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아 일본 당국자가 과거사 정리 방안 3원칙을 제시한 가운데 양국이 관계발전으로 나아가려면 1910년 이전에 체결된 한일 간 조약은 무효라는 해석에 대해 일치된 견해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19일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사)외교광장, 독립유공자유족회가 주관하고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한일협정재협상국민행동,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역사기억평화행동, 서울대 일본연구소, (사)외교광장. 조국혁신당 김준형의원실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해방 80년, 한일수교 60년 기념 한일관계 대전환을 위한 국회토론회가 열렸다.
이번 토론회를 개최한 배경에 대해 주죄측은 "한일 양국은 여전히 식민지배의 법적 성격을 둘러싼 견해의 차이로 갈등을 이어가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일제 식민지배의 피해당사자인 북한과 일본은 여전히 미수교 상태에 머물러 있어 한반도 전체에 있어서의 과거사 극복과 미래지향적인 평화체제 구축의 길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1965년 체결된 한일기본조약 제2조와 제3조에 대한 해석 차이"가 문제라면서 이들 조항에 대한 한일 간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2조는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의 무효를 규정하고 있으며, 제3조는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일본은 그간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포함해 1905년 을사늑약 등에 대해 무효가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한 일본의 인권변호사인 도쓰카 에쓰로 류코쿠대 객원연구원은 이날 '국제사회에 있어서의 한일기본조약 인식'을 주제로 한 발제에서 해당 조약에 대해 본인의 인식이 바뀌어 온 과정을 설명하면서, 조약 무효를 주장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있는 일본의 상황을 전했다.

그는 1992년 일본군 '위안부'가 성노예였다며 유엔 인권위원회에 이를 제기하기 전까지 "일본이 한일합병조약에 의해 한국을 합법적으로 식민지화했다는 생각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았다. 지금은 반성하고 있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은 일본 정부의 정책(허위의 유포), 교육에 의한 고정관념의 주입, 언론의 역량 부족, 법률가들의 연구 부족에 의해 형성된 일본 사회의 '상식'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1992년 가을 런던대학교 도서관에서 1963년 유엔 국제법위원회(ILC)가 유엔 총회에 제출한 보고서(험프리 월도크 경에 의한 조약법 초안 작성 연구 결과)에 "1905년 보호조약은 일본이 대한제국 정부 대표 개인에게 강제와 협박을 가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무효라고 명시돼 있었다"는 점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도쓰카 교수는 "이 보고서는 1963년 유엔 총회에 제출되어 채택됐다. 1905년 보호조약이 절대적 무효라는 점은 1963년 이후 국제사회에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라며 그럼에도 일본에서는 이 보고서에 대한 어떠한 연구도, 보도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1905년 보호조약은 1910년 병합조약의 기반이었기에, 보호조약이 무너지면 병합의 정당성도 무너진다"며 일본이 이를 알리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이후 도쓰카 교수는 일본어로 된 논문 원고를 준비하고 모토오카 쇼지(本岡昭次) 참의원 의원에게 알렸으나 "이걸 실명으로 출판하면 살해당할 수도 있습니다!"라는 답장이 와서 또 한 번 놀랐다고 회고했다.
그는 "위험을 피하면서 1963년 ILC 보고서의 정보를 널리 알릴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1993년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유엔 NGO가 문서(영문)를 제출하는 형태로 발신하기로 했다. 쇼지 참의원은 국회에서 질문하겠다고 일본 정부에 통보했는데, 그때 외무성의 반응도 또 하나의 충격이었다"고 전했다.
도쓰카 교수에 따르면 당시 외무성 조약국장이었던 단바 미노루는 쇼지 참의원에게 "이 질문이 나오면 일본이 어디까지 추락할지 알 수 없다. 질문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며 버텼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외무성이 그토록 강하게 반발한 이유,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아마 1905년 보호조약이 절대적 무효라면, 대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은 것이 불법·무효가 되고, 이 조약이 창설한 통감의 법적 근거도 사라진다. 불법·무효한 통감이 체결한 1910년 병합조약도 기초가 붕괴되어 불법·무효가 된다. 병합조약은 당시에는 유효했다고 주장하는 일본 정부의 입장이 틀린 것이 되어, 대한제국을 식민지 지배한 국제법적 근거가 없어지게 된다. 일본 외무성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결론"이었다고 전했다.
이날 토론자로 참석한 오오타 오사무 도시샤대·대학원 교수는 "'한일공동선언'에서 식민지 지배를 사죄하고, '간 내각총리대신 담화'에서 '한일병합조약'이 '당시 한국 국민의 의사에 반하여' 체결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는 이상, '한일병합조약'이 애초부터 '무효(null and void)'였음을 인정하는 것이 모순 없는 해석"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한일기본조약 제2조와 강제동원'을 주제로 발제를 한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910년 한일병합조약의 유무효 여부를 따지는 것과 관련해 "강박에 의해 체결된 조약의 효력에 관한 '당시의 국제법'은 명확하지 않다. 성문의 국제법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관습법의 확립도 확인하기 어렵다"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다만, '국가의 대표자에게 강박을 가해 체결된 조약은 무효이다'라는 것이 당시 다수 국제법 학자들의 공통된 주장이었다는 사실은 확인되는데, '강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일치된 주장을 발견할 수 없다"라고 밝혔다.
