다. 러 <타스> 통신을 보면 푸틴 대통령은 통화 뒤 취재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합의 원칙, 잠재적 평화 협정 체결 시기, 관련 합의가 이뤄질 경우 일정 기간 휴전 가능성을 포함"한 "각서"를 체결할 준비가 됐다고 밝혔다.
해당 "각서" 발언은 우크라이나 쪽에 당혹감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우크라이나 고위 당국자가 푸틴 대통령이 언급한 각서에 대해 "아무도 그게 뭔지, 그 얘기가 왜 나왔는지, 그게 왜 중요한지 모른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독일 도이체벨레(DW) 방송에 따르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이날 취재진에 푸틴 대통령이 언급한 각서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한다며 "러시아 쪽에서 각서나 제안서를 받으면 그에 따라 우리 구상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러 국영 매체는 이 '각서'가 즉시 휴전이 아닌 푸틴 대통령이 주장해 온 이른바 포괄적 협상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분석했다. 러 국영 <스푸트니크> 통신은 미·러 정상 통화에 대해 "사실상 트럼프가 이전의 즉각 휴전 촉구에서 본질적으로 한 발짝 물러선 것"이라고 평가했다.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요구한 것과 같은 즉각적 평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통신은 푸틴 대통령이 언급한 각서가 "단순한 (일시적 전투) 동결이 아닌 포괄적 협상을 위한 한 걸음"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이번 통화에서 푸틴 대통령은 "각서"라는 명분만 트럼프 대통령에 쥐어 주고 즉각적 휴전엔 시간을 끄는 기존 입장을 관철한 것으로 풀이된다. 푸틴 대통령은 통화 뒤 취재진에 "러시아의 입장은 분명하다. 중요한 건 이 위기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라며 러시아 쪽 주장이 바뀌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러시아가 말하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근본 원인'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확장부터 돈바스 문제, 우크라이나 국가 존재 자체까지 나아간다.
미 CNN 방송에 따르면 유리 우샤코프 러 대통령 보좌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가능한 빨리 합의에 도달했으면 하는 의향을 강조했다"면서도 두 정상이 통화에서 협상 마감일이나 기간 등을 "논의하진 않았다"고 덧붙였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미국이 대화와 평화 추구에서 거리를 두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로 인한 수혜는 푸틴만 입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호소했다. 그는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휴전"과 러시아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더 강력한 제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내보인 입장은 러시아 쪽에 좀 더 가까워 보인다. <스푸트니크>는 러 고등경제원 교수인 드미트리 수슬로프가 미국이 추가 제재를 도입하면 "우크라이나 분쟁 해결 가능성과 러시아와의 관계 정상화 가능성이 지워지고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러·미 협력과 관련된 '무한한 잠재력'을 실현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통화 뒤 휴전보다 러시아와의 경제 협력에 치중했다는 비판을 받은 2월 우크라전 관련 미·러 협상 때 태도로 다시 기운 듯한 모습도 보였다. 그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휴전이 성립되면 "러시아는 미국과 대규모 무역을 하고 싶어하며 나도 동의한다. 러시아엔 막대한 일자리와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가 있다. 이 잠재력은 무한하다"고 밝혔다. 그는 "우크라이나도 국가 재건 과정에서 무역의 큰 수혜자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무조건적 30일 휴전을 촉구해 온 유럽 정상들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전해 들은 뒤 추가 제재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19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유럽은 제재를 통해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강화할 것"이라며 "이는 미국 대통령과 합의한 내용"이라고 밝혔다. 그는 "유럽과 미국은 매우 단합돼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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