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5년간 영국에서 살고 있다. 영국 여성과 결혼해 애 낳고 살며 느낀 점이 '밤하늘의 별' 만큼 많다. 자녀들은 초·중·고·대학교를 영국에서 나와 지금은 다 독립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무리 영국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도, 나는 자주 한국이 그립다. 한국의 문화, 냄새, 심지어 소음까지도 그립다. 전에 가족과 함께 한국에 갔다. 그런데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이번에는 영국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영국의 문화, 풍경, 심지어 영국의 날씨까지도 말이다.
이상하게도, 영국에 있을 땐 한국이 그립고, 한국에 있을 땐 영국이 그립다. 어쩌면 나는 욕심쟁이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중국적자'는 아니지만 분명히 '이중감정자'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나다. 삶이 힘들고 슬플 땐, 우리는 평화로운 천국을 그리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평화로운 천국에 있더라도, 우리는 이 바쁘고 소란스러운 삶이 그리워질 수도 있다. 자, 이제 그러면 진정한 '영국 신사'이자 배우, 그리고 행동가 였던 찰리 채플린의 삶에 대해 나누고 싶다.
찰리 채플린(1889-1977)은 지난 1952년 미국의 매카시즘 광풍에 휘말려 공산주의자로 몰려 스위스로 추방되는 고초를 겪는다. 그의 삶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일까?
"인생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다" - 찰리 채플린
찰리 채플린의 이 말은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그의 생애 자체를 축약하는 문장이다. 웃음으로 세계를 뒤흔든 사내. 그런데 그 웃음이 권력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그는 1952년 미국에서 쫓겨났다. 이름 하여 '매카시즘'. 이데올로기의 망령이 미국을 덮던 시절, 채플린의 웃음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웃음의 제왕, '빨갱이'가 되다
채플린은 가난한 영국 소년에서 세계 최고의 코미디 아이콘으로 거듭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의 대표 캐릭터 '리틀 트램프'는 단순한 웃긴 떠돌이가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기계에 눌린 인간, 파시즘에 희롱 당한 민중, 그리고 억압 속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는 보통사람의 초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너무 진실했다는 것이다. <모던 타임즈>에선 산업사회의 폐해를 까발렸고, <위대한 독재자>에선 히틀러를 통렬하게 풍자했다. 독재권력은 언제나 풍자와 웃음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채플린은 바로 그 두려움을 '풍자와 웃음'으로 증폭시킨 예술가였다.
1950년대 미국, 매카시즘이라는 광풍이 불었다. '공산주의자'라는 꼬리표는 고문도 필요 없고, 재판도 필요 없었다. 의심만 있어도 인생이 끝나는 시대. 채플린은 시민권도 없이 미국에서 활동했는데, 어느 날 국무부가 말했다.
"외국인이 미국을 비판해서야 되겠습니까?"
그 말은 곧 '꺼지라'는 뜻이었다. 그는 공산당원이 아니었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그저 '사람 편'이었을 뿐. 그러나 그게 문제였다.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인간이 기계에 먹히는 장면은 자본주의 비판으로 해석됐고, <위대한 독재자>에서 히틀러를 조롱한 연기는 체제전복으로 의심받았다.
결국 1952년, 영국 시사회 참석차 미국을 떠난 채플린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다. 미국정부는 미국에서 1914년부터 무려 38년을 살았던 그에게 새삼스럽게 입국심사를 요구했고, 채플린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렇다면 돌아가지 않겠다." 그리고 그는 스위스로 떠났고,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
화려한 할리우드에서, 박수와 조명을 받으며 살아온 '스타'에게 너무도 쓸쓸한 퇴장이었다. 그는 말없이 떠났지만, 뼈 있는 한마디를 남겼다.
"당신들은 내 웃음은 원했지만, 내 생각은 원하지 않았다."
그가 미국시민권을 끝내 받지 않은 이유도 이와 맞닿아 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영국인이었고, 죽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그는 예술가, 풍자가로서 품위와 철학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이기 전에 인간적이었고, 진영 이전에 진실을 이야기했다. 그는 언어 없는 무성영화로 말했고, 그 속에 권력에 대한 조롱, 체제에 대한 비판, 약자에 대한 연민을 담았다. 웃음 속 진심, 해학 속 분노. 그 모든 것을 담은 예술이었다. 그가 권력의 두려움이 되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풍자와 웃음은 진실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권에서도 웃음과 풍자가 문제였다
재미있게도, 아니 슬프게도, 지난 1952년 채플린이 받은 고난은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2022년 윤석열 정권의 대한민국에서도 유효했다.
지난 2022년 부천국제만화축제. 한 고등학생이 만든 '윤석열차'라는 제목의 만화가 공개되었다. 기차에 윤석열 대통령의 얼굴을 합성해 풍자한 이 작품은 당당히 경기도지사상 금상을 수상했고, 전시도 되었다. 하지만 작품이 발표된 이후, 논란이 터졌다. 문제는 문화체육관광부가 고등학생에게 '엄중 경고'를 했다는 것이다.
'윤석열차'는 학생작품이었다. 표현의 자유 안에서, 사회와 권력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다. 채플린이 히틀러를 조롱하며 권력의 본질을 까발렸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청소년이 권력자를 풍자한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 정권에서 돌아온 건 격려가 아니라 '엄중한 경고'였다.
당시 윤석열 정권은 "정치적 편향성이 우려된다"고 했지만, 나는 그들에게 되묻고 싶다.
그림이 무섭습니까, 권력이 불안한 겁니까?
고등학생의 붓 한 자루가 국정을 흔든다는 건, 그 자체로 풍자다.
웃음은 가볍지 않다. 오히려 가장 무거운 진실이다
채플린은 웃음을 이용해 권력을 비틀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어느 누구의 검열도 받지 않아야 했다. 그에게 웃음은 체제비판의 언어였고, 가장 고상한 저항이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그를 다시 이야기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웃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정권이 바뀌어도 웃음은 남는다. 그 웃음이 정권을 향했다면, 거기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참된 예술은 진영에 줄 서지 않는다. 진짜 예술은 인간을 향한다.
독재권력은 언제나 유머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가장 솔직한 풍자를 검열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12분의 기립박수는 단순한 박수가 아니었다
지난 1972년, 채플린은 다시 미국 땅을 밟았다. 무려 20년 만이었다. 미국 아카데미는 그에게 명예상을 수여했고, 관객은 12분간 기립박수를 보냈다.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긴 기립박수였다. 그 순간, 채플린은 무대에서 말없이 웃었지만, 그 웃음은 복수보다 품위에 가까웠다. 그는 끝까지 '영국 신사'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웃음은?
풍자가 사라진 사회는 비판이 사라진 사회이고, 비판이 사라진 사회는 침묵이 일상이 되는 독재사회다.
채플린은 말이 없었지만 다 말했고, 정치적이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바꿨다. 그의 영화는 무성영화였지만, 메시지는 언제나 '유성'이었다. 오늘, 우리가 다시 채플린을 말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고등학생의 만화 한 장도, 독재자 히틀러를 놀리던 채플린의 희극처럼, 우리사회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비추는 거울일 수 있다.
채플린이 만약 지금 우리 시대에 대한민국으로 돌아온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여러분, 정치적 광기가 닥쳐와도 풍자와 웃음을 잃지 마세요. 풍자와 웃음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저항입니다."
20세기의 위대한 희극인 채플린은 우리에게 그런 메시지를 남겼다. 권력의 광기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는 법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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