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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와 처칠, 적인가 동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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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와 처칠, 적인가 동지인가

[김성수의 영국이야기] 영국 역사의 아이러니와 두 인물이 남긴 유산

마하트마 간디와 윈스턴 처칠. 20세기를 대표하는 두 인물은 히틀러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도 결코 손을 잡지 못했다. 오히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사의 최대위기 상황에서, 이들의 갈등은 더욱 첨예하게 드러났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대립을 넘어 제국주의와 탈식민주의, 서구 문명과 동양철학, 폭력과 비폭력이라는 근본적 가치관의 충돌이었다.

전쟁 중 엇갈린 길, 동상이몽의 반파시즘

1939년 9월,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자 간디는 "자유로운 나라가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것"에 동조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영국이 인도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인도를 전쟁에 끌어들인 것에 격분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에 참여하라고 하면서, 정작 우리에게는 민주주의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 간디의 논리였다.

반면 처칠에게 인도는 '제국의 진주'였다. 그는 1942년 의회에서 "나는 대영제국의 청산인이 되기 위해 국왕의 수상이 된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히틀러와의 생존게임에서 인도는 필수불가결한 자원과 인력의 공급처였으며, 간디의 독립요구는 전쟁 수행에 치명적인 방해물로 여겨졌다.

1942년 8월, 간디가 '인도를 떠나라(Quit India)' 운동을 시작하자 처칠은 주저 없이 간디와 주요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전쟁 중에는 제국의 단결이 최우선"이라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치의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던 처칠이, 인도에서는 민주적 저항을 탄압하는 모순을 보인 것이다.

1943년 벵골대기근, 인도주의 vs 전쟁논리

두 인물의 철학적 차이는 1943년 벵골대기근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300만 명이 굶어 죽는 참사 앞에서 간디는 영국 정부의 무책임을 강력히 비판했다. 그는 단식투쟁을 통해 세계의 관심을 환기시키려 했다.

하지만 처칠의 반응은 냉혹했다. 그는 인도의 곡물을 유럽전선으로 보내는 것을 우선시했고, "인도인들이 토끼처럼 번식하니 기근도 당연하다"는 식으로 발언했다. 전쟁승리라는 거대한 목표 앞에서 인도인의 생명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이때 간디는 "파시즘과 제국주의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히틀러의 인종주의와 처칠의 제국주의적 오만함이 과연 다른 것이냐는 것이었다.

철학의 충돌, 폭력 vs 비폭력, 제국 vs 독립

간디와 처칠의 대립은 단순한 정치적 갈등을 넘어 철학적 세계관의 충돌이었다. 간디는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며 비폭력 저항을 고집했다. 설령 히틀러에 맞서더라도 폭력으로는 진정한 승리를 얻을 수 없다고 믿었다.

처칠에게 이런 관념론은 위험한 몽상에 불과했다. "때로는 선을 위해 악과도 손을 잡아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정치관을 가진 그는, 스탈린과의 연합도 주저하지 않았다. 문명의 존망이 걸린 상황에서 이상주의적 순수성은 사치라고 여겼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 모두 히틀러를 일찍부터 위험한 존재로 인식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대응방식에서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처칠은 군사력을, 간디는 도덕적 권위를 통해 파시즘에 맞서려 했다.

영국사회에 미친 이중적 영향

전후 영국사회에서 간디와 처칠은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처칠은 '히틀러를 물리친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영국의 자존심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의 웅변과 불굴의 의지는 영국인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처칠에 대한 평가는 복잡해졌다. 제국주의적 사고와 인종차별적 발언들이 재조명되면서, 영국 내에서도 비판적 목소리가 커졌다. 2020년 영국에서 흑인인권 시위 때 처칠 동상이 훼손당한 것은 이런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간디는 영국에서 점진적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초기에는 '제국을 해체한 위험한 선동가'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평화와 인권의 상징'으로 인식된다. 그의 비폭력 철학은 마틴 루터 킹, 넬슨 만델라 등에게 영감을 주었고, 현대 영국의 시민불복종운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역설적 유산, 적이면서 동시에 스승

간디와 처칠의 관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서로를 적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처칠의 전쟁지도력은 파시즘으로부터 민주주의를 구했고, 간디의 독립운동은 제국주의 시대를 종식시켰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20세기의 거대한 변화를 이끌었다. 처칠은 구질서의 마지막 수호자로서, 간디는 신질서의 예언자로서 역사에 족적을 남겼다. 이들의 갈등과 대립자체가 제국주의에서 탈식민주의로, 인종차별에서 인권으로 향하는 시대적 전환을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현재적 의미, 미완의 대화

오늘날 영국사회는 여전히 간디와 처칠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브렉시트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글로벌 브리튼'이라는 처칠식 웅대함과 '다문화 공존'이라는 간디식 포용성이 충돌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우크라이나전쟁, 기후위기 등 21세기의 도전 앞에서 영국은 다시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처칠의 현실주의적 리더십과 간디의 이상주의적 비전 중 무엇이 더 필요한가? 아니면 두 가지 모두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결론적으로 간디와 처칠은 2차 대전 중 히틀러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도 결코 동지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들의 대립과 갈등자체가 영국을 더 성숙한 사회로 만드는 자양분이 되었다.

한 사람은 승리를 통해, 다른 한 사람은 저항을 통해 각자의 길을 걸었지만, 결국 둘 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는 같은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영국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동시에 희망이기도 한 대목이다.

▲간디(오른쪽)과 처칠.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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