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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혜진의 아름다운 우리가락] 장단(長短)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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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혜진의 아름다운 우리가락] 장단(長短)의 미학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음악의 숨결

해금을 연주하다 보면 어떤 순간은 활이 아니라 숨으로 소리를 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때 나의 음악을 이끄는 것이 바로 장단이다.

연주자로서 나는 종종 장단을 ‘보이지 않는 손’ 같다고 느낀다. 무대 위에서 숨이 막힐 듯 긴장되는 순간에도, 흥이 넘쳐 저절로 몸이 움직일 때에도, 결국 음악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주는 건 장단이다.

장단은 단순히 박자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의 호흡과 감정을 조율하고, 그 흐름에 따라 청중과의 교감을 이끌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장단, 박자 그 이상의 언어

한국 전통음악에는 독특한 리듬이 있다. 그것은 단순히 박자를 세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흐름을 이끌고 감정을 자아내는 ‘장단(長短)’이다.

장단이라고 하면 흔히 길고 짧음의 ‘박자’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전통음악의 세계에서 장단은 단순히 박자를 맞추는 리듬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장단은 음악의 흐름을 이끄는 동시에 감정의 고저와 연주의 호흡까지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같은 곡도 장단이 달라지면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변화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단이 단순한 박자와 다른 점은 그 안에 품은 중요 개념인 ‘한배’ 때문이다.

한배는 빠르기와 느림의 느낌을 뜻하는데, 한국 전통음악은 한배의 여유와 변화를 통해 독특하고 미묘하게 감정선을 조절한다.

예를 들어 판소리에서 가장 느린 진양조 장단은 느릿한 한배로 듣는 이의 가슴 깊은 곳을 울린다. 반면 빠른 자진모리는 경쾌한 박자 속에서 흥을 이끌어내며 감정을 고조시킨다.

장단의 미학은 이렇게 박자에 담긴 보이지 않는 감성에서 시작한다.

여백과 신명, 장단이 만드는 풍경

한국 장단은 크게 두 가지 감성을 지닌다. 첫 번째는 느린 장단에서 느껴지는 ‘여백’의 미학이다. 민속악의 진양조나 정악에서 주로 사용한 느린 장단에서는 소리가 아닌 침묵이 오히려 더 강렬한 음악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박과 박 사이의 여백은 음악의 흐름에 숨을 불어넣고, 듣는 이에게 감정을 음미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예컨대 궁중음악에서 쓰는 느린 장단은 연주가 아닌 침묵 속에서도 엄숙하고 품격 있는 분위기를 형성한다. 궁중의 연례악이 주는 그 독특한 긴장과 여운이 바로 느린 장단이 지닌 여백의 힘이다.

두 번째는 빠른 장단에서 느껴지는 ‘신명’이다. 민속악에서 빠른 장단은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지닌다.

판소리, 산조와 사물놀이 등에서 쓰이는 자진모리와 휘모리 같은 빠른 장단은 듣는 사람의 어깨를 들썩이게 하고 발을 구르게 한다. 빠른 장단의 매력은 즉흥성과 다양성에도 있다.

이러한 장단의 자유로운 변주는 연주자와 관객 모두를 신명의 한가운데로 이끌어간다.

이 두 가지 요소 여백과 신명은 전통음악의 장단이 지닌 미학적 특징이다. 여백이 정적인 아름다움을 준다면 신명은 동적인 에너지를 전달한다.

장단은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가지 감정을 넘나들며 우리의 음악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 소리꾼과 고수(송순섭 선생 공연) ⓒ국가유산청

우리 음악의 DNA, 혼합박과 종교 음악

한국 장단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특징은 ‘혼합박’이라는 독창적인 리듬 구조다.

혼합박은 하나의 장단 안에 2박과 3박 같은 서로 다른 박자가 섞이는 형태로 서양 음악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적 리듬의 독특한 양상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엇모리’ 장단이다. 3박과 2박이 교차로 나타나는 엇모리는 마치 불균형 속에서 묘한 균형을 이루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특히 판소리의 극적인 장면이나 민요의 중요한 부분에서 자주 등장하여 음악에 특별한 긴장감과 독특한 리듬감을 불어넣는다.

이 혼합박의 원형은 무속음악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의 무속음악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종교적 음악으로 상황과 감정에 따라 장단이 자유롭게 변화한다.

경기도당굿이나 동해안 별신굿에서는 독특하고 복합적이고 즉흥적인 장단이 등장하는데 굿의 진행을 이끌면서 무당의 감정 상태와 굿의 목적에 따라 즉흥적으로 변형된다.

이런 즉흥성과 혼합적 리듬 구조는 민속음악과 판소리에도 영향을 주어 한국 음악의 독창성을 형성했다.

불교음악의 범패(梵唄) 역시 독특한 리듬적 특징을 지닌다. 범패는 겉보기엔 장단이 없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긴 호흡과 불규칙한 리듬이 공존하며 매우 정교한 구조를 형성한다. 홋소리와 짓소리 같은 범패의 복잡한 리듬은 듣는 이에게 명상과 깊은 평온함을 전달한다.

이처럼 한국 음악의 뿌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불규칙성’이다. 일반적으로 음악은 규칙적인 리듬을 유지하지만 이 종교음악들에서는 의도적으로 불규칙한 리듬이 자주 나타난다.

이런 불규칙성은 장단에 강한 생동감을 부여하며 듣는 이의 집중력을 높이고 독특한 긴장과 감흥을 이끌어낸다.

이렇게 종교음악에서 비롯된 혼합박과 불규칙성은 현대적으로 재해석되며 우리 전통음악의 예술적 깊이와 독창성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 영산재 중 귀의 게. ⓒ국가유산청

장단이라는 우리의 문화적 자산

장단은 단순한 박자가 아니라 수 백년 이상 한국인의 삶과 감정을 담아온 문화적 자산이다.

장단 안에는 한국인의 미의식과 정서, 삶의 철학이 담겨 있다. 판소리와 농악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이러한 문화적 가치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느림과 빠름의 극적인 대비, 여백과 신명의 공존, 혼합박의 독특함이 어우러진 장단은 이제 세계적 음악 언어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다.

장단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몸을 이끄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오늘날에도 전통과 현대를 이어주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며 계속해서 변화하고 진화하고 있다. 한국 전통음악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바로 이 장단이 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독자들이 혹시 전통 공연을 관람할 기회가 생긴다면 무대 위 장단의 미묘한 여백과 흥겨운 신명을 느끼면서 이 깊은 음악 세계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여정을 함께 하길 바란다.

그 순간이야말로 한국 음악과 장단이 주는 진정한 감동과 만나는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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