그는 국제법에는 "국가대표자에 대해 과거의 비리를 폭로하겠다든가, 문자 그대로 권총을 들이대고 협박하여 조약의 체결을 다그치는 극적인 사태가 있는 경우에만 조약이 무효가 된다는 '늑대의 국제법'과 개별적인 폭력이나 강박(협박)의 존재의 증명이 가능하면 조약이 무효가 된다는 '양들의 국제법'이 있다"면서 일본이 '양들의 국제법'에 기반해 해당 조약의 유무효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일본이 강압적으로 한국에 조약 체결을 강요했고 그에 따라 이 조약이 무효임을 인정하는 것이 "평화를 유지하고, 專制(전제)와 隸從(예종), 압박과 편협을 지상에서 영원히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국제사회에서, 명예로운 지위를 차지('일본국헌법'전문)한다"는 일본의 법적 정체성에도 부합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동시에 그것은 북일 국교정상화로도 이어질 경우, '평화를 위한 공존공생'이라는 한반도 전체와 일본이 함께 지향해야 할 미래를 열어젖히는 길이기도 하다"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대한민국 정부(국회와 법원을 포함)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일본의 '불법강점'을 명확하고 지속적으로 견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원칙을 흔드는 실용은 결국 성공하지 못한다'는 경험"이라고 말해 이재명 정부의 소위 '실용외교'가 과거사와 관련한 원칙을 흔드는 수준까지 다다르면 안된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이어 그는 윤석열 정부가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한국 대법원으로부터 획득한 법정 채권을 없애기 위해 소위 '제3자 변제' 방식을 추진한 데 대해 "대법원 판결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공식입장과도 충돌하는 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변제'를 폐기하고, 일본 정부에 대해 '한국인 개인과 일본 기업 사이의 법적 분쟁에 개입하지 말라'라는 입장을 명확하게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이날 '북일 국교정상화와 한일조약 3조 문제에 대해'를 제주로 발표를 맡은 히라이 히사시 <교도통신> 객원 논설위원은 "1972년 9월 중일 수교 시의 '중일공동성명'에서는 '과거 일본국이 전쟁을 통해 중국 국민에게 중대한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깊이 반성한다'는 과거의 가해에 대한 '책임 통감'과 '반성'이 표명됐다"며 "그러나 한일협정에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나 반성에 대한 언급은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일 양국은 많은 대립된 문제를 '동결'한 채 보류하고 국교를 수립했다. 한일 국교 60주년을 맞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 반성과 제2조, 제3조, 영토, 개인청구권, 문화재,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등의 문제를 해소하고 한일 간 합의점을 모색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며 "한일 60년의 역사는 이러한 문제를 뒤로하고 도망쳐 온 역사"라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 제3조에서 남한 정부를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는 내용에 대해서도 한일 간 차이가 있다며, 이 부분의 해석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기하기도 했다.
히라이 논설위원은 "일본은 '대한민국은 유엔 감시하에 선거가 실시된 남반부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인 정부'라는 이해이고, 한국은 '대한민국은 한반도 전체의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라는 이해"라며 조약 체결 당시부터 일본이 이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悦三郎) 당시 외무상은 1965년 10월 28일 중의원에서의 답변에서 제3조에 대해 "이 조약의 체결로 인해 북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 "제3조가 있기 때문에 일본은 북과의 국교는 장래에도 절대로 할 수 없도록 이를 봉쇄한 것이라는, 그런 해석은 잘못이다, 이점을 말씀드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히라이 논설위원은 이에 대해 "장래의 북일 국교정상화 가능성을 지적함으로써, 한반도에 있어서 북한의 국가로서의 존재를 인정하고, 한국이 한반도 전체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인 정부가 아니라는 인식을 보였다"고 해석했다.
그는 "남북한이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아닌 특수관계라는 생각은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다. 한국도 남북관계를 '특수관계'가 아니라 '나라와 나라의 관계'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 것 같다"며 "일본도 한국도 남북관계를 적대적 관계로 규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지향해야 할 것은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에서 '평화적인 양두 국가관계'로 전환하고 남북 평화공존 노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히라이 논설위원은 "이 맥락에서 말하면 한일조약 3조의 해석도 당연히 한국은 북한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일본 측의 해석 입장으로 통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국이 한반도를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 정권이라면, 일본은 이미 한일 조약에 의해 경제 원조를 실시하고 있으므로, 북한에 배상하거나 경제 원조를 할 필요가 없게 된다. 물론 그런 일이 허용될 리는 없고, 일본은 북한에 대해 배상이나 경제 원조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16일 주한일본대사관 주관으로 서울에서 열린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기념 리셉션 참석 차 한국에 방문한 나가시마 아키히사 일본 총리 보좌관은 이날 오후 한국외교협회와 최종현학술원이 개최한 특강에서 연설을 통해 '역사 문제를 올바르게 관리하기 위한 세 가지 원칙'을 제안하기도 했다.
중의원이면서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안보 부문 보좌를 담당하고 있는 나가시마 보좌관은 △단기적인 이해득실에 얽매어 양국의 장기적인 전략적 이익을 놓치지 않을 것 △과거의 합의(정부 담화)를 최대한 존중하고 결코 후퇴시키지 않을 것 △양국 국민들을 용기를 가지고 설득할 것 등의 원칙을 제시